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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창이 달라졌다-272화 (272/277)

272화

"방향이 여기가 맞았던가. 홀홀홀… 혼자 오랜 시간을 멍때리고 앉아있었더니 기억도 방향감각도 흐릿해졌구먼."

노인은 내 앞에서 걸어가며 쉴 새 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니, 가끔 나를 흘끔거리는 걸 봐서는 아마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지금 내게는 저런 말에 하나하나 답해줄 정도의 여유는 없다.

'여유같은 걸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지금 당장 태초의 고래가 무슨 짓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밖에는 아직 설계자들이 건재하게 버티고 있을 테니 말이다.

아마 지금쯤 설계자들은 나의 상황을 알고 있을 테고, 어느 정도는 대응을 해 주겠지.

나도 그 사실을 믿고 있으니 이런 과감한 선택을 했던 것도 맞다.

'그렇다고 여유를 부릴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니까.'

저 노인과 시답지 않은 대화를 하고 있을 시간에 하나라도 더 생각하고 대응 방안을 강구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가 자신의 몸속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아는 이상, 태초의 고래 역시도 절대 가만히 있을 리는 없다.

결국 우리 모두는 한정된 시간을 두고서 겨뤄야 한다는 뜻.

누가 먼저 상대의 핵을 노리느냐.

그것이 이 싸움의 끝을 맺을 수 있는 핵심이겠지.

'하지만… 운이 좋았을지도 모르겠어.'

저 노인을 만난 게 말이다.

조금은 정신없어 보이는 노인인 것도 사실이지만, 저 노인마저 없었으면 정말로 나는 이 안에서 한참을 헤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나와 노인은 또 계속해서 앞으로 한참을 걸어갔고.

꽤 오랫동안 혼자서 이런저런 말을 궁시렁대던 노인의 말을 들어주고 있던 중.

"오오… 그래. 여기야. 바로 이 근처였던 것 같은데 말이지…."

노인이 갑작스레 자리에서 멈춰서서 주변을 두리번대기 시작했다.

"흐으으음… 내가 아주 오래전에 여기에 묻어 둔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노인은 그런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맨바닥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자세를 낮추고 바닥에 대고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기도 했고, 귀를 대고 땅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했다.

"……."

나는 그저 영문도 모른 채 노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더니.

"킁! 킁킁! 그래! 이 냄새야. 이거라고, 이거!"

소리 높여 외치던 노인이 나를 바라봤다.

"뭐 해? 땅 파야지? 설마 이 노인에게 땅을 파게 시킬 생각은 아니겠지? 홀홀홀."

어느새 몸을 일으키고 뒷짐을 지고 미소 짓고 있던 노인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발로 땅을 두드렸다.

"여기라고, 여기. 여기에 자네가 원하는 게 들어 있을 걸세."

"……."

나는 천천히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초감각을 끌어 올렸다.

저 안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기 전, 직접 확인해 볼 생각으로 말이다.

그렇게 초감각을 이용해서 땅속에 있는 것을 확인하려던 그 순간.

파짓!

그 순간 내 마나하트 언저리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큭."

짜릿한 통증과 함께 나는 미간을 좁혔다.

저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건 분명한 모양이다.

문제는 그게 무엇이냐는 건데.

노인은 아직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직접 확인해보는 수밖에.

"홀홀. 의심이 많은 친구로군. 그래. 좋은 자세지."

노인도 딱히 나를 저지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초감각을 통해 땅속에 숨어있는 것을 확인해보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력이 천천히 땅속으로 스며들며 초감각의 감각을 극대화했다.

파짓! 치지직!

이번에도 마나 하트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지만 이 정도 통증은 충분히 감내할 만한 통증이다.

'…구체다.'

초감각이 완전히 땅속으로 파고든 순간, 그 안에 숨어있던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사념으로 이루어진 구체.

크기는 축구공 정도의 크기였으나, 그 안에는 엄청난 양의 사념이 응축되어 있었다.

'사념을 고체로 형상화해 놓은 것인가?'

아마도 그런 모양이다.

무형의 기운을 고체의 형태로 응축시켜 놨다는 건, 대체 얼마나 많은 사념이 응축되어 있다는 말일까.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사념을 굳이 고체의 형태로 뭉쳐 놓은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게 녀석의 핵이라는 뜻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이게 놈이 가진 사념의 근원이라거나.

만약 그렇다면 놈의 숨통을 끊어 낼 열쇠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가. 파괴할 수 있겠나?"

노인이 내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마 짐작 했겠지만, 그 구슬이 바로 괴물 녀석의 힘의 근원이지."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그럼 이것만 파괴하면…."

"음? 무슨 소린가. 고작 그거 하나 파괴한다고 이 괴물을 쓰러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게야? 흘흘흘…."

"……."

젠장.

그럼 그렇지.

어쩐지 너무 일이 쉽게 진행된다고 했다.

"그럼 얼마나 있습니까. 이런 게 말입니다."

"글쎄. 수십 개는 되지 않겠나.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숨겨 놓고서도 어디에 숨겨 놨는지 까먹어 버렸지 무언가. 흘흘…."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더 많은 걸 바라는 건 과욕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노인이 내게 중요한 정보를 준 것도 사실이니까.

'그럼 우선…'

이 안에 있는 구체를 파괴해야겠지.

"그냥 꺼내면 되는 겁니까?"

내 물음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 위로 마나와 렘을 감쌌다.

아무래도 맨손으로 만지기엔 조금 꺼림칙한 면이 없지 않았으니까.

내가 손을 바닥으로 가져다 댄 순간.

