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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창이 달라졌다-266화 (266/277)

266화

"꽤 늘었군."

베르제르의 끝없는 도전과 나의 연전연승 끝에 지쳐 주저앉은 베르제르를 내려보며 내가 말했다.

"휴…."

주저앉아 어깨를 헐떡이던 베르제르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처음 알던 베르제르와는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다.

하지만 그런 베르제르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한결 자신감이 차오른 듯한 표정이었다.

"확실히 느낌이 와. 어떻게 해야 내가 더 강해질 수 있을지 감을 잡은 것 같아."

베르제르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가? 잘 됐군."

그 말은 즉, 이제는 진짜 어비스 상부를 떠날 때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내가 아직 어비스 상부에 남아있는 게 베르제르 때문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생은 둘째 치고서라도 지금 나의 두 번째 삶에서도 어디 한 곳에 정착해 있던 적이 있었던가.

'위드….'

처음에는 그저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던 그들이었지만, 난생처음 누군가에게 정을 줬던 이들.

내가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던 것과는 별개로 나는 그 어떤 곳에도 정착할 수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위해 나는 계속해서 움직여야 했다.

어비스로 진입하는 순간만 해도 그랬다.

나 홀로 어비스에 올라와 어비스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어비스에서 내가 동료 의식을 느꼈던 이들은 없었다고는 해도 어비스에서도 역시 나는 끝없이 떠돌고 떠돌아야 했다.

어비스에서 잠시나마 다시 조우했던 위드 길드와의 만남도 길지는 못했고, 나는 곧바로 이 어비스 상부에 진입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천족과 마족, 그리고 영족.

그들과의 만남은 짧았고 나는 이제 다시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순간 앞에 서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야.'

나라고 해서 감정이 없을 수는 없고, 누군가에게 의지해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니까.

인간이라면 응당 느껴야 할 감정이 바로 그것이니까.

'우습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어진 걸까.

안 된다.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건 세상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나는 올라가야만 한다.

이 탑을.

그리고 이 세계의 꼭대기로.

그런데.

왜?

'…….'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이 탑을 오르려고 했던 걸까.

누군가 내게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다.

강해지기 위해서.

강해지고 싶었으니까.

전생의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되뇌었던 말.

그건 바로 강해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때 분명 나는 그랬다.

강해져서 나를 죽게 만들었던 명가를 쓸어 버리겠다고.

나는 그 목적을 이루어 냈다.

내 손으로 대한민국 탑을 주름잡던 명가를 몰락시켰다.

그리고 나는 강해졌다.

끝없이 강해졌고, 그 누구보다도 강해졌다.

그런데 더 강해지고 싶다고?

'…정말?'

단순히 강해지고 싶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끝없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는 말인가?

'…….'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생각이 길어졌어.'

고개를 저었다.

강해지는 것.

그것만이 나의 삶의 목적이다.

강해지고 강해져야 한다.

행복? 사랑? 우정?

모든 것은 사치다.

그때 내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젠장.'

어쩌면 나는 이 순간을 기다림과 동시에 두려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모든게 끝이 나면….'

나의 모든 게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테니까.

이 탑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없애 버리면 그 뒤에 어떤 세상에 나를 맞이할까.

나의 능력은 남아있을까?

혹시 나의 능력이 사라지게 된다면 나의 존재 가치가 계속해서 남아있을 수 있을까?

'…….'

혼란스럽다.

나의 모든 삶을 강해지기 위한 것 하나에 쏟아부었는데 이 모든 게 사라져 버린다면….

그때의 나는 어떤 존재가 되어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이 모든 걸 놓아 버린다면…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이렇게 애써가며 끝없는 싸움을 이어갈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

그렇지 않은가.

이 어비스 상부에 그냥 눌러앉는다고 해도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이다.

이미 나에게 큰 호감을 보이고 있는 칼제르와 헬라.

천과 마족, 그리고 묘족들까지.

그래.

어쩌면 이곳으로 탑의 플레이어들을 불러서 함께 즐거운 일상을 즐길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이다.

그때.

"이봐!"

"……."

베르제르가 다급히 나를 불렀다.

"너… 왜 그래?"

조금은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베르제르.

"왜… 그러지?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 그게…."

베르제르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네 눈이…."

"눈…?"

"빨갛게 물들었어."

"……!"

그리고 그때, 나는 내 몸속의 사념이 날뛰고 있음을 눈치챘다.

"괜찮은 거야?"

"미치겠군."

"왜 그러는데? 뭐야!"

베르제르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그를 밀어냈다.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념이 다시 고삐를 풀고 나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이 조금 약해진 틈을 타 나의 마음을 꺾어 내려 했던 모양이다.

정말이지… 귀신같이 내 마음을 잠식하려는 시도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정말 괜찮은 거냐고!"

나를 향해 소리치는 베르제르.

"미안하다. 내가 조금 예민해졌어."

베르제르가 아니었다면 사념에 꼼짝없이 당해 버렸겠지.

