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사념의 고래를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사념의 고래는 허공을 헤엄치듯 엄청난 기세로 나를 향해 날아들었고.
구아아아-!
사념의 고래가 거대한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단숨에 나를 집어삼키겠다는 기세로 입을 벌린 사념의 고래의 입속으로 공간 전체가 빨려 들어갔다.
블랙홀.
블랙홀이라는 것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콰콰콰콰콰!
쩍 벌린 사념의 고래의 입속으로 주변의 모든 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 몸 역시 마찬가지다.
엄청난 풍압과 함께 내 몸이 천천히 놈의 입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으니.
'당해줄 것 같으냐.'
나는 설계자의 힘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쩌저적!
땅 아래에서부터 공간이 뒤틀리며 무언가가 솟구쳐 올랐다.
공간 자체를 움직여 공간을 가시의 형태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파직! 콰직!
가시처럼 솟구친 공간이 사념의 고래의 몸을 관통했다.
카아아아!
사념의 고래가 괴성을 내지르며 포효했다.
놈의 입안에서 강력한 사념이 터져 나오며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역시 나를 위협 할 순 없다.
휘이이익!
나는 찰나의 순간에 렘과 오러를 끌어 올리며 사념의 고래의 입안에서 터져 나온 사념을 휩쓸어냈고.
채채채챙!
다시 허공에서 수백여 개의 검을 만들어 냈다.
허공에 떠오른 검은 사념의 고래를 향해 날아들었다.
사념으로 만들어진 검이 사념으로 이루어진 고래를 향해 날아가 놈의 몸 곳곳에 처박혔다.
파직! 콰직!
검이 처박힌 곳에서 피 대신 사념이 분수처럼 솟구쳐 나오기 시작했다.
사념의 고래는 고통스러운지 몸을 격렬하게 비틀었으니.
휘익!
나는 놈을 향해 검을 움직였다.
위에서 아래로.
검은 놈에게 닿지도 않았지만.
콰콰콰콰쾅!
내 검은 공간을 반으로 잘라내며 사념의 고래마저 완전히 베어 버렸다.
내 일격으로 사념의 고래의 몸이 반으로 잘린 채 천천히 고꾸라지기 시작했고.
이내.
사아아앗-
사념의 고래의 몸이 먼지처럼 흩날리며 모습을 감추었다.
"어때. 이 정도면 서로에 대한 파악은 충분한 것 같은데."
나는 태초의 고래를 향해 말했다.
그는 나를 보며 괴상한 표정을 지은 채로 웃음을 터르렸다.
"으하하하… 흐흐흐하하하하하!"
그 이후로 이어진 말은 없었다.
문답무용.
나는 놈을 향해 달렸고, 놈은 나를 향해 달렸다.
놈의 손 위에서 사념이 맹렬하게 솟구쳤다.
이전에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짙은 사념이라는, 더 이상은 말 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수식어를 다시 뱉어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저 녀석이야말로 사념의 근원이자 사념 그 자체일 테니까.
번쩍!
놈의 주먹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콰아아아앙!
"커헉!"
내 몸 위로 엄청난 무게가 쏟아져 내렸다.
내가 서 있던 자리가 커다란 주먹 모양으로 깊게 패어 있었고, 그 주변의 땅이 완전히 파괴된 채 파편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고작 인간의 몸으로 나의 공격을 버텨내다니!"
놈이 소리쳤고.
다시 한번.
번쩍!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번에도 역시 엄청난 무게가 내 전신을 짓눌렀고.
콰콰콰쾅!
굉음과 함께 사방에서 거센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이 일어난 자리에는 여지없이 조금 전과 같은 커다란 주먹 형태의 구멍이 패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건, 절묘하게 내가 서 있는 곳을 빗겨나 있었다는 점이다.
고의라는 뜻이다.
놈은 고의로 내가 있는 곳을 빗겨난 채로 공격을 퍼부은 게 분명했다.
'나를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건가.'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오히려 놈이 나를 우습게 보고 있다는 건 나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이때 공격해야 한다.'
내가 놈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며 검을 움직이려던 그때.
쩌어어엉-!
"……?!"
내 몸이 멈췄다.
그리고.
"내가 너를 우습게 보고 있다고 생각했나?"
놈이 말했다.
"……!"
"그럴 리가. 나는 너를 우습게 보고 있지 않아. 너는 내 적이다. 내가 죽여야 할 나의 원수이다. 그런데 내가 너를 우습게 볼 리가 없잖아?"
그와 함께.
콰아아아앙!
내 위에서 무언가가 나를 짓눌렀다.
거대한 손바닥이었다.
나는 놈의 공격을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빠득! 빠직!
내 다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쿠우우웅!
내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크아아아아!"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서 괴성을 내질렀다.
장기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근육과 관절이 짓눌려서 완전히 망가져 버린 것만 같다.
"죽어어어어어어!"
놈은 그런 나를 향해 소리를 내지르며 더 큰 사념을 꺼내 올렸다.
거대한 손바닥은 더 강하게 나를 짓눌렀다.
이대로 가다간 내 몸이 정말로 터져 버릴지도 모를 정도로 강한 압력이었다.
"으아아아악!"
나는 다시 괴성을 내질렀고.
"크하하하하! 벌레! 벌레는 죽어야지! 벌레는 짓밟아 죽이는 게 너희 인간들이 하는 짓 아니더냐! 으으하하하하!"
광기에 물든 웃음이 내 귀를 두드렸다.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버텨야 한다.
밀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여기에서 죽는다.
결코 그럴 수는 없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은 내가 보유한 능력들의 힘으로 내 몸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고.
말도 안 되는 회복 능력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몸이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나 갈 수 있으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
고오오오!
오러를 꺼내 올렸다.