치칙! 치지직!

내 손을 튕겨 내려는 듯, 구체가 강한 사념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

결국 내 손을 감싸고 있던 오러는 순식간에 땅을 녹여 버렸고, 저 깊은 곳에 숨어있던 붉은 색 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붉은 빛이 어른거리는 구슬은 한눈에 보더라도 범상치 않아 보였으니.

"최대한 빠르게 박살 내는 게 좋을 거야. 그 녀석은 제 주인 놈만큼이나 탐욕스러우니까."

"…알고 있습니다."

사념.

그 힘이 얼마나 추악하고 탐욕스러운 힘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수없이 맞서왔고, 또 내가 직접 품고 있기도 했다.

심지어 내가 품고 있는 사념에게 잡아 먹힐 뻔한 경험도 있으니.

나는 천천히 구체를 향해 렘과 오러를 움직였다.

그 순간.

카아아아아아!

사념의 구체에서 괴성이 울려 퍼졌다.

캬아아아! 카아아아아!

구체가 격하게 흔들리며 끝없이 괴성이 터져 나왔다.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마냥 오러와 렘의 공격에 몸부림을 치는 구체.

그 모습을 보던 노인이 내게 말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군. 내 생각보다 훌륭한 친구였어. 헐헐헐…."

아직 뭘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어쨌든 내가 잘하고 있다는 말일 테지.

그리고 나는 조금 더 렘의 비중을 키운 채 구체를 향해 쏟아냈고.

콰직!

구체에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피시시식!

균열 틈에서 다시 사념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재빠르게 렘을 이용해 사념을 정화해 냈다.

확실히 구체 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념이 응축되어 있는지,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사념의 양은 거대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 응축되고 응축된 나머지 사념의 농도 역시 지독할 정도로 짙었다.

그렇다고 해서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말했다시피 이미 저 사념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따로 없을 수준으로 이해도가 높아진 상황이니.

사아아앗!

나는 순식간에 사념을 흩어냈고.

콰직!

기어코 구체를 박살 낼 수 있었다.

"…됐군요."

"호오오! 굉장하군. 설마 그리도 간단히 박살 낼 줄이야. 허허헐…."

노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다시, 그가 말했다.

"자, 그럼… 같이 구슬을 찾아볼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것의 정체를 알아낸 이상, 구체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지.

나는 초감각의 탐지 능력을 극대화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이 근처에 열다섯 개 정도 숨어있군.'

남은 구체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

"……!"

그 순간, 태초의 고래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놈…'

강민이 파괴한 구체.

그 구체 하나가 사라진 순간, 태초의 고래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빨라. 내 생각보다 너무 빠르다.'

태초의 고래는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강민이 그렇게 빠르게 구체를 파괴할 수 있었는지를 말이다.

태초의 고래는 알지 못했다.

노인의 정체를 말이다.

그 노인은 바로 설계자가 태초의 고래를 만들기도 전, 태초의 고래의 몸속에 숨겨 놓았던 존재.

인간도, 천사도, 악마도 아니다.

그 노인은 바로 설계자의 일부였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태초의 고래 본인도 알 수 없도록 그 안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태초의 고래는 자신의 몸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의 생각보다 강민의 반격이 거세다는 것밖에는 추측할 수 없었으니.

'그렇다면… 더 빠르게 집어삼켜 주마.'

콰콰콰콰!

태초의 고래가 커다란 입을 벌렸다.

그 순간 주변의 모든 것들이 그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고.

콰득! 콰드득!

태초의 고래는 탐욕스럽게 자신의 입속으로 들어 온 모든 것들을 씹어대기 시작했다.

놀라운 건, 태초의 고래가 빨아들인 것이 남아있던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다.

그 자리엔 완전한 무(無)가 자리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수 km에 달하는 범위를 집어삼킨 태초의 고래가 다시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공간을 유영했다.

태초의 고래가 지나간 자리에는 심지어 공간조차도 남아있질 않았다.

그야말로 존체 자체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탐욕의 마수.

그는 조금 더 속도를 높이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는 석탑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데에 성공했다.

강민이 어비스의 정상으로 향했던 그 석탑을 말이다.

그 말은 즉.

석탑을 집어삼킨 고래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비스의 상부로 말이다.

'…….'

이제 막 어비스 상부에 모습을 드러낸 태초의 고래가 눈알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 저 먼 곳에 모여 있는 한 무리의 생명체가 보였다.

검은 날개, 흰 날개를 달고 있는 낯선 생명체.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 앉아있는 작은 동물 비스무리한 생명체까지.

'잘도… 소꿉놀이를 하고 있군.'

하지만 그 즐거움도 오래 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며 태초의 고래가 몸을 움직였다.

고고고고고-!

거대한 몸이 하늘 위로 올라가며 어비스 상부에서 어비스를 밝히고 있던 광체를 완전히 가렸다.

그와 함께 어비스 상부 전체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으니.

"…뭐… 뭐야!"

"괴, 괴물이다! 괴물이 나타났다아아아!"

영문도 모를 거대 괴수의 출현에 어비스 상부에 있던 마족과 천족, 그리고 묘족들은 크게 당황 할 수밖에 없었다.

'의미 없는 짓.'

쩌어어어억-!

태초의 고래가 커다란 입을 벌렸고.

동시에 드넓은 대지와 그 안에 있던 천족, 마족, 묘족들이 태초의 고래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집어삼켜 주마. 그리고 네놈의 숨통을 끊어 주리라.'

콰득! 콰드드득!

태초의 고래가 입속에 들어 온 것들을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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