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
빛이 뿜어져 나온 동시에 나는 낯선 장소에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족 우두머리의 끝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건만.
나와 싸우고 있던 영족 우두머리는 둘째 치고서라도, 천족과 마족, 영족들.
그리고 내가 서 있던 공간마저도 완전히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러고 보니 이곳으로 이동하기 전, 내 귓가에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그건 분명 탑의 목소리였다.'
이미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였기에 듣는 순간 알아챌 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저 목소리를 잊을 수 있을까.
어쩌면 나의 삶 대부분을 찾아왔던 목소리였는데.
그렇게 결국 놈의 숨을 거뒀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쪽… 아니 어쩌면 놈의 극히 일부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지금 다시… 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는 건.'
놈의 본체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화학 작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어비스의 정상에서 말이다.
'나쁘지 않군.'
누군가는 이 상황에 두려움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만은 예외다.
두려움은커녕 손끝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기뻐서.
'드디어… 이제야말로….'
내가 평생을 그려왔던 그 순간이 가까워졌다는 증거이기도 했으니까.
그렇지 않은가.
나의 모든 것을 망쳐 버릴 뻔했던 그 괴물이 나에게 반응하고 있다.
분신 따위가 아닌, '진짜'가 말이다.
두근!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놈의 머리를 잘라내고, 사지를 도륙해 버릴 기회가 내 코앞으로 다가왔다.
기다려 왔다.
이제 곧 다가올 그 순간을 기다리고 기다렸고, 그 순간에 이르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내 앞을 가로막았던 모든 시련들을 넘고 또 넘어왔다.
지금 내가 왜 이런 곳에 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다.
그런 마당에 두려움을 느낄 이유는 없다.
"…오랜만이군."
나는 허공에 대고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곳 어딘가에 놈의 '의식'이 떠돌고 있으리라 확신했으니까.
[…너는… 나에 대해 알고 있느냐…]
놈의 분신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는 건가?
아니면 내가 놈의 분신을 쓰러트리며 기억이 사라진 것일까?
그런 것까지는 나도 알 수 없었지만 놈이 나를 불러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나를 불러냈다면 무언가 목적이 있을 테지.
여기에서 녀석의 목적만 알아낸다고 해도 나에게 있어서는 큰 소득일 테지.
물론 목적이 없을 수도 있다.
놈의 의지가 아닌, 우연의 일치로 내가 놈의 공간에 소환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지금 놈의 상태나, 놈에 대한 일말의 정보라도 손에 넣게 된다면 나는 그것으로도 족하니까.
"당연하다… 알고 있지. 잘 알다마다."
내가 입을 열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어떻게…? 나는 누구지…? 왜 너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냐. 너는 나의 의문에 답을 해줄 수 있는 존재인가…?]
'…….'
이건 꽤 난감하다.
정보를 얻어내긴커녕 내가 녀석에게 나에 대한 정보를 얹어 주게 생겼는걸.
물론 그럴 생각은 없다만.
이제 곧 나와 싸우게 될 녀석에게 나에 대한 일말의 정보도 내어 줄 만큼 어리석은 내가 아니다.
"우선 모습을 드러내는 게 낫지 않겠나."
내가 말했다.
적어도 지금 만큼은 놈이 나에 대한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놈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스스로에 대한 자각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억측일 수도 있겠지만, 놈의 말들에서 내가 느낀 건, 놈은 이제 막 세상에 대해서 학습하려 하는 어린아이의 호기심 가득한 물음이다.
[안 된다…. 그것…은 힘들…다.]
"왜지?"
[나의 몸은… 묶여 있다…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 누군가 나의 몸을 억누르고 있어… 답답해… 답답해… 나를, 나를 꺼내 줄 수 있겠나…!]
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분명히 설계자들이 놈의 몸을 봉쇄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 뭐.
사실 놈이 어떤 상태이건 관심은 없다.
하지만 나는 놈의 마지막 말에 집중했다.
꺼내 줄 수 있겠냐는 그 말.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놈은 나에게 적대감이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대사.
그리고 어쩌면, 놈에게서 쓸 만한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조건이… 있다."
나는 도박을 걸어 보기로 했다.
어차피 놈과 관계가 악화된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으니 내게 기회가 생긴 이 순간에 놈을 구워삶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조건…? 내가… 내가 들어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너는… 어떤 존재지…?"
[뭐…?]
"너는 누구냐. 그것을 알아야 내가 너를 도와줄 수 있지 않겠나. 네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내가 너를 도와준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
[아아… 그렇지… 그래… 나는… 고래다… 태초의 고래… 누군가… 내게 그런 이름을 붙여 주었었지….]
이름이 궁금한 건 아니었지만, 얼떨결에 놈의 정식적인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 이름을 지어 준 존재에 대해서 기억나는 건…?"
[없다… 아니… 한 가지…. 그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라졌다… 나는 그가 그리웠고… 그의 흔적이 담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의 흔적이 남은 것?"
[그래… 모든 우주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 모든 곳에 그의 흔적이… 나는 그래서… 먹어 삼켰다… 그를 나와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그를 맛보기 위해서….]
'끔찍한 말이군.'
하지만 놈이 수많은 우주를 집어삼킨 이유를 조금이나마 유추해 볼 수 있었다.