오러를 이용해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오러는 나를 짓누르는 강력한 압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이이이일!"
이어지는 놈의 고성과 함께 압력은 더 강하게 나를 짓눌렀다.
다시 렘을 끌어 올려 내 몸을 보호했고, 렘이 내 몸을 감싸기 시작하며 나를 짓누르던 사념에 강하게 저항하며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도 놈의 공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런 식으로는 이 말도 안 되는 공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리라.
'놈을 공격해야 한다.'
나를 공격하는 주체를 공격하는 게 이곳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지배자의 권능과 홉고블린의 외침.'
소환체를 소환하는 두 개의 능력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평범하게 소환체와 홉 고블린을 소환할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저 두 개의 능력에 렘과 오러의 기운을 더했다.
원래의 나였으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설계자의 능력을 빌려 온 덕에 소환체를 렘과 오러로 바꿔치기하는 게 가능해 진 덕이었다.
그와 함께.
콰콰콰콰!
이곳저곳에서 강렬한 렘과 오러의 기운이 느껴졌고.
내 시야에 얼핏 렘과 오러로 이루어진 스무 마리의 소환체가 비쳐 보였다.
'가라. 놈을 뜯어 삼켜라.'
내 뜻에 따라 소환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눈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초감각을 통해서라면 충분히 소환체들의 움직임을 감지 할 수 있었다.
소환체들은 엄청난 속도로 고래를 향해 달려들었고, 소환체의 움직임에 고래 역시 조금은 당황한 모양이다.
나를 압박하는 손바닥의 압력이 한 층 약해졌고, 나는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캬캬캬캬캬!
소환체들은 순식간에 고래에게 접근했다.
고래는 소환체들을 물리치기 위해 사념을 터트려냈다.
하지만.
콰콰쾅!
소환체들은 고래의 사념을 온몸으로 받아내고서도 멈추지 않고 태초의 고래의 몸에 달라붙었다.
"이이이익! 제기랄! 어디서 잔꾀를!"
쾅! 쾅! 쾅!
태초의 고래의 몸에서부터 사념이 사정없이 터져 나오며 소환체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소환체들 역시 끈질겼다.
애초에 의지나 감정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렘과 오러로 만들어진 덕에 사념에 큰 저항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태초의 고래도 쉽사리 녀석들을 떼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조금 더!'
나는 오러와 렘을 소환체들을 향해 더 크게 불어 넣었다.
사념에 찢겨나갔던 소환체들의 몸이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넘어서서 녀석들의 덩치가 이전에 비해 1.2배로 거대해졌다.
이것 역시 태초의 고래의 정신이 흩어지며 나를 향한 압박이 줄어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소환체들이 고래를 쓰러트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다시 몸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라면 충분하다.
캬아아아아아!
그때 내 귀를 두드리는 소환체들의 울음과 함께.
"크아아악! 제기라아아아알!"
태초의 고래의 괴성이 들려왔다.
그와 함께.
파앗!
나를 짓누르던 압박이 완전히 사라졌고.
"크하아아악!"
나는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그와 동시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여유를 부리고 있을 틈은 없다.
나는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빠르게 놈의 사정권에서 벗어났다.
"허억… 허억…."
간신히 숨을 고르며 몸 상태를 확인했다.
뒤틀린 뼈와 관절들은 어느새 제 자리를 회복했다.
그 외에 부상당했던 부분들 역시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으니.
'이번엔 내 차례다.'
아직도 태초의 고래의 몸에 달라붙어 놈을 괴롭히고 있는 소환체들을 향해 이번엔 설계자의 힘을 부여했다.
파아아앗!
스무 마리의 소환체들의 몸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스무 개의 소환체들이 하나로 뭉쳤다.
고작 1m 초반대밖에 되지 않았던 스무 마리의 소환체들은 하나로 뭉치며 태초의 고래와 같은 눈높이를 가진 성인 남성의 형태로 변했다.
"…뭐, 뭐…."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성인 남성을 보며 태초의 고래가 침성을 터트렸다.
내가 지금 만들어 낸 건, 바로 태초의 고래였다.
사념이 아닌 렘과 오러로 이루어진 태초의 고래.
"이런 개자식이이이이이!"
놈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놈은 아마 방금 내가 만들어 낸 소환체를 보며 커다란 모욕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을 테지.
보란듯이 자신과 똑같이 생긴 소환체를, 그것도 렘과 오러로 만들어 냈으니까.
물론 내가 의도했던 바였으니.
'가라. 목덜미를 물어뜯어 버려라.'
내가 그렇게 속으로 읊조린 순간.
캬아아아아악!
태초의 고래의 형상을 한 소환체가 입을 쩌억 벌린 채 태초의 고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개자식이이이이이!"
콰직!
욕지거리를 내뱉는 놈의 목덜미를 크게 물어 뜯은 소환체는.
콰아아앙!
그 순간 폭발해 버렸다.
태초의 고래가 소환체를 없애 버린 것이다.
태초의 고래의 목덜미에서는 작은 상처와 함께 사념이 조금 흘러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나도 소환체가 태초의 고래에게 치명상을 입히리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놈의 흥분을 끌어 올리기 위한 짓이었을 뿐.
"개자식… 개자식이… 개자식이이이…."
그리고 그 자리에는 나를 노려보며 씩씩거리고 있는 태초의 고래가 서 있었다.
"네놈도 나를 골려 줬으니 나도 보답해 준 것뿐인데. 내 선물이 조금 모자랐나?"
하지만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고고고고고-!
놈의 몸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쩌저적!
놈이 입고 있던 옷이 찢겨져 나가고, 놈의 몸이 빠르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어어어어어…!]
놈의 몸이 고래의 형상으로 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