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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창이 달라졌다-275화 (275/277)

275화

'...!'

나조차 놀랄 정도의 힘이었다.

그저 손을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저 괴물의 신체를 지워 버릴 줄이야.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

[거대한 사념을 흡수했습니다.]

[태초의 빛의 위력이 더욱더 강해집니다.]

이 빛은 능력 포식자 그 자체였다.

말 그대로다.

이전의 포식자라는 능력의 모든 면에 있어서 상위 호환된 능력이 바로 이 태초의 빛.

'확실하다.'

이 빛이 상대를 감싸는 순간, 빛은 상대의 '모든 것'을 그 순간에 나의 것으로 만든다.

이전의 포식자가 상대를 처치하고, 상대의 스킬이나 능력 일부를 빼앗았던 것과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능력인 셈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을 가리고 있는 메시지들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태초의 고래의 존재를 흡수했습니다.]

[더욱더 강인한 기운이 신체를 감싸기 시작합니다.]

[폭발적인 사념이 신체에 깃들기 시작합니다.]

고래의 존재를 흡수했고, 고래의 힘과 사념이 나에게로 전해지고 있었으니.

고오오오!

나를 감싸고 있던 태초의 빛은 그 찬란함을 더하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군.'

지금 이 순간에도 태초의 고래는 격렬하게 몸을 뒤틀며 포효하고 있었다.

사라진 놈의 몸의 일부는 전혀 재생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삭제'가 되어 버렸다는 뜻.

하지만 문제는, 놈의 신체의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놈의 몸체는 그만큼이나 거대했으니, 이 강력한 힘으로 놈의 몸을 잡아먹었다고 해도 전체로 본다면 그리 큰 티가 나질 않았다.

'하지만 이미 가능성을 봤으니.'

천천히, 갉아 먹어주마.

밑바닥부터 여기까지 올라왔다.

그런 마당에 이런 힘을 손에 넣고서 고래 하나 씹어 먹지 못해서야 그동안 나의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

나는 다시 움직였다.

두 손을 움직임과 동시에 태초의 빛이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쏟아져 내렸고.

콰아아아앙!

태초의 고래를 감싸기 시작했다.

***

"대단하군요."

"그래.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그 무렵, 설계자들은 한곳에 모여 있었다.

어비스의 정상 한구석.

그리고 그곳에는 그 누구도 들어 올 수 없도록 완벽한 결계가 그들이 있는 공간을 외부와 완전히 격리하고 있었다.

강민이 태초의 고래와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동안, 그들 역시 모든 것을 종결짓기 위한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그 준비란.

"모든 것을 되돌려야 해. 원래대로. 저 고래가 존재하기 전으로 말이야."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가 다른 설계자들을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준비는 됐어?"

"예. 흩어진 세계의 파편들을 모아 왔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죠."

"저도 이만큼은 모았습니다."

"저도요."

설계자들은 세계의 파편이라고 부르는 구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구슬 속에는 각기 다른 풍경들이 펼쳐져 있었다.

세계의 파편이라는 말 그대로 작은 구슬 속에는 각각의 세계가 담겨 있었으니.

"이 모두가 저 아이가 집어삼킨 세계라니."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는 씁쓸한 눈빛으로 세계의 파편을 바라봤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서 이토록 많은 세계들이 제 위치를 잃은 채 고래의 배 속에서 오랜 시간을 떠돌았다는 뜻이지 않은가.

"그래. 다들 고생했다. 우리는 이제 이 세계를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아야 해.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과제다."

"알고 있습니다. 이 순간을 위해 우리가 오랜 시간을 그 개고생을 해온 것 아니겠습니까."

설계자 한 명은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를 흘기며 말했다.

물론 악의가 담긴 시선은 아니었다.

그저 작은 투정.

"미안해."

"후. 뭐 어쩌겠습니까. 이리된 거 어서 끝내서 푹 잠이나 자고 싶군요."

"그래. 조금만 더 고생해 주길 바라."

설계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건, 강민이 태초의 고래와 싸우고 있을 그 곳.

'달라진 지구 역시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줘야겠지.'

탑이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로.

탑이야말로 강민의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던 이유였을 테니까.

'괴로웠겠지.'

강민의 삶을 돌아보자면 설계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강민을 향한 미안함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의 잃어버린 삶과 행복은 되찾아 주마.'

설계자는 그렇게 다짐하며.

"자, 그럼 시작하자."

"예."

설계자들은 세계의 파편들을 하나하나 집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계를 복구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

콰직! 콰득! 쿠웅!

하늘에서 땅으로 태초의 빛이 쏟아져 내릴 때마다 태초의 고래의 몸의 일부는 나에게로 흡수되었다.

하지만, 태초의 고래 역시 쉽사리 당해 주지는 않았으니.

쾅! 콰콰콰쾅!

태초의 고래가 지느러미를 펄럭일 때마다 놈의 몸속에서 솟구친 사념이 천지를 요동치고 있었다.

그 틈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천족과 마족들은 진즉에 먼 곳으로 대피를 한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괴물 같은 녀석.'

놈의 사념은 이제 물리적인 영역뿐만이 아니라, 같은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내부를 파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꺼어어억!"

"사, 살려…."

"구어억!"

놈이 사념을 움직일 때마다 천족과 마족, 묘족들은 피를 토했고, 사념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시간을 더 지체해서는 안 된다.'

일반 천족과 마족들뿐만 아니라, 저 먼 곳에 있는 칼제르와 헬라의 기척도 위태롭다는 게 느껴졌다.

그들의 호흡은 점점 더 가빠졌고, 또렷하던 존재감이 이 순간에도 빠르게 옅어지고 있었다.