나는 베르제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괜찮아졌나?"

내 말에, 베르제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이제 안 빨개."

"그래. 걱정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은 했지만… 영 찝찝한 마음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차라리 육체를 공격했다면 속이 시원했겠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몸속에 심어 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마… 그때부터였겠지.'

태초의 고래.

이 탑의 모든 것.

그리고 사념의 주인.

그 녀석과 만난 순간.

그리고 그 녀석의 눈이 나를 노려봤던 그 순간 말이다.

'젠장.'

***

"정말 괜찮겠나."

"…그래."

칼제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게 있었던 일을 베르제르가 칼제르와 헬라에게 이미 보고를 마친 상태였으니, 그들이 나에 대해서 걱정하는 건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베르제르를 탓할 생각은 없다.

나를 위해서 그랬다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은, 사념은 이미 잠잠해졌고, 나의 눈도 더 이상 붉은빛을 띠지 않는다는 것.

그때 헬라가 말했다.

"원하신다면 조금 더 쉬어도 괜찮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들의 마음은 알고 있지만, 사념이 나를 공략하는 부분이 바로 이 점이다.

내 마음속에 나도 모르게 꿈틀대고 있던 스스로를 연민하는 마음.

쉬고 싶고, 포기하고 싶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들.

지금은 그런 감정을 외면해야 할 때다.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머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아니, 이 지독한 힘은 나를 한시라도 빨리 잡아 삼키기 위해 날뛸 것이다."

태초의 고래를 만난 그 순간, 이미 시한폭탄에 불이 붙은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 순간부터 나와 사념, 그리고 태초의 고래와의 싸움은 시작된 셈이라는 말이지.

"오해할 필요는 없다. 너희를 위해서 재촉하는 게 아니야. 나를 위해서다. 오랜 시간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으니까."

"……."

"꼭 이겨내길 바라네."

칼제르가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걱정할 필요 없다. 언젠가… 마계로 한 번 놀러 가지. 그때는 함께 맥주라도… 했으면 좋겠군."

내 말에 칼제르와 베르제르, 헬라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약속이 지켜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걸 저들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래."

"그럼."

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내 뒤로 해츨링과 몰른이 따라왔다.

"너희는… 이곳에서 기다려라."

"뭐, 뭐라고요? 마, 말도 안 돼요오오!"

"꾸웅… 꾸우우우웅!"

해츨링과 몰른의 격한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저들을 데려갈 순 없다.

석탑에 들어가는 건 나 혼자여야 한다고.

나의 모든 세포들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감각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으니, 절대 저 둘을 석탑 안으로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분명 사념은 저 둘을 이용해서 나를 공격할 것이다.

석탑에 가기 위해서는 그 어떤 빈틈도 보여서는 안 된다.

"……."

몰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옆에 가장 오래 있었던 사람인 만큼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몰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곧 데리러 올 테니까."

"하, 하지만…."

"말대로 하시게."

몰른을 붙잡는 칼제르의 한 마디 소리와 함께.

"…빨리… 오셔야 돼요오오…."

몰른이 말했다.

"그래. 최대한 빨리 올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리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저 앞에 보이는 석탑을 향해서.

***

두근! 두근!

탑 앞에 도착하니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사념 때문이다.

석탑 안에서 흘러나오는 형용 할 수 없는 진한 사념이 내 심장을 감싸고 있는 사념을 자극하고 있었다.

[사념의 지배자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외부의 사념을 차단합니다.]

[사념의 억제 효과가 증가됩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것은, 사념의 지배자라는 능력이 석탑에서 흘러나오는 사념을 차단해 주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것마저도 저 탑 안에 들어가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될지 예상할 수 없다.

저벅

나는 석탑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먼 곳에서 봤을 땐 그리 커 보이지 않았지만, 이 앞에서 보는 석탑은 거대했다.

물론 지구에 솟아오른 탑과는 비교할 바는 아니었지만.

'이곳이 입구인가.'

나는 석탑의 입구 앞에 도착했다.

석탑의 입구는 장식이 전혀 없는 거대한 철문으로 되어 있었다.

'손잡이가 있군.'

원형의 손잡이 위로 손을 얹었다.

그 순간.

후우웅!

내 심장 언저리의 사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손잡이에서 붉은빛이 흘러나왔다.

사념이다.

내 몸속의 사념과 손잡이의 사념이 반응하기 시작했고.

[사념을 확인했습니다.]

[태초의 석탑의 문이 열립니다.]

눈 앞에 떠오른 메시지와 함께.

구구구구구구-!

거대한 철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작게 벌어지는 문틈 속에서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끝없는 어둠.

초감각으로도 그 무엇도 포착할 수 없었다.

저 안에 존재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카아아아아!

태초의 노래가 격하게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끝났어."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가 외쳤다.

"젠장… 이제 진짜 시작이로군."

모든 설계자들은 서둘러 태초의 고래로부터 멀리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모든 건, 강민의 손에 달려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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