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고오오-
고요했다.
석탑 내부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 감각이 사라진 건 아니었으니.
이곳을 말 그대로 텅 빈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게 적절하겠지.
석탑의 내부는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겉으로 봤을 때는 이 안에 몬스터들이 드글거리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다.
사실 내가 경험한 탑을 비교해서 생각해 본다면 그게 당연한 탑의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착각이었다.
이곳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탑이 고요하다고 해서 마음이 놓인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더 마음을 억누르는 게 사실이었다.
'차라리 뭐라도 나와 준다면 속이 시원하겠다만.'
심지어 초감각으로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빈 공간이라니.
시간이 지나자 방향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
위인지 아래인지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나의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
절대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이 탑이 이곳에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 테고, 이 탑은 분명히 어비스의 정상으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탑과 어비스에 의미 없이 존재하는 건 단 하나도 없다.
그리고 어떤 장애물이 버티고 있건 반드시 헤쳐나갈 방법은 존재한다.
'여기에도 분명 마찬가지일 거다. 길은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그 순간, 이곳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게 바로 사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사념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치 제 고향에 도착한 군인이 기뻐하고 있는 듯이.
그와 동시에 나는 이 탑 자체가 거대한 사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리와- 이리와-]
귓가에서 사념이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기다렸어- 기다렸어어-]
나를 기다렸다는 걸까?
[같이- 놀자아아-]
섬뜩하고 음산한 목소리다.
사념으로 이루어진 공간 속에서, 나를 감싸고 있는 사념.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단서는 그것뿐이었다.
그 말은 곧….
'결국 사념과 부딪쳐야 한다는 말인가.'
[나랑 놀자아아-]
그 와중에도 사념의 목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나는 그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사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게 지금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피할 수 없다.
아니, 피하지 않을 것이다.
피하는 건 나의 방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충분히 부딪쳐 주마.
나의 사념을 이용해서, 놈의 사념을 집어삼켜 주리라.
내가 정말 놈을 집어삼킬 수 있는 '입'이라면, 못 할 것은 없으리라.
나를 감싸고 있는 사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사념을 밖으로 흘려보냈다.
그렇게 나와 놀고 싶다면, 놀아 주마.
'자. 날뛰어라.'
나는 내 심장 주변을 감싸고 있던 사념이 내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 순간.
[카아아아아!]
괴성이 들려왔다.
조금 전 내 귓가에 살랑이던 그 목소리가 아닌, 명백한 괴수의 포효!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다.
그 눈동자.
태초의 고래라고 불리던 그 괴수의 목소리다.
지금, 놈은 분노하고 있었다.
나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분노일까.
그리고.
쾅! 콰콰콰쾅!
내 몸속의 사념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당황하지 마라.
이겨내야 한다.
반드시.
'다스려라. 이 사념을 다스려야 한다.'
사념을 다스린다면 분명 나에게 길이 열릴 것이다.
그런데 그때.
번쩍!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빛은….
[겁도 없이… 이곳에 발을 들였구나….]
놈의 눈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온몸이 사념으로 뒤덮였다.
'젠장….'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사념을 떨쳐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수록 사념은 더더욱 강하게 내 몸을 조이기 시작했다.
"커억…."
숨이 막혔다.
사념이 내 목을 조이고 팔과 다리를 묶어냈다.
숨도 쉬어지지 않았고, 팔과 다리조차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사념에 사로잡힌 그 순간.
번쩍!
커다란 태초의 고래의 눈이 다시금 껌뻑였다.
놈은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몸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내 몸뚱이보다 더 거대한 동공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
"…흐음."
어비스의 정상.
거대한 고래가 꿈틀대던 그곳에, 한 남자가 남아있었다.
태초의 고래를 억누르던 설계자들도 모두 사라진 그곳에 그는 홀로 서서 자신의 몸을 내려보았다.
그의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쳐 있지 않았으니.
따악!
손가락을 튕긴 순간, 그의 몸 위로 고급스러운 옷가지가 생겨났다.
"깔끔하군."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는.
"내가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잠에 들었던 모양인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혼자 중얼대던 남자가 허공에 대고 손을 한 번 휘둘렀다.
그러더니 그의 눈앞에 어떤 풍경이 펼쳐졌다.
그 풍경 안에 서 있는 건, 그 남자였다.
"꽤나 열심히 살고 있었군."
풍경 속의 남자의 모습은 빠르게 지나갔다.
어떤 공간에 모습을 나타낸 그는 드넓은 공간을 누비며 사람을 모았고, 그들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 줬다.
그렇게 세력을 형성하며 사람을 모아낸 그는 자신의 세력을 '블러드'라고 명명했다.
"블러드라… 촌스러운 이름인데. 내 작명 센스가 저 정도밖에는 안 됐던 건가."
남자는 피식 웃었다.
그 뒤로도 풍경 속 남자의 분신은 많은 일들을 했고, 분신의 모든 기억을 훑어보며 남자는 자신의 현재 상황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정보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그러던 중.
'…….'
남자의 미간을 좁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저 녀석.'
한강민이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남자는 기분이 불쾌해짐을 느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가 고작 인간 따위를 만나고 기억할 만큼 인간에게 신경을 쓸 리는 없는 존재다.
하지만 화면 속 남자는 분명 낯이 익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장면은 끝없이 이어졌다.
자신의 분신이 쌓아 올린 모든 기억과, 자신이 잠들어 있던 중 사념들이 쌓아 올린 모든 기억들이 폭포처럼 그의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
그때 문득 남자의 입에서 탄식이 흘렀다.
"그래. 그랬구나."
그제야 한강민, 그 남자의 얼굴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를 깨운 게 고작 저딴 인간이었다는 말인가…."
그때 막.
[으아아아아아악!]
