276화
[고래의 존재가 옅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념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태초의 빛이 사념을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태초의 고래를 공격할 때마다 눈앞에서 일렁이는 메시지들이었다.
그리고 벼락이 태초의 고래를 내리칠 때마다 태초의 고래의 신체가 급격한 속도로 사라졌고, 그럴수록 사념 역시도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비스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사념이 사라짐과 동시에 생겨난 변화는.
'내 몸속의 사념도 옅어지고 있다.'
어느새 꽤나 익숙해졌던 그 사념이 이 순간에도 빠르게 희석되며 공기 중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어어어어-!
그 순간에도 태초의 고래가 괴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쉴 새 없이 태초의 빛을 응축하여 번개 모양으로 만든 뒤, 태초의 고래를 향해 끝없이 쏟아냈으니.
번쩍! 쿠우우웅! 쿠쿠쿠쿵!
그아아아아아아!
태초의 고래가 다시 한번 괴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때.
'…….'
나는 내리치던 벼락을 멈췄고.
쿠우웅!
태초의 고래의 몸이 바닥으로 추락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우웅! 우우웅!
거대했던 태초의 고래의 몸이 작게 진동하며 축소되기 시작했으니.
'…변했군.'
녀석의 모습은 어린아이의 모습이 되어 있었고, 기절한 듯 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몸이 가늘게 들썩이고 있는 녀석은 정말 평온한 얼굴을 한 채로 내가 다가간 줄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어이가 없군.'
조금 전만 하더라도 모든 걸 집어삼키겠다는 기세로 날뛰던 커다란 고래가 맞는지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
저벅
"……."
저쪽에서 칼제르와 베르제르, 그리고 헬라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 녀석이…."
"그래. 너희를 이곳에 있게 만든 장본인이었지."
"믿을 수 없군. 대체 이 녀석의 정체가 뭔가."
칼제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내게 물어왔다.
그렇겠지.
칼제르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게 당연하다.
뜬금없이 자신 앞에 나타난 커다란 고래.
그리고 그 고래가 쓰러져 갑자기 인간의 형태로 누워있었으니.
맥락이 이해가 안 될 수밖에.
"확실한 건, 이 녀석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고, 곧 모든 것의 끝이 될 녀석이라는 거지."
"그렇군. 이 녀석이었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이 아이를 죽여야 하는 건가?"
"글쎄."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법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단서가 없는 건 아니다.
'세계의 뿌리랬나.'
마지막 순간, 설계자가 내게 말했던 그것.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는지 말을 해 줬으면 좋았겠지만.'
설계자는 그것까지 자세하게는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게 생긴 능력이 그 열쇠라고 짐작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선 해보는 수밖에.'
나는 천천히 태초의 빛을 움직여 자고 있는 녀석의 몸을 향해 움직였다.
태초의 빛은 놈의 몸을 천천히 감싸기 시작했고.
그 순간.
쿠득- 쿠드득!
아이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태초의 빛이 남아 있는 모든 사념을 포식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념을 걷어내고, 세계의 뿌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쿠득- 쿠드드득!
내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와 함께, 잠자고 있던 아이가 천천히 뿌리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으니.
그때.
[내가 이제 너를 소환할 거야.]
다시 설계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반가운 풍경이군요."
설계자가 나를 소환한 공간은, 이전에 한 번 와봤던 곳.
설계자와 내가 처음 만났던 그 장소였다.
"우리 추억을 떠올리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며 설계자는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많이 지쳐 보였다.
그럴 테지.
이 모든 게 자신의 손에서 시작된 것이고, 또 많은 이들을 속여 왔다는 죄책감도 느끼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는.
수수수-
땅에 뿌리를 내린 채 가지를 뻗어 올리기 시작하는, 세계의 뿌리가 놓여 있었다.
설계자가 나와 함께 이 장소로 소환한 것이었다.
"결국 해냈구나."
설계자는 나와 뿌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덕분이겠죠."
인사치레는 아니다.
정말이니까.
설계자가 마지막에 내게 건네줬던 그 힘이 아니었다면, 그 괴물 같은 고래와 싸우리라는 건 상상도 못 했을 테지.
그리고 그 힘으로 인해서 나에게 마지막에 태초의 빛이라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생긴 것도 맞다.
"놀라운 힘이었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하며 설계자가 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손 내밀어 볼래?"
"……."
설계자의 말 그대로, 나는 손을 내밀었다.
설계자는 내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바닥을 포갰다.
그리고 내 눈을 바라봤다.
"어떻게 할래?"
"…뭘 말입니까."
"이제 모든 건 너의 선택이야. 처음에 내가 네게 말했었지. 그 힘을 넘겨주면서 말이야. 다시 가져가겠다고."
"예."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너에게 남겨 줄 생각이야. 너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
"하지만 원치 않는다면 다시 가져갈 거야. 물론 너에 대한 신뢰가 있으니까 내린 결정이야. 그 힘을 가지고 있어도 네가 그 힘을 남용하지 않으리라는 신뢰."
"…만약 이 힘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는."
내 물음에 설계자가 싱긋 웃었다.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겠지."
"원래의 삶…?"
"응.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다른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삶을 살아가겠지."
"…잠시 앉고 싶은데요."
"그래."
