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순식간에 끝낸다.'
남아있는 건, 이제 스물.
저 스물 역시 순식간에 끝내 버려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놈들이 또 어떤 짓을 하게 될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놈들은 실시간으로 더 강해지고 있는 중이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이 공간을 메우고 있는 사념도, 놈들의 몸을 두르고 있는 사념도 급속도로 짙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덕에 내가 흡수하는 사념의 양도 급속도로 늘어가고 있기는 하다만….'
무작정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니다.
놈들을 두르고 있는 사념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놈들은 더 강해졌다.
더 이상 렘과 오러의 막으로도 놈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건 역부족이 되어 버릴 정도다.
놈들의 공격을 벌써 몇 번 허용해 버린 탓에 내 입가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스무 마리가 사방에서 공격하는 탓에 완전한 사각지대로 피해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고.
'하지만.'
콰아아앙!
그 틈을 노려 렘과 오러를 흘려보내 놈들을 공격하는 것에도 차차 익숙해 지고 있는 참이었다.
순식간에 다섯 마리를 제거한 나는 다시 검을 움직였다.
콰콰콰콰쾅!
검기가 놈들을 휩쓸었고, 다시 셋을 지워 버렸다.
남은 건 이제 대략 열 남짓.
한 번에 쓸어 버릴 생각이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 저 위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한시라도 빨리 어비스의 정상에 올라가기 위해선, 여기에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콱!
나는 바닥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검을 통해 내가 가진 오러를 쏟아 넣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
폭포수와 같이 검을 향해 쏟아지는 오러와.
쩌어어엉!
남은 열 마리가 나를 향해 입을 벌린 채 자신들의 사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버텨야 한다.'
검을 통해 오러를 부어 넣음과 동시에 오러와 렘이 섞인 막을 펼쳐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쾅! 쾅! 쾅! 쾅!
신전 내부 곳곳에서 오러의 분수가 터져 나왔다.
검을 통해 신전 내부를 향해 오러를 분사해 낸 것이다.
콰콰콰쾅!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오러와 함께 신전 전체가 크게 흔들렸고.
그 순간.
콰아아앙!
나를 향해 쏟아지는 사념의 폭풍들.
순식간에 과도한 오러를 토해내고, 동시에 놈들의 공격이 내게로 쏟아진 나머지 심장이 찢어질 듯이 아파왔다.
하지만.
캬아아아아악!
키에에에엑!
내 공격 역시 놈들을 한순간에 집어삼켰다.
오러는 신전을 가득 메웠다.
그와 함께 뒤섞인 렘은 이 신전을 채우고 있던 사념을 순식간에 집어삼키며 정화하기 시작했으니.
카아아아악!
캬아아아아아!
렘과 오러의 폭포 속에서 결국 남은 열 마리의 석상들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커헉!"
놈들이 사라지고 난 뒤, 나는 가슴 속에서 끔찍한 통증을 느끼며 검은 피를 토해냈다.
그리고 신전을 가득 메운 렘은 사념을 정화하며 막대한 양의 사념을 내 몸속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젠장.'
순식간에 가슴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작은 통증은 순식간에 검으로 심장을 후벼내는 듯한 통증으로 이어졌다.
사념이 쏟아져 들어오는 속도를 통제하려고 했으나 불가능했다.
신전을 메우고 있는 사념의 농도가 너무 짙었고, 동시에 내가 뿌려 놓은 렘도 너무 짙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사념을 흡수했습니다!]
[사념의 농도가 과열되었습니다!]
[사념을 빠르게 정화합니다!]
눈앞에서 이런 경고 메시지가 수십 번도 넘게 나타났다가 사라질 무렵.
화아앗!
순간 내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미안… 조금 늦었지.]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계자의 목소리였다.
번쩍!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저쪽 먼 곳에서 빛과 함께 신형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
여기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오랜…만이야."
설계자였다.
***
"…결국…."
"할 말이 없어. 하지만 내 모든 것을 걸고 약속할게. 이 모든 게 끝나는 순간 나는 너를 위해 네가 원하는 것을 반드시 이루어 줄 거야."
나는 방금 모든 것에 대한 비밀을 설계자로부터 전해 들었다.
내가 그동안 수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던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이가 없었다.
결국 이 양반의 놀음에 내가 놀아났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까.
나의 절망스러웠던 과거도.
그리고 나의 죽음도.
또 내가 죽이고 쓰러트렸던 그 모든 게 이 한 존재의 과오로 인한 것이었다는 말을… 쉽사리 받아 들일 수 없었다.
"그러면…."
나는 설계자를 바라봤다.
"정말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겁니까?"
내 물음에 설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지. 내 모든 걸 걸고."
"좋습니다."
그래.
여기까지 온 건 나의 선택이기도 했다.
원했다면 언제라도 안락한 삶을 누릴 수도 있었을 테지만.
이 길은 결국 내가 택한 길이니까.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내가 가진 힘을 너에게 넘겨줄 거야."
"……."
그녀가 가진 힘이라니.
그게 무엇일지는 나도 궁금했다.
"눈을 감아."
설계자의 말에 따라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 가슴 위로 그녀의 손길이 느껴졌다.
"이 힘은 네가 그 아이를 쓰러트리기 위한 열쇠가 될 거야.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 아이는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니까."
