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드디어.'
변하는 놈을 바라보며 내 몸이 굳기 시작했다.
두려웠고, 긴장됐다.
이 순간에도 점점 고래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놈을 보며 내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꿀꺽
침이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저 녀석이 바로, 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 될 수 있을 녀석이지 않은가.
그리고 어느새, 완전한 고래의 형상으로 변해 버린 놈은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거대했다.
아니, 거대하다는 말로도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저 눈.'
내가 그동안 몇 번 마주했던 그 눈이 껌뻑이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전신에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공포스러운 눈알.
그어어어어-
고래가 허공을 유영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우주를 헤엄치는 고래.
자신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포식자.
그 괴물이 지금 저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 보며 헤엄치고 있었으니.
쩌어어어-
놈이 입을 벌렸다.
쩍 벌린 놈의 입속으로 공간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같은 수에 당할 정도로 멍청한 내가 아니다.
쿠쿠쿠쿠쿵!
놈이 흡수하는 공간에 저항하여 나 역시 설계자의 힘으로 새로운 공간을 끝없이 만들어냈다.
놈이 빨아들이는 속도만큼 새롭게 창조되는 공간은 나와 놈 사이의 거리를 쉽사리 좁히지 않았으니.
'정말이지 끔찍하군.'
감히 한낱 인간으로서 마주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그 말이 정확하다.
차원이 다른 존재다.
저 녀석은 말이다.
콰아아앙!
그때 태초의 고래가 지느러미를 펄럭였고.
놈의 지느러미가 움직이는 순간에 드넓은 공간이 크게 일렁였다.
콰콰콰콰쾅!
사방에서 굉음과 함께 출렁이는 공간은 나를 압박했다.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나의 정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지금 저 녀석은 나의 육체를 공격하기보단, 내 내면을 끝없이 압박하고 있는 중이었다.
뇌가 터져 버릴 정도로 강한 충격이 내 몸을 두드렸지만, 설계자가 내게 건네 준 힘은 태초의 고래의 공격에서 나를 지켜내기 위해 몸부림 쳤다.
'이것 참.'
저 녀석도 저 녀석이지만, 설계자의 이 힘은 말 그대로 '전능'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만약 이 힘이 없었다면 나는 도무지 태초의 고래에게 저항도 할 수 없었을 테지.
'하지만... 이 힘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
설계자의 힘은 어디까지나 창조하는 힘.
설계자의 힘으로는 결국 저 고래를 쓰러트릴 수 없다.
그리고 분명 저 녀석을 집어삼킬 더 커다란 '입'이 바로 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입.
그리고 내가 가진 능력의 이름, 포식자.
결국 놈을 쓰러트리는 건, 설계자의 힘이 아닌 나의 능력이라는 뜻일 테다.
'하지만 어떻게.'
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녀석을 집어삼킨다는 말인가.
그게 가능한 일이기는 한 걸까?
그리고 다시, 놈의 지느러미가 움직였고.
콰콰콰콰쾅!
이 거대한 공간이 다시 한번 출렁였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돼.'
지금 당장 뾰족한 수가 생각나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해서든 놈에게 저항을 해야 한다.
내가 잠시나마 손에 넣은 설계자의 힘을 통해 놈의 포식에 저항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임시방편일 뿐.
내가 가지고 있는 이 힘이 온전한 힘도 아닐 테고, 애초에 저 녀석이 가진 포식의 힘에 대응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녀석이 가진 힘은 태초의 고래가 가진 본연의 힘일 테니까.
반쪽짜리와 완전한 것은 결코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저 괴물 같은 녀석을….'
동시에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녀석에게 내가 대응 할 수 있을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내가 가진 포식이라는 능력을 되짚어 봐도 마찬가지다.
내 포식은 어디까지나 상대의 능력 혹은 스탯을 포식하는 능력.
실제로 어떤 물리적인 존재를 집어삼키는 능력이 아닌 것을.
내가 대체 어떻게 저 괴물을 삼킨다는 말인가.
저 녀석이 나를 집어삼킨다면 모를까.
그때.
'…녀석이 나를 삼킨다?'
혹시.
만약 그 방법이라면 가능할 수 있을까?
문득… 어쩌면 그것이 내가 지금 할 수 있을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상한 지점이 있다.
'놈은 나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있지 않아.'
말 그대로다.
놈이 집어 삼키는 건 주변의 지형지물일 뿐, 나를 직접적으로 삼키려는 액션은 취하지 않는다.
말했듯, 놈은 나의 육체가 아닌 정신을 압박하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내가 녀석에게 잡아 먹힌 상태로도 살아 있을 수 있겠냐는 것.
단지 육체의 죽음을 걱정하는 수준을 한참 뛰어넘어 나라는 존재가 존재로서 유지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다.
'놈은 하나의 세계를 집어삼키는 괴물.'
그 안에서 나라는 일개 인간이 과연 버텨낼 수 있을지가 문제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니.
'해보자.'
어느 정도 리스크를 짊어지긴 해야 할 테지만,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역시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설계자의 힘 덕분.
이미 놈의 힘에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은 증명되었으니.
내 계획을 실행하는 데에도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그럼….'
가자.
나는 몸을 날렸다.
그리고 나는 순식간에 놈의 몸 속에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나는 놈이 동요하고 있음을 느꼈다.
