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상태창이 달라졌다-268화 (268/277)

268화

명백한 설계자의 목소리다.

그녀가 갑자기 왜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는 걸까?

지금 어딘가에서 나의 모습을 보고 있는 걸까?

[먼저… 사과를 해야겠구나.]

모습도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 사과라니.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나로 인해 시작되었음을 이제야 너에게 고백한다.]

'……?'

설계자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보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자신으로 인해 이 모든 게 시작되었다니?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해 주마. 지금은… 지금은 나의 과오로 시작된 모든 것을 끝내야 할 테니까. 그 뒤에… 모든 것을 설명하고 나의 죄를 용서 받아야겠지.]

그러더니.

화아앗!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의 근원지는 다른 곳이 아닌, 나의 가슴.

내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석탑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사념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태초의 빛이 사념을 정화합니다!]

[태초의 빛이 사념을 정화합니다!]

[정화된 사념이 전투력을 강화합니다!]

[정화된 사념이 정신을 보호합니다!]

[정화된 사념이 탑의 사념을 밀어냅니다!]

눈앞에 반복적인 메시지가 수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와 같은 현상은 끊이질 않고 반복됐다.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인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나를 잔득 조이고 있던 사념이 사라지고 숨통이 트였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었다.

"허어어억!"

나는 급하게 숨을 토해냈다

어깨가 들썩이고, 다리가 떨려왔다.

[오래 너를 지킬 수 없구나. 그 아이가 나를 향한 분노를 쏟아내고 있으니… 그 분노가 곧 너에게로 향하게 될 것이다.]

"무슨… 말을… 대체 그게 무슨 소립니까!"

답답한 마음에 허공에 대고 소리쳤으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러더니.

[나의 손이 너와 함께하리라.]

처음과 같은 말을 남긴 채로 설계자의 목소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석탑 내부는 처음 봤던 광경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곳에 아무도 없던 게 아니라, 단지 내가 보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였다.

'…초감각으로도 볼 수 없었던 세상.'

나의 모든 감각을 초월한, 모든 것의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라니.

이곳은 마치 신전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듯한 거대한 기둥이 전방을 향해 길게 늘어져 있었고, 폭이 수십 미터나 되어 보이는 복도는 끝도 없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복도 좌우, 기둥 사이로 도열해 있는 석상들은 지금이라도 뛰쳐나올 듯한 역동적인 자세로 높은 곳에 서서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신들이 사는 곳이 이러할까.

내가 살던 물리적인 세계를 완전히 벗어난, 초월적인 공간.

어쩌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 역시 실재하지 않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확답할 수는 없겠지만, 느껴졌다.

존재 너머의 무언가.

살아 있는 인간이 발을 디뎌서는 안 될 공간.

살아 있는 일개의 인간이 발을 디뎠다간, 그 몸이 산산이 찢긴 채 먼지가 되어 흩어져 버릴 그런 공간.

그리고 나는 그 공간에 발을 디뎠다.

원래라면 나라는 존재의 숨길조차 허락하지 않을 공간일 테지만, 내가 이 공간에 들어선 건 설계자의 도움일까?

아니, 어쩌면 누군가의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이 공간을 설계한 그 누군가.

'…….'

그 누군가라 함은….

탑.

그리고 태초의 고래.

'둘 중 무엇이건… 중요치 않다.'

설계자의 도움으로 내가 이곳에 입장한 것이든, 태초의 고래가 나를 불러들인 것이든.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나는 반드시 끝을 보고 말 테니까.

숭고하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 숭고하고 아름다운 장면조차도 오래지 않아 사라질 것이다.

스릉-

검을 뽑아 들었다.

이 낯설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허공을 향해 움직이는 검이 일렁이며 렘과 오러가 뒤섞인 채로 사념을 흩뿌렸다.

타닷! 타다닷!

역시.

이 공간 역시 사념으로 가득 차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무섭지 않다.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더 이상 이 사념 따위에 잡아 먹힌 채 나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으리라.

그 순간.

쩌저적- 쩌저적- 쿠우웅!

석상으로부터 굉음이 터져 나왔다.

[나의 존재를 위하여!]

[나의 존재를 위하여!]

쿵! 쿵!

알 수 없는 소리를 외치며 석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족히 3m는 될 법한 석상들은 저마다 다양한 무기를 꼬나쥐고선 오랜 잠을 끝내고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네놈이!]

[네놈이이이이!]

석상들이 합창하듯 소리쳤다.

'…….'

마치 나를 알고 있는 듯한 저들의 대사.

그렇다면… 저 석탑 역시 탑의 분신이라는 뜻이겠지.

그리고 이 공간을 설계한 것 역시… 놈이라는 뜻일 것이다.

나를 잡아먹기 위한 함정일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더 이상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복잡한 생각은 필요 없다.'

지금껏 달려왔던 목적지가 코앞에 와 있다.

쉴 수 없다.

물러설 수 없다.

이 끝으로 가서 나의 삶을 증명해 내리라.

콰콰콰콰콰!

오러를 뿜어냈다.

그와 함께.

[죽어라아아아아-!]

[죽어라아아아아-!]

석상들이 외쳤다.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검을 움직였다.

가볍게.

그 순간.

콰콰콰콰콰쾅!

수십 개의 기둥과 나를 향해 쏟아지듯 달려오던 석상들이 잘렸다.

정확히 반으로 잘린 석상과 기둥들은, 천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바닥으로 고꾸라진 석상과 기둥들.

하지만, 이내.

끼기기긱-!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던 석상들이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잘려진 부분은 다시 접합되었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석상들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빠득- 빠드득!

석상들의 관절이 움직이며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놈들의 온몸은 붉은빛에 휘감겼다.

