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젠장."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입가를 흥건하게 적신 피를 닦아냈다.
"이백 개쯤 파괴한 것 같으이…."
내 옆에서 파괴된 구체를 세고 있던 노인이 말했다.
이백 개.
벌써 그렇게 많이 파괴했나.
하긴.
이제 슬슬 소환체들이 구체를 운반하는 속도도 느려진 걸 보면 이 안에 있는 구체를 꽤 많이 파괴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그리고 실제로 내가 서 있는 이 공간도 많이 무너져 있었다.
이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공간 속에서 나와 노인은 구체를 파고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어느새 태초의 고래의 소화액이 이 공간에 크게 들어차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그 말은 즉, 태초의 고래가 이미 많은 것들을 집어삼켰다는 뜻이리라.
'시간이 없다.'
나와 노인은 그나마 지대가 높은 곳에 올라와 소화액을 피하고는 있었지만, 이제 머지않아 이곳마저도 소화액에 뒤덮이게 되리라.
렘과 오러를 이용해서 어느 정도 몸을 보호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소환체들이 구체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소화액이 뒤덮어 버렸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건, 구체를 거의 다 파괴했다는 거겠지.'
완벽하진 않지만, 이제 남은 구체는 전체 구체 중 반 이하.
그리고 내가 파괴한 구체의 비율 만큼 태초의 고래의 힘이 약해졌다는 건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놈의 속에서부터 갉아 먹겠다던 그 계획 말이다.
태초의 고래는 사념 그 자체.
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던 구체를 파괴하고, 내가 모조리 집어삼켰으니까.
파짓!
이 순간에도 내 마나하트 언저리에서는 폭주하기 직전으로 넘쳐나는 사념이 위태롭게 오러, 그리고 렘과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내가 자칫 통제를 잃어 버린다면 사념은 곧바로 나를 집어삼키기 위해 날뛰기 시작하겠지.
'쉽지 않군.'
이런 위태로운 상태에서 태초의 고래와 싸워야 한다는 그 사실이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절망만 하고 있을 이유는 없다.
분명 나는 이 싸움의 끝에 왔음을 확신하고 있으니까.
'...이 싸움이 끝나면.'
순간 설계자가 내게 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
이 싸움을 끝내면, 내가 원하는 것을 반드시 들어주겠다던 그 약속.
'내가 원하는 것?'
막연한 질문이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
강해지는 것.
더 큰 힘.
'하지만.'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게 될지도 모를 질문.
이 싸움이 끝난다면 더 이상 힘이 필요 없게 되어 버리겠지.
'...'
문득 맥주 한 잔이 그리워졌다.
차가운 맥주.
'...우습군.'
이런 상황에서 떠오르는 게 고작 맥주라니.
'아니. 어쩌면 지금 내게는 맥주조차 사치일지 모르겠군.'
한 치 앞도 모르는 길을 달려왔고, 이제 그 끝에 서 있다.
여기에서 내가 죽게 될지.
아니면 태초의 고래를 쓰러트리고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을지.
'사실 생각해 보면 내 삶에서 맥주조차도 사치였지.'
언제 한 번 마음 놓고 사람들과 모여 맥주잔을 부딪친 적이 있었던가.
끝없이 몰아치고 나를 다그쳐야만 했던 나의 삶에 그런 여유 따위는 없었지.
'그래. 맥주. 나쁘지 않는 소원일지도 모르겠어.'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그 순간.
"허허얼…. 이제 자네가 나가야 할 때가 된 것 같으이."
노인이 말했다.
그리고 지금, 노인의 시선은 저 하늘 위로 향해 있었다.
깨어지고 부서진 고래의 배 천장 너머로 바깥의 풍경이 비쳐 보이고 있었다.
'…칼제르.'
그 너머에서는 태초의 고래와 맞서고 있는 칼제르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칼제르는 내가 알고 있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조금 더 악마다운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다행이군.'
그래도 칼제르가 태초의 고래를 막아 준 덕분에 아무래도 시간을 벌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저건… 설계자의 힘인가.'