아마 놈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인 듯 했다.
***
'젠장.'
그 순간, 태초의 고래는 눈을 부릅떴다.
'기어코 그렇게 하겠다는 건가.'
그 역시 강민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그런다고 해서 네가 어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강민이 설계자의 힘을 믿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지금 강민의 선택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렵게 됐군.'
말 그대로 강민의 선택은 태초의 고래도 피하고 싶었던 결과이기도 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자신의 배 속에서 소화시켜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지금의 강민은 자신조차도 쉽게 소화해 버릴 수 없는 존재다.
태초의 고래로서도 강민을 집어삼킬 생각은 없었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 강민의 존재를 흡수하며 완전히 지워 버렸어야 했을 텐데.
강민이 자신의 몸속에 뛰어든 이상 태초의 고래는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야만 한다.
태초의 고래의 목적이란 당연히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파괴하는 것.
'아무리 너라고 해도 네가 살던 세상이 사라지면 존재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태초의 고래가 커다란 지느러미를 펄럭였다.
다시 그가 있던 공간이 일렁이고 이곳저곳에서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태초의 고래는 강민의 선택을 조롱할 수밖에 없었다.
'감히 내 속에서 나를 공격하겠다고? 어림도 없는 선택이지.'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강민은 상상도 할 수 없으리라.
강민이 무엇을 생각했던, 그 무엇보다 끔찍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어리석은 녀석.'
그렇게 읊조린 태초의 고래가 지느러미를 펄럭였다.
그 순간.
콰콰콰콰쾅!
태초의 고래가 유영하던 공간이 깨어지고 그가 어비스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시작이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세상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리라.'
***
'…….'
놈의 배 속에 들어오고 나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한 남자였다.
백발의 흰 수염을 한 노인이었다.
"……."
그 남자는 무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여기에 왜 사람이 있어?"
그러더니 갑작스레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본다.
다시 주변을 살피고, 다시 나를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으음… 그러니까…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건…."
다시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저 남자가 누구인지도, 왜 여기에 저렇게 가만히 앉아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고.
저 남자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 두 가지는, 여기가 바로 놈의 배 속이라는 것과.
저 남자라면 무언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니까… 혹시… 너는 그 미친 고래의 배 속으로 뛰어든 게냐."
남자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허허허허…허허하하하하!"
내 대답에 노인이 귀청이 떨어져라 웃음을 터트렸다.
"미쳤어. 미친 게로군! 아니지, 아니야. 스스로 배 속에 뛰어들었다는 건… 그 녀석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걸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를 붙잡고 있다는 건 분명… 호오…."
혼자 무어라 열심히 떠들던 노인이 몸을 일으키고 뒷짐을 진 채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호오… 그렇군. 흥미로워. 몹시 흥미롭구나.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니로군. 인간으로서는 닿을 수 없는 선에 발을 디뎌 버렸어. 에잉, 쯧쯧."
갑작스레 혀를 차는 노인을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문을 모르겠군.'
저 노인은 인간이 아니다.
아니, 저 노인을 보며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겠지.
그럼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걸 넘어서 대체 어떻게 이런 곳에 혼자 앉아있을 수 있었던 것일지.
"대체 누구십니까. 왜 여기에 홀로 앉아 계신 것인지, 여기가 대체 어디인지…."
"흠흠. 궁금한 것도 많군. 하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았어. 운이 나빴던 게지. 떨어져도 하필 이곳으로 떨어지다니 말이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곳은 감옥일세. 들어 올 수는 있어도 다시 나갈 수는 없는 곳이야. 아마 자네가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건, 그 괴물 녀석이 집어삼킨 것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는 것일 텐데. 나 혼자 여지껏 여기에 처박혀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는가. 홀홀홀…."
노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설계자들이 분명 고래의 배 속에 있는 것들을 꺼내어 탑을 만들었다고 했는데도 이 노인만은 고래 배 속에 남아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에잉. 쯧. 내가 얼마나 여기에 있었는지 셀 수도 없군. 나도 이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별짓을 다 해 봤는데… 안 돼. 글렀어. 자네는 여기에서 나랑 같이 늙어 가는 수밖에 없겠군… 홀홀홀…."
"……."
그때.
"아, 아아아… 으허허허! 그렇지! 그래. 이제야 생각났네. 이 정신 좀 보게!"
노인이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거야 참. 너무 오랜 시간 동안 혼자 있었더니 건망증이 다시 도진 모양일세. 내가 왜 여기 있었는지 이제야 생각이 난 걸 보면 말이야. 홀홀홀…."
노인은 특유의 웃음과 함께 서글서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따라와 보시게. 아주 오래전 그 여자가 나를 괜히 이 감옥 속에 넣어 둔 게 아니었어. 이제야 생각나다니, 허 참. 내가 언제 이리 늙어 버린 것인지."
"……."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듣고 있는 내가 다 혼란스러울 지경이었지만.
'그 여자….'
그 한 단어만큼은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분명 그 여자라는 건 설계자를 의미하는 것일 테고.
설계자가 이 노인을 가둬 놓았다는 건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을 위해 태초의 고래의 속에 어떤 열쇠를 숨겨 놨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뭐 해! 어서 따라 와. 또 까먹기 전에!"
노인은 뒷짐을 지고 걸어다가다 말고 나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노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넓은 공간을 천천히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