그녀의 말과 함께 내 가슴 언저리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힘이 너를 그 아이로부터 지켜 줄 거야. 그 아이의 탐욕이 너를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설계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내가 만든 입.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괴물이지."
이미 나도 알고 있는 이야기다.
"쉽지 않겠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 힘이 너를 지켜 줄 거야. 분명히 너라면 해낼 수 있겠지."
그 말과 함께 설계자의 손이 내 몸에서 떼어졌다.
그리고 내가 눈을 떴을 땐.
"……."
설계자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몸에서는 새로운 힘이 솟구쳤다.
렘도, 오러도, 사념도 아닌 또 다른 에너지.
이것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어떤 메시지가 떠오른 것도 아니었고 나 역시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힘이었으니까.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설계자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이건... 굉장한 힘이야.'
설계자의 힘이 내 속으로 들어 온 순간, 나는 내가 마치 초월적인 존재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휘익-
내가 허공에 대고 손을 저은 그 순간 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던 사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던 사념은 곧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뭉쳐졌다.
검의 형상으로 변화한 사념은 다시 허공에서 내가 원하는 그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기어검술이라고 했던가.
어린 시절 무협지에서 봤던 그 기술처럼 사념으로 된 검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물론 내가 고작 이런 현상에 놀라고 있는 건 아니다.
지금도 마음만 먹는다면 검을 움직이는 것 따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다만… 사념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됐다는 건 큰 소득이지.'
그 순간에도 사념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형상화되며 내 주변을 감쌌다.
검, 창, 도끼.
그리고 내 몸을 감싸는 철벽이 되었다가, 가시가 되기도 했다.
그게 끝이 아니다.
끼기긱-
다시금 내 의지에 따라 공간이 뒤틀렸다.
위와 아래가 뒤바뀌기도 했으며, 내가 내딛는 걸음을 따라 새로운 풍경이 그려지기도 했다.
창조.
내 의지에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 내는 힘.
'믿을 수 없군.'
이게 바로 설계자의 권능이라는 뜻일지.
그때였다.
[남용하지는 마. 그 힘을 너에게 빌려준 건, 어디까지나 그 아이에게 대응할 힘을 넘겨주기 위해서니까.]
염려가 느껴지는 설계자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럴 리가.'
이런 힘이 생겼다고 신이 나 멋대로 휘두를 정도로 자제력이 없지는 않다.
지금은 다만 새로운 힘을 테스트해 보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어쨌거나 든든하다는 것은 숨길 수 없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녀석과 끝을 맺어야 할 때가 도래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으니.
'저기인가.'
나는 강한 빛이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꽉 닫힌 문틈 새에서는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빛이 흘러나왔다.
'이 너머에 그 녀석이 있는 건가.'
나는 문 손잡이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때.
[겁도 없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의 목소리였다.
***
끼이이익-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한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거대한 공간을 향해 걸어 들어오고 있는 남자의 표정은 결연했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의 얼굴에는 진한 분노가 어려 있었다.
당장에라도 저리 뻔뻔히 자신의 공간을 침범한 인간을 씹어 삼켜 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리만큼 격한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고고고고-!
공간으로 걸어 들어오는 남자를 바라보는 한 남자의 몸 위로 붉은 기운이 폭풍처럼 솟구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고요한 표정으로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그와 함께 방으로 걸어오던 남자의 몸 주변으로 푸르고 붉은 기운들이 소용돌이치며 순식간에 수백 개의 검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종류도, 형태도 다른 수백여 개의 검들이 남자의 주변을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노오오오옴!"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자가 괴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반대편의 남자는 역시나 차분한 얼굴을 한 채로 그저 손을 뻗어 올렸다.
팟!
남자의 손바닥이 완전히 펼쳐진 그 순간.
채채채챙!
허공을 회전하던 검들이 그 자리에 멈춰섰고, 검의 끝을 조준하기 시작했다.
한 곳에 서서 괴성을 내지르고 있는 그 남자를 향해서였다.
"받아라."
남자가 말했다.
동시에 수백여 개의 검은 남자를 향해 쏟아졌다.
콰콰콰콰콰!
피할 틈도 없을 만큼 빼곡히 허공을 메우고 있던 검들이 일제히 쏟아졌다.
누군가 그 장면을 봤다면 분명 이 싸움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쩌어어엉-!
반대편의 남자가 손바닥을 펼친 순간, 수백 개의 검은 허공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꽈득-!
남자가 다시 주먹을 움켜쥠과 동시에.
쩌저적!
수백 개의 검이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잔재주를…."
남자가 말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제 막 공간에 몸을 들인 남자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리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군. 역시 네놈을 씹어 삼키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힘이야."
"이런 미친… 자식이이이이…!"
콰아아아앙!
남자.
아니, 태초의 고래를 중심으로 거대한 사념이 용솟음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사념은 순식간의 고래의 형상으로 변모했고, 커다란 눈을 껌뻑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집어삼켜 주마."
태초의 고래의 그 말을 신호로 사념으로 이루어진 고래가 강민을 향해 쏟아져 날아가기 시작했으니.
"그래. 해보아라. 할 수 있다면 말이야."
강민은 입꼬리를 들어 올린 채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사념의 고래를 향해 검을 치켜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