역시 사념이다.

사념에 뒤덮인 석상들이 다시 몸을 움직였다.

놈들의 움직임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을 보는 듯 자연스러웠다.

아니, 어쩌면 놈들은 지금 진정으로 생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를 위하여어어어어!]

[아버지의 존재를 위하여어어어어!]

다시 놈들이 허공에 대고 괴성을 내질렀다.

아버지를 위하여?

조금 전과 조금 달라진 대사였다.

하지만 그런 것을 깊게 따질 여유는 없었다.

번쩍!

'…위험하다.'

수십 개도 넘는 석상들의 눈이 일제히 섬광을 내뿜은 그 순간.

나는 다급히 오러와 렘을 운용하여 내 몸을 감싸는 막을 형성했다.

우웅!

둥근 막이 내 몸을 감쌌다.

그리고 내가 막을 형성하기가 바쁘게.

콰콰콰콰콰쾅!

신전 내부에서 거센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은 정확히 나를 겨냥했으나.

다행히도, 그 짧은 찰나에 렘과 오러로 형성한 막을 통해 놈들의 공격을 방어해 낼 수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쉽지 않았겠어.'

막으로 보호를 했음에도, 마나와 렘이 감싸고 있는 심장 어귀가 어릿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녀석들은 이제 조금 전 내가 느꼈던 그대로 완전한 생명체가 된 듯, 신전 내부를 어슬렁거리며 나를 견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숫자는 정확히 서른셋.'

최대한 빠르게 끝내야 한다.

그리고 그때 막, 놈들의 입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눈이 아니라 입이라니.

그야말로 온몸이 놈들의 무기인 모양이었다.

쩌어어억-

입을 커다랗게 벌린 그 순간, 놈들의 입속에서 다시 빛이 번쩍였다.

탓!

발을 굴러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콰콰콰콰쾅!

조금 전 내가 서 있던 그곳으로 놈들의 공격이 쏟아졌다.

거센 연기와 함께 내가 서 있던 곳에는 커다란 구멍이 패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구멍 속에서는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었다.

'정말 끔찍하군.'

벌레처럼 꿈틀대고 있는 건, 사념 그 자체.

사념이 물질로 형상화되어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저 공격에 당했으면 저 사념의 덩어리가 내 몸에 달라붙어 나를 집어삼키려 했겠지.

그리고 지금, 허공에 떠 있는 나를 녀석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동시에 다시금 나를 향해 입을 크게 벌린 녀석들.

'지금.'

나는 놈들의 벌어진 입속을 향해 렘을 흘려보냈다.

그 순간.

카아아아아!

키에에에엑!

놈들이 괴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다시.

탁!

놈들의 몸속을 파고든 렘에 오러를 섞어 폭발을 일으켰다.

콰콰콰쾅!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음과 함께 놈들의 몸뚱이가 찢겨진 채 허공에 나부꼈다.

'대충 열 마리인가.'

지금의 공격으로 놈들의 1/3을 쓸어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놈들을 처치한 순간에 나의 마나 하트 속으로 거대한 사념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사념의 지배자의 능력이 사념을 정화합니다!]

[막대한 양의 사념을 흡수합니다!]

이제 시작이다.

놈들이 가진, 그리고 이 공간을 메우고 있는 모든 사념을 집어삼켜주마.

태초의 고래.

녀석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사념이 필요하다.

***

텅 빈 공간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남자가 공허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저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

남자.

아니, 태초의 고래는 발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와 동시에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존재를 보며 태초의 고래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

아니,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되었던 존재다.

"무슨 낯짝으로… 내 앞으로 오는 겁니까."

"……."

노기에 찬 음성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과는 하지 않을 거야."

태초의 고래를 보며 그녀가 말했다.

"사과를 하지 않겠다고? 그게 지금 당신이 내 앞에서 내뱉을 말인가? 사과를… 사과를 하지 않겠다는 그 말이… 당신이 나한테 할 수 있느냐는 말이냐고!"

태초의 고래가 소리쳤다.

도무지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보였다.

"어떻게… 어떻게 나를 처음 보자마자 내뱉은 말이… 사과를 할 수 없다는… 그 말이냐고… 나는… 당신에게 나는…."

"……."

그런 태초의 고래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 역시도 그리 밝지 않았다.

"그래. 모든 것은 나의 잘못이야. 그러니 너를 없애는 것 역시 결국 나의 손으로 해야 할 테지."

"이이… 이이이이이!"

태초의 고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안다.

그 역시 자신의 손으로 여자의 몸에 털끝 하나 댈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인간이… 나를 쓰러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고작 인간 따위가? 그럴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

"뚫린 입이라면 무슨 말이라도 해보시지. 그런 인간 하나 키워서 나를 없애겠다는 알량한 생각을 했다면… 지금이라도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야. 만약… 만약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꾼다면…."

"가능해."

"……?"

"그 녀석이야말로 나의 모든 것이니까.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괜히 벌였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고작 인간의 몸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담는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하길 바랐어. 그래야 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을 테니까. 그 인간은 반드시… 너를 세상에서 지워 낼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다 이내 설계자가 몸을 돌렸다.

"닥쳐! 닥쳐어어어어! 내가… 내가 너를… 너를 집어삼키고 이 세상을 없애 버릴 것이다! 모두다 집어삼키고 먼지조차 남기지 않을 것이야아아아아!"

설계자는 자신의 등 뒤로 쏟아지는 괴성을 애써 무시하며 앞으로 걸었다.

'나의 모든 과오를 지우고, 세상을 되돌릴 거야. 원래의 모습으로.'

그러기 위해선 한강민, 그가 필요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