칼제르가 태초의 고래와 맞서는 중간중간 튀어 오르는 금빛의 기운.
왠지 익숙하다 했더니 아무래도 설계자가 칼제르에게 힘을 보태 준 모양이다.
'여기저기 참 바쁘시군.'
하긴.
설계자가 칼제르에게 힘을 보태주지 않았다면 칼제르가 태초의 고래를 막아설 수는 없었겠지.
태초의 고래는 말 그대로 '격'이 다른 존재니까.
그리고 나 역시도 설계자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미 진즉에 태초의 고래에게 먹혀 소화가 되어 버렸을 테고 말이다.
'확실히 놈의 허점을 찌른 계획인 건 분명했다.'
놈도 나를 직접 삼키기는 원치 않았으리라.
그보다는 천천히 나의 존재를 갉아 먹을 계획이었을 테다.
내가 설계자의 힘을 빌려온 걸 모를 리도 없었을 테니까.
'그러면 이제 정말로.'
놈과 마주할 때다.
이미 놈의 속을 갉아 먹을 만큼 갉아 먹었으니.
내가 갉아 먹은 사념들을 이용해서 놈을 씹어 먹을 차례라는 말이다.
'결국 이 힘을 이용할 수밖에 없어.'
사념 말이다.
언제 폭주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롭게 마나하트를 감싸고 있는 이 사념을 완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때였다.
"흘흘…."
노인이 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더니 손바닥을 뻗어 내 가슴 위에 얹었다.
"……?"
"이제야 생각났으이."
그러더니 노인의 손을 따라 사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인은 내 가슴에서 손을 떼었다.
노인의 손을 따라 사념은 마나하트로부터 뻗어 나왔고.
"내가 왜 이렇게 오랜 시간 이곳에서 앉아 있었는지 이제야 생각이 났구먼."
그 순간 노인의 몸이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설계자의 힘과 같은 빛깔이었다.
그러더니.
"드디어 나도 편히 잠을 잘 수 있겠구먼."
그 말과 함께 노인의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찬란한 황금빛을 뿜어내는 노인의 안광이 나에게로 향했고.
그 순간.
콰아아!
내 몸의 사념이 내 몸 밖으로 치솟았다.
콰콰콰콰콰!
맹렬하게 치솟기 시작한 사념은 다시금 내 몸을 휘감으며 용솟음쳤다.
하지만 사념이 제멋대로 날뛰며 폭주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 사념은 온전히 노인의 손짓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으니.
"내가 여기에 왜 오랫동안 그렇게 홀로 앉아 있었는지 드디어 생각이 났다는 말이네. 헐헐…."
노인이 말했다.
그러더니 노인은 양손을 들어 올렸다.
노인의 손을 따라 사념은 춤을 추듯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고.
노인이 양팔을 교차하자 사념 역시 노인의 손을 따라 교차되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네. 지금부터 자네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가 되어 새로운 힘이 되어 줄 걸세."
콰콰콰콰쾅!
사념이 다시 나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사념은 이전의 사념과는 달라졌다.
나에게 깃들어 있던 설계자의 힘과 융합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힘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두 힘은 하나가 되어 자네를 한층 더 위대한 존재로 성장시켜 줄 것이네. 자!"
노인의 기합과 함께 내 몸속의 모든 힘들이 일렁이며 융합되기 시작했다.
어느새 설계자의 힘과 하나가 된 사념의 색이 바뀌기 시작했다.
붉은빛으로부터 천천히 흰 빛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사념은 다시 내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태초의 염을 흡수했습니다!]
[태초의 염이 마나하트를 감싸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것은 이 세상이 시작된 순간으로부터 존재한 힘...!"
마치 나에게 벌어진 현상에 대해서 부연설명을 하는 듯한 노인의 말과 함께.
콰륵! 콰르르륵!
나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태초의 염은 빠른 속도로 마나하트를 두르고 있었다.
고고고고고!
태초의 염은 다시 내 몸 밖으로 내달렸다.