설계자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나와 설계자가 서 있던 공간이 바뀌었다.
"이 정도면 괜찮을까?"
바뀐 공간은 작은 방이었다.
평범한 가정집에 있을 법한 그런 방 말이다.
"…좋군요."
그리고 나는 방구석에 있는 소파에 가 앉았다.
"마음에 들 거야. 네 머릿속에 있는 그림 하나를 따와서 만들어 낸 공간이거든."
"…나도 몰랐는데 대단하군요."
"그렇겠지. 무의식이라는 말을 들어봤지?"
"……."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언젠가 내가 한 번쯤은 떠올렸을 법한 장면이라는 건 나도 모르지 않았다.
"편히 생각해. 내가 말했던 그대로 나는 너의 선택을 존중할 거야. 네가 무슨 선택을 하건, 나는 너를 위해 행동할 거고."
"든든하군요."
그리고 어느새.
"……."
내 앞에 있던 작은 탁자 위에 캔맥주 하나가 올려 있었다.
탑에서 먹었던 그런 맥주가 아니라.
지구에서 가끔 한 캔씩 사 먹었던 캔맥주가 말이다.
"이건 또…."
"글쎄. 내가 만든 건 아닌데."
"내가 만들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응."
"……."
설계자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얼마 전, 태초의 고래와의 싸움을 앞두고 생각했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척-
나는 캔맥주를 집어 들고.
치익!
맥주 한 캔을 땄다.
"사치로군요."
사치.
이런 맥주 한 캔을 뜯는 게 무슨 사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랬다.
특히나 아무런 걱정도, 앞으로 이어질 싸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으면서 마시는 맥주라면 더더욱.
사아아-!
맥주의 탄산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갔다.
따갑다.
맥주의 탄산에 나는 잠시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리고 문득, 나의 전신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괴물 같은 몸.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단련되고 극한으로 성장한 나의 육체.
'그랬지.'
벌써 몇 번이나 인간 같지 않다는 말을 들어왔다.
감히 인간으로서 범접할 수 없을 존재들에게 들어왔던 말이다.
칼제르, 에인션트 드래곤.
용인들의 수장이었던 헤르야.
그런 이들은 모두 나를 보며 놀랐고, 경탄했으며 나는 그들 위에 올라섰다.
툭-
맥주 캔을 탁자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더 안 마셔?"
"……."
설계자의 물음에 나는 말 없이 그저 설계자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천천히 결정해도 돼. 너의 선택이라면 그게 무엇이건 틀리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믿거든."
어느새 설계자 역시도 작은 의자 하나에 몸을 걸치고 있었다.
설계자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밝은 척인지, 정말 기분이 좋은 것인지까지는 내가 분간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 그녀의 미소는 내 마음을 녹여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다시.
나는 맥주를 들고 한입에 삼켰다.
맥주 한 줄기가 턱을 타고 흘러내리며 가슴까지 흘렀다.
"크…."
내 입에서 흘러나온, 나조차도 익숙지 않은 감탄사에 나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 순간, 내 마음이 굳어졌음을 나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맥주를 한 번에 삼켜낸 나는 빈 깡통을 탁자 위에 올렸고.
"살고 싶습니다."
"응…?"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남들처럼요."
내가 말했다.
평범한 삶.
그게 무엇인지.
솔직히 모르겠다.
내가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다른 사람과 같은 감정을 느끼며 이러한 일상의 사치를 누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더 이상 죽음이라는 것과는 멀어진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진심이었다.
"그래."
그렇게 말하며 설계자가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내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는 미소 지으며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고.
"고마워."
내 이마 위로 자신의 입술을 작게 포개었다.
그와 동시에 내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한 채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
띠리리리링!
"……."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그리고 나는 내 주변을 둘러봤다.
"…이게 무슨…."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마지막 기억 속의 장면은, 설계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 장면이었는데.
"…여기는…."
웬 낯선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는 나를 보며 혼란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 옆을 바라봤다.
내 옆에 있는 건, 낯선 핸드폰.
"이게 대체…."
나는 화들짝 놀라 창을 열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지구…?"
그래.
분명히 여기는 지구다.
지긋지긋하던 탑의 풍경이 아니라, 내 눈앞에 지구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다시, 홀린 듯 창을 열어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집 한쪽에 나 있는 커다란 창밖으로 펼쳐진 지구의 풍경은….
'아….'
달랐다.
내가 알고 있던 지구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
저 먼 곳에 우뚝 솟아 있는 탑과, 그 탑 위로 얼핏 보이는 다른 세계들.
'아마 고래에게 잡아먹혔던 또 다른 세계들인 모양이야.'
그중에는 분명 천족과 마족들이 살고 있을 법한 풍경도 얼핏 보였으니.
나의 추측이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 칼제르와 헬라를 다시 만나 볼 수도 있다는 말인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 방법은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지금 당장 그들을 만나러 갈 수는 없겠지.
적어도 지금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에 대해서는 파악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여기가 지구인 건 확실해.'
결국 지금 나에게 보이는 장면들은 지구였지만, 내가 알던 지구와는 조금 다른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때.
띠리리리링!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전화를 들어 화면을 살폈고, 그 위에는 익숙한 글자 하나가 떠 있었다.
[박명철]
박명철.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