화면 속 자신의 분신이 괴성을 내질렀다.
그렇게 분신이 죽었다.
자신의 분신을 죽인 것 역시 한강민이라는 인간이었다.
"하하하… 정말이지 어이가 없구나."
결국 모든 장면을 끝까지 확인한 남자.
아니, 태초의 고래의 눈에 진한 살기가 어렸다.
"그래. 그랬구나. 이제 모든 퍼즐이 맞춰지고 있어."
그리고 그의 시선이 저 먼 곳, 어디론가로 향했다.
"나를 만들어 놓고… 나를 이렇게 버리시겠다는 말이군요."
그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걸렸다.
"이럴 거면… 그때 왜 그런 말을 하셨던 건지."
하지만 그의 물음에 대답이 들려 올 리는 없다.
이미 그녀는 이곳에 없었으니까.
태초의 고래 역시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당신의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이 먼 옛날 내가 속삭였던 그 모든 약속들을 내 버린 건 당신이었으니까."
그의 몸 위로 붉은 힘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가 서 있는 공간이 공명했다.
아아아-
음산한 울음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그의 사념에 공간이 반응이라도 하듯, 남자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당신이 불러들인… 그 인간을… 나의 손으로… 죽여드리지요."
아아아아아-
노래를 부르고 있다.
공간은 남자의 동작에 맞춰, 남자의 사념을 따라 남자를 환영한다는 듯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 그래… 이 모든 것은… 나의 뜻을 위하여… 나의 존재를 위하여…."
그리고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먼 곳에 보이는 커다란 문을 향해서.
그 순간 남자의 눈이 번뜩이며 그의 입이 열렸다.
[겁도 없이… 이곳에 발을 들였구나….]
그리고 남자가 손을 휘둘렀다.
짙은 사념이 흩어졌다.
***
"커허억…!"
순간 내 목을 조이고 있던 사념은 더 강하게 나를 억죄었다.
몸을 버둥거렸지만, 사념은 나를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더 강하게 나를 조여왔다.
그 순간 무력감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지독한 무력감이다.
그동안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었지만, 이 정도로 두려운 감정을 느끼는 건 처음이다.
'젠장….'
녀석은 아직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라니.
내가 과연 그 녀석을 상대 할 수 있을까?
아니, 상대하고 말고를 떠나서 그 녀석 앞에 서 있을 수나 있을까?
모르겠다.
확신할 수 없다.
실제로 녀석의 눈과 마주했을 뿐인데도, 나의 사념이 미쳐 날뛰며 나를 집어삼키려고 하지 않았던가.
'돌아가고 싶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이런 어려운 싸움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탑에서 명가 녀석들을 모조리 쓸어 버린 뒤, 그곳에서 남은 시간들을 여유롭게 보냈다면.
위드 길드, 그리고 몰른과 해츨링.
그들과 함께 그냥 탑에 남았더라면… 이런 감정 따위는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젠장….'
후회가 밀려온다.
파도처럼 몰아치는 후회라는 감정 속에서 나는 동시에 두려움을 느껴야만 했다.
어쩌면 이곳에서 나의 모든 게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녀석을 이기지 못한다면, 그리고 놈에게 완전히 잡아 먹혀 버린다면… 모든 게 끝이라는 말 아닌가.
그러던 순간.
사아아아아-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내 몸을 감쌌다.
[정신… 차려.]
누군가의 목소리.
이건 사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내 뺨을 두드렸다.
사념이다.
분명 사념이 다시 나를 집어삼키기 위해 내 마음속의 욕망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속아서는 안 된다.
약해져서는 안 된다.
반드시 놈을 쓰러트려야 한다.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놈을 집어삼킬 더 큰 입이라는 사실을.
나는 반드시 놈을 쓰러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까득-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검을 꺼내 들었다.
이 길을 밝혀내리라.
이 길을 밝혀내고 놈에게 다가가리라.
검을 움직였다.
위에서 아래로.
검 위로 렘의 기운과 오러가 뒤얽히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사아아앗!
허공에 짙게 베어있던 사념을 렘과 오러가 가로질렀다.
다시 검을 움직였다.
눈을 감고 있어 어떤 장면이 펼쳐지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이곳에 있는 짙은 사념이 내 검의 움직임을 피하고 있다는 것.
적어도 놈의 사념이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는 것.
검을 움직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걷는 방향이 곧 나의 길이 되리라.
사아아앗- 사아아아앗!
그 순간, 바람이 몰아쳤다.
내 피부를 스쳐가는 차가운 바람과 함께, 감고 있는 눈 밖으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이제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념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를 피하기 시작하는 사념들을 붙잡아 내 심장으로 끌어모았다.
질 수 없다.
이곳에 있는 사념을 있는 그대로 집어삼켜야만 한다.
도망쳐서는 안 된다.
도망칠 수 없다.
놈이 나를 이런 식으로 공격한다면, 나도 그대로 받아주리라.
콰콰콰콰콰!
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던 진하고 짙은 사념들이 내 몸속으로 빨려들었다.
그제야 나의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사념과 함께 찬 공기가 내 코를 통해 내 폐부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으으으아아아아!"
나는 괴성을 내질렀다.
핏줄이 도드라졌고, 눈앞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성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이 사념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고, 놈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내야 한다.
쾅! 쾅! 콰콰콰콰쾅!
내 몸속에서 또 한 번의 전투가 벌어졌다.
나의 편을 들어 나를 지키기 위한 사념과, 나를 집어삼키기 위한 사념의 싸움.
입에서 피가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온 힘을 다해 나의 이성의 끝을 붙들었다.
여기에서 내가 정신을 놓아 버린다면… 그야말로 끝일 테니까.
그 순간.
[내가 너의 손이 되리라.]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한민국 탑 설계자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