나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빠르게 회전하던 사념의 염이, 순간 멈춰 섰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창조하는 그 힘은 그대의 새로운 힘이 되어 태초의 고래와 맞설 힘을 선물해 줄 것이야!"
번쩍!
빛이 내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능력 '포식자'가 새로운 힘을 일깨웁니다.]
[상태창의 모든 능력이 새롭게 구성됩니다.]
쩌적! 쩌저적!
마나하트에서 균열이 일었다.
하지만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새로운 힘이 솟아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니.
이내.
[능력 '태초의 빛'을 획득했습니다.]
새로운 메시지와 함께, 나의 상태창이 펼쳐졌다.
[상태창]
태초의 빛
'……?'
모든 것이 사라지고 태초의 빛이라는 한 글자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게 무슨….'
"놀라지 말게나.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유일하고 고강한 힘이니까. 헐헐…."
노인이 내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 올렸다.
"잘 보게나."
번쩍!
내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 순간.
콰아아아앙!
빛은 순식간에 고래의 배 천장을 꿰뚫었다.
그리고 저 너머, 어비스 상부의 하늘이 보였다.
"모든 것을 꿰뚫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동시에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일세."
'…….'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조금은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내게 생긴 이 태초의 빛이라는 능력이야말로 내가 가져야만 하는 궁극의 힘이라는 걸.
그리고 지금.
구어어어어어!
태초의 고래가 포효했다.
꿰뚫린 놈의 배 천장에서 사념이 미친 듯이 솟구쳐 올랐다.
"무엇 하는가. 어서 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노인이 내게 말했다.
"그럼 당신은…."
"흘흘…. 내 걱정은 무슨. 나는 이곳에서 나고 이곳에서 사라질 몸. 나는 신경 쓰지 마시게나."
"……."
그러더니 노인은 천천히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노인은 한순간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고, 계속해서 저 먼 곳 어딘가로 움직였으니.
"…감사했습니다."
노인에게 짧게 인사한 나는, 저 위를 바라봤다.
'나가자.'
노인의 말대로.
나는 지금이야말로 내가 저 밖으로 나가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몸을 날렸다.
이 밖으로 나가, 저 고래를 집어삼키기 위해서.
펄럭!
등 뒤로 날개가 펼쳐졌다.
모든 것이 나의 의지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래는 빠르게 내가 만들어 낸 상처를 회복했지만, 그 순간에도 내 몸을 감싸고 있던 태초의 빛은 내가 가는 길을 따라 끝없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재생하길 반복했다.
그 순간에도 격렬하게 몸을 뒤틀고 있는 태초의 고래와.
콰아아앙!
저 밖에서 울려 퍼지는 굉음.
칼제르의 공격이겠지.
그리고 지금 나는.
번쩍!
태초의 고래의 몸 밖으로 벗어났다.
저 멀리에서 베르제르와 헬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뻥긋대고 있을 뿐이었다.
'나중에.'
지금은 대화보단 눈앞에 있는 과제를 처리해야 할 때다.
그 과제란 당연히 태초의 고래다.
내가 놈의 몸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 태초의 고래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야 나를 발견한 칼제르의 눈이 커졌다.
아무래도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렇겠지.
갑작스레 고래의 배 속에서 내가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그리고 다시.
[거어어어어어-!]
태초의 고래가 나를 향해 커다란 입을 벌리고 포효했다.
놈의 입에서 방대한 사념이 뿜어져 나왔다.
놈의 사념은 어비스 상부 전체를 뒤덮을 기세로 뻗어 나왔으나.
휘익-
내가 손을 휘두른 순간.
화아아앗!
내 손을 따라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태초의 빛.
모든 것을 삼키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힘.
[……!]
놈의 사념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꽈아아악!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태초의 고래를 바라보며.
그리고 그 순간.
빠직! 콰직!
태초의 고래의 몸 위로 태초의 빛이 감쌌고.
태초의 고래의 몸 일부를 지워 버렸다.
[크어어어어어어!]
태초의 고래가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