태초에 이 세상이라는 것을 창조한 누군가.
세상을 창조하고 사라져 버린 그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있는 우주들을 마구잡이로 집어삼킨 탑…, 아니 태초의 고래.
그때였다.
[…그가 나에게 준… 한 가지 능력은 바로… 포식…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포식의 능력….]
'……!'
놈의 입에서 포식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나는 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게 만들어 준 능력이 바로 포식자였으니까.
'설마… 우연이겠지.'
태초의 고래의 포식과 내 능력의 이름이 같은 것 말이다.
[아아… 또 하나… 또 하나 생각이 났어….]
"그게… 뭐지?"
내가 조금은 긴장된 투로 질문을 던졌다.
[그가 그랬었지… 언젠가… 언젠가… 나를 집어삼킬… 더 커다란… '입'이 나타날… 것이라고….]
'…….'
그 말까지 듣고 난 순간, 나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저 말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모든 정황을 돌아본다면… 그야말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더 이상 의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모든 게 계획된 일이었다는 말일까.'
내가 다시 살아난 것.
그리고 포식이라는 능력이 내 손에 들어온 것까지도.
그 누군가의 계획이었다는 걸까?
'설계자 역시도 나의 회귀에 대한 것은 전혀 알지 못했어.'
그렇다면 그런 설계자들의 계획까지도 '누군가'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걸까.
지끈-
머리가 아파왔다.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나의 존재에 대한 의문.
어쩌면, 의심.
나는 어떤 존재인가.
왜 다시 살아났으며 포식자라는 능력을 손에 넣게 되었는가.
[…그때…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아아… 그랬다… 그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더 커다란 입이 나를 집어삼키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이라고…]
그 순간.
번쩍!
텅 빈 공간 한가운데에 눈 하나가 나타났다.
붉은 눈.
사념의 힘으로 똘똘 뭉쳐 있는 붉은 눈.
눈동자가 움직이며 드넓은 공간을 천천히 훑었다.
[아아… 아… 아아아…]
저 눈은 태초의 고래의 눈이리라.
끝없는 신음과 함께 눈이 굴러가기 시작했고, 이내.
팟!
나를 바라봤다.
동공이 수축되고 이완되기를 반복했다.
쩌억- 쩌어억-
[그래… 그렇구나…]
놈의 탄식 어린 말들이 귓가를 두드렸다.
놈의 눈은 나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나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머리가 아파왔다.
어지럽다.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 알겠다… 입… 너는 입이로구나… 거대한 입… 나를 삼키고… 모든 것을 삼켜 버리이이일…!]
번쩍!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으흐하하하하하…하하아아…]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끔찍한.
나의 심장을 억죄어 오는 탄식과 함께.
쩌저적-
공간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
"…님…!"
"정…게… 이 친…야…!"
시야가 밝아오며 내 눈앞에서 나를 내려보고 있는 몇몇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주인니이이이임!"
"이보시게! 정신이 드는가!"
몰른과 칼제르다.
"끄윽…!"
나는 머리를 짚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왜…."
"그걸 낸들 알겠는가. 영족 우두머리를 집어삼키고서는 갑자기 쓰러졌다는 이야기만 들었다네."
"……."
나는 상체만을 일으킨 채로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서는 어느새 수많은 천족과 마족들이 모여들어 남은 영족 무리들을 소탕하고 있는 중이었다.
"싸움은…?"
"이제 곧 끝이 날 것 같군. 그대 덕분이야. 그대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도 큰일날 뻔했겠지."
"그런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이 끝나가고 있다는 기쁨 같은 건 느낄 새가 없었다.
'젠장….'
놈은 결국 나의 정체를 알아냈으리라.
내가 바로 자신을 끝내버린 그 '입'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도 소득이 없는 건 아니다.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존재가 말했던 '입'이 정말 나라면.
내가 바로 이 모든 싸움을 끝내고 태초의 고래를 집어삼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 테니까.
'나쁘지 않은… 소득이군.'
문제는 놈이 나의 존재를 확실히 인지하게 된 것으로부터 어떤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
'그래도 뭐….'
달라질 건 없으리라.
놈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자면, 이미 나의 승리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
어쩌면 이 세계가 제 모습을 갖추기 전부터 나의 승리가 예언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될 법한 말이기도 했으니까.
'…그래. 나는 이긴다.'
반드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나는 이길 것이다.
놈의 머리에 나의 검을 박아 놓고, 놈의 말대로 놈을 집어삼켜 버리리라.
그리고 모든 것을 끝낼 것이다.
이 지겹고 지긋지긋한 모든 것을 끝내 버리리라.
그리고 그때.
"자, 일어나게."
칼제르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 곧 싸움이 끝날 것 같으니… 곧바로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나, 친구여."
"……."
꽈악!
나는 칼제르의 손을 맞잡았다.
칼제르가 힘을 주어 내 몸을 일으켰고.
"아저씨이이이이!"
그때 저쪽에서 베르제르의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베르제르가 다급히 칼제르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고.
반대쪽에서는 헬라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수많은 천족을 이끈 채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내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어비스 상부의 석탑.
이제 곧 저곳으로 가 탑의 비밀을 밝혀내고 어비스의 정상으로 올라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