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입니다."
"물론이야. 그대가 없었다면 우리는…."
"후으응…. 나도 동감이야."
어느새 내 앞에 모인 천족과 마족, 그리고 묘족의 수장들.
영족과의 싸움이 끝이 나고 모두가 모였다.
다들 지쳐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을 테지.
그만큼 영족들은 강력했고, 그들과의 싸움에서 피해가 없이 끝나길 바라는 건 그야말로 과욕이었을 테니까.
"피해는?"
내가 각 수장들에게 물었다.
"……."
"…상당하다."
헬라와 칼제르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헬라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나의 아이들을 지켜낸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나는 시선을 돌렸다.
생각보다 피해가 적었다고 해서 피해가 없다는 건 아닐 테고, 분명 많은 천족과 마족들이 희생당했으리라.
"그렇게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당신이 잘못한 건 무엇도 없으니까요. 다만…."
헬라의 시선이 움직인 곳은 바로 석탑이 있는 그곳.
"…그렇겠지요. 앞으로 당신이 이어가야 할 그 싸움에 비하자면… 나의 아픔은… 아이들의 아픔은 비할 바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헬라가 말했다.
그러더니 헬라는 내 손을 잡았다.
"……?"
"고맙습니다… 정말로…."
헬라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 헬라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고맙…습니다."
헬라는 그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흐음…."
그 옆에서 칼제르는 머쓱한 얼굴로 자신의 뒷목을 어루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이나 내 손을 잡은 채 어깨를 들썩이던 헬라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손가락으로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낸 헬라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당신을 만난 것은 나에게 있어서… 그리고 우리 종족에게 있어서 영원한 기쁨이 될 것입니다."
"…민망하군."
이런 감사를 받고자 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할 일을 하기 위해서 이들과 손을 잡았을 뿐이고, 이들과 함께 내 목적을 향해서 한 걸음 도약했을 뿐이었는데.
"당신은… 순수한 사람입니다. 그건 내가 잘 알아요."
"……."
"당신이 지고 있는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하나만 기억해 주세요. 당신은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스스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울 필요가 있다는 것을요."
"…참고해 보지."
내 말에 헬라가 빙긋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 마음속을 메우고 있던 무거운 것들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미소만으로도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존재라니.
그리고 그때.
"…한강민."
내 옆으로 한 걸음 다가온 건, 베르제르.
"만약… 내가 마족을 이끌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네 덕이다."
"…그런가."
"…그래."
베르제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참… 고맙군."
민망한 말들의 연속으로 쏟아지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리고 조금 전 헬라가 했던 말 그대로, 어쩌면 나에 대해서 조금 더 너그러워져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아직은 아니야.'
지금은 긴장을 놓을 때가 아니다.
전생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내가 이곳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라 함은 끊임없는 채찍질이었다.
나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또 채찍질하며 끝없이 위를 향해 오르기 위한 갈망들.
그게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테다.
아무리 새로운 인생을 손에 넣었다고 한들, 과거의 악착같은 노력들이 없었다면 모든 것은 수포가 되어 버렸겠지.
"응원하지."
나는 베르제르를 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또… 만날 수 있을까."
베르제르가 나를 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베르제르는 벌써 나와의 이별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글쎄."
내가 답했다.
내 대답에 베르제르는 고개를 숙였고.
"후아…."
칼제르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너희와 내가 만난 기간이 그리 길지도 않은 것을. 그렇게 아쉬워할 필요는 없겠지."
"매정하네."
"……."
내 입에서는 작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베르제르의 머리 위로 손을 얹어 머리카락을 헝크러트렸다.
"확실하지 않은 약속은 굳이 하는 편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리고 나도 탑이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조금만 쉬었다가 가야겠어."
"정말이야?"
내 말에 베르제르가 밝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래. 가기 전에 너에게 다시 한번 가르침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가르침이라니…."
"불만인가?"
내게 대꾸하려던 베르제르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아니야!"
"잘됐군."
***
"허억… 허억…."
"무, 무슨 일이지?"
탑의 정상.
탑의 본체.
아니, 태초의 고래를 억누르고 있던 설계자들이 잠시 멈춰 섰다.
"저항이 멈췄어. 이거… 기분 탓 아니지?"
"아닐 거다. 나도 느끼고 있으니까."
어찌 된 영문일까.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격하게 저항하며 설계자들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던 태초의 고래의 저항이 완전히 멈춰 버렸다.
"긴장을 늦추지 마!"
그때 한 설계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저걸… 봐라…."
한 설계자가 손가락을 뻗어 태초의 고래 쪽을 가리켰다.
그 말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태초의 고래에게로 향했다.
번쩍!
태초의 고래가 큰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천천히 굴러가는 눈동자는 설계자들을 하나씩 훑어 내리고 있었으니.
"……."
꿀꺽
순간 설계자들의 몸이 얼어붙었다.