[노오오오옴…!]

그때 태초의 고래가 음성을 흘렸다.

노기가 충만한 놈의 음성은 나에게로 향했고, 그 음성에는 역시나 짙은 사념이 담겨 있었으니.

파직! 파지직!

놈이 음성과 함께 흘려보낸 사념은 나를 공격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짓.

더 이상 사념은 그 어떤 수를 쓰던간에 나를 공격할 수 없었으니까.

'내가 미리 놈의 몸속에서 사념 구체를 파괴하지 않았으면 피해는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확실히 내가 놈의 몸속에서 나온 뒤와 나온 후 놈의 상태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놈은 많이 약해졌고, 사념의 농도도 훨씬 옅어진 상태였으니까.

만약 그 과정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아마 칼제르는 태초의 고래에게 저항할 수조차 없었을 테지.

'서둘러 끝내자.'

그렇다고는 해도 이미 다른 이들의 피해는 크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을 잃어가는 천족과 마족들의 기척이 초감각을 통해 끝없이 전해지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다.'

구구구구!

내가 태초의 빛을 움직이려고 시작하려던 그 때.

[그 녀석을 처치하고 난 뒤, 세계의 뿌리를 가져다줘.]

설계자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어른거렸다.

'세계의 뿌리?'

[그게 있어야 망가진 세계들을 복구 할 수 있어.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리고 세계의 뿌리가 바로 모든 것을 원래 대로 돌려놓을 수 있는 열쇠고.]

'...'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정말로 이 모든 것을 끝낼 때가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었고.

'그래.'

쩌저적! 쩌어어억!

내 손 위로 빛이 뭉치며 커다란 번개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어서 돌아가 시원하게 맥주라도 한잔하고 싶군.'

그런 생각과 함께.

쿠구구구구궁!

태초의 빛이 만들어 낸 번개가 태초의 고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앙!

***

"어떻게... 잘 되고 있을까요?"

"뭘 걱정 해?"

"그래도... 벌써 떠난 지 꽤 오래됐잖아요."

김민희.

그녀가 강민이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중앙섬이 있는 그곳 말이다.

말 그대로 강민이 떠나간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강민은 돌아올 줄 몰랐으니.

"걱정하지 마. 강민씨는 절대 질 사람이 아니야. 분명 머지않아서 승리 소식을 들고 우리를 찾아올 거야."

"그렇겠죠."

"당연하잖아. 먼저 어비스에 올라왔을 때도 우리가 저 아래에서 했던 걱정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게 밝혀지지 않았어?"

박명철의 말에 김민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싸움을 안 한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아요."

그 무렵, 어비스 하층에서는 위드 길드의 플레이어들의 모여 식사를 마친 참이었다.

평화로운 일상이다.

저 위쪽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걱정도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꿈만 같네요 이 탑에 올라오고 난 뒤로부터 이렇게 평화로웠던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김민희가 말했고, 박명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에 든 커피잔을 입에 가져다 댄 채로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그래. 그렇지. 정말 끝없는 싸움의 연속이었으니까."

"만약... 정말 만약에요..."

김민희는 조심스레 박명철을 바라보며 운을 띄웠다.

"음?"

"만약 이 싸움이 정말로 끝이 나면요. 그러니까... 정말 강민씨가 모든 걸 끝내게 된다면 말이에요."

"어, 음... 응. 그래서?"

"그러면... 뭘 하고 싶어요?"

김민희의 물음에 박명철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

"어... 글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플레이어가 되어 탑을 오르는 것만을 꿈꾸고 생각해 왔다.

탑에 올라 길드를 만들고 강민을 만나 이 순간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

탑과 몬스터, 그리고 싸움은 박명철에게 있어서 삶이었고, 일상이었으니.

"...그러게?"

문득 다시 의문이 떠올랐다.

"이 탑이 없었으면 우리는 뭘 하고 있었을까."

"...그렇죠? 조금은 무서운 것 같기도 해요."

홀짝

김민희는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그리고 그때.

"다들 뭘 그리 걱정들 하시나."

그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동희가 풉, 하고 웃으며 끼어들었다.

"뭘 하긴 뭘 해요. 같이 놀이동산도 놀러 가고. 엉? 밤에 만나서 소주 한잔하면서 노래방도 가고... 그러는 거지 뭐."

"..."

낯설었다.

저런 평범한 일상이 쉽사리 상상이 가질 않았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겐 평범할 수 있는 삶일지 모르겠으나, 각성하여 플레이어로 살아 온 그들에게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것들.

"...그렇네. 그러게 말이야."

김민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던 중.

쿠궁! 쿠구구구궁! 쿠구구구!

어비스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 뭐..."

"이게 무슨 소리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갑작스레 들려 온 굉음에 깜짝 놀라 밖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위드 길드의 세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급히 시선을 돌리며 소음의 원인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니.

그때.

"저, 저기…."

누군가가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 하늘에선.

쿠릉! 쿠르르릉!

마치 번개가 내리치듯, 번쩍이는 하늘과 그 너머에서 격렬하게 몸을 뒤트는 거대한 무언가가 어렴풋이 비쳐 보였고.

"고, 고래? 저거 고래 아니야?"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리고 그 말 그대로, 저 너머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거대한 무언가의 정체는 바로 고래였다.

쿠릉! 쿠르르릉!

그 고래 위로 쉴 새 없이 내리치고 있는 벼락과.

"…설마…."

"아마… 맞는 것 같아."

그 벼락을 내리치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을 박명철과 김민희, 한동희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한강민…."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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