완전히 의식을 되찾은 듯, 또렷하게 자신들을 향하고 있는 태초의 고래의 동공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은, 눈을 뜨고 있음에도 자신들을 향한 어떠한 공격도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그보다 대체 왜 이런…?"
"한강민이로군."
그때 한 설계자가 강민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뭐?"
"그자가 이 녀석을 깨운 거야."
"대체 어떻게…."
"지금의 상황들을 종합해 본다면… 그렇게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겠지. 한강민 그자가 어비스 상부로 진입했고, 점점 이곳으로 가까워오는 순간에 저 녀석에게 변화가 생겼으니까."
"……."
강민이 무슨 행동을 한 건지 설계자들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런 변화가 생긴 게 강민 때문이라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리라.
이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존재는 전 우주에 강민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떠오르는 의문.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군."
"……?"
"우리의 모든 노력은 결국 한강민 저 한 사람을 길러내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 말이야."
"그게 무슨…?"
설계자는 고개를 저었다.
"한강민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 저자가 가진 능력이 아니라면 제아무리 누가 어비스에 올라왔다고 한들 이 모든 것들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오직 강민만이 가능한 일이라는 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마치… 이미 정해진 순리처럼 느껴지는군."
"순리…."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는 순리라는 말을 곱씹었다.
"결국 이 모든 게 그자의 설계였다는… 말일까?"
"설계자인 우리 입에서 설계라는 단어를 꺼낸다는 게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그 생각을 쉽게 부정할 수 없군. 우리가 탑을 만들고 플레이어를 육성한 것도.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피를 흘리며 경쟁한 것도. 결국 한강민이라는 한 인간을 길러내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르는 일이지."
"……."
"수많은 플레이어들의 경쟁과 죽음. 승리와 패배. 그 모든 것이 이루어져 만들어진 게 바로 한강민이라는 인간일 테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강민이라는 존재는 혼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존재였다.
누군가의 능력을 빼앗아야만 강해질 수 있는 존재.
설계자들은 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그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바로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
"알고 있었나?"
"뭘 말이야."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그 인간이 가진 능력이 너무도 절묘하지 않은가."
"그래. 그 입. 너는 너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고 했지만… 그자가 가진 능력이 그저 우연으로 생겨날 수 있는 능력은 아니잖아."
"…푸훗."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가 작은 웃음을 터트렸고, 다른 설계자들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설마…."
"에이…."
무언가 부정하려는 듯한 설계자들.
이내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속일 수는 없겠구나."
"……!"
"대체 무슨…."
"마, 말도… 말도 안 돼!"
모두가 태초의 고래는 뒤로 한 채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에게로 모여들었다.
"그렇다면… 네가, 아니… 당신이…."
"미, 미치겠군."
설계자들은 격하게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금 대한민국 탑의 말에 따르자면… 그녀가 바로 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뜻일 테니까.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는 말아 줘. 내가 시작한 일이었고, 나의 과오였으니 나의 손으로 끝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을…."
"하지만!"
그때 다른 설계자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거대한 몸을 지닌 설계자가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를 내려보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런 복잡하고 험난한 길을 택해야만 했습니까….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그렇지 않아."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는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설계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다만… 나의 손으로 저 아이를 죽이는 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그게 무슨!"
"그것이 나와 저 아이를 만들며 저 아이와 맺은 계약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할 수 없도록… 그래야만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나와 모든 것을 집어삼킬 수 있는 저 아이의 균형이 유지되었을 테니까."
"당신은… 당신은 대체…!"
한 설계자가 고함을 내질렀다.
"이해해다오. 명백한 나의 실수였다. 탄생과 소멸. 그 미묘한 우주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었던 저 아이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괴물이 되리라고는… 나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니까."
"그럼 대체 왜… 정체를 숨기고 계셨던 것입니까…. 아니, 굳이 왜 수많은 탑을 만들어서 수많은 이들이 경쟁하도록 방치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우리를… 우리를 놀리고 있었습니까? 뒤에 숨어 우리를 비웃고 있었습니까? 말씀… 하십시오."
그 말에 대한민국 탑 설계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 아이를 없애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한강민 그자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
그 말이 어떤 뜻인지는 설계자들도 모를 리가 없었다.
강민이 가진 능력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한강민이라는 인간에게는 반드시 고난과 시련이 뒤따라야 할 수밖에 없었다.
처절하고 악착같이 살아남고 올라가기 위해서라면 스스로의 인간성마저도 포기해 버릴 집념을 가진 인간.
"……."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한강민… 그 인간에게 가장 많은 죄를 지은 것은 바로 나일 테지. 그 사실은 결코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나는 그 인간 앞에서 나의 모든 죄를 고백할 것이야. 그리고 그 인간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으로 만들어 줄 생각이다. 나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
다시금 설계자들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때.
"이제는 때가 된 것 같구나. 모든 것을 끝낼 때가 말이야."
구구구구구-
태초의 고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