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나는 두 진영의 움직임을 조금 먼 곳에 떨어져서 관망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싸움의 포문을 연 건, 헬라였다.
헬라는 허공에서 자신의 공격을 쏟아내며 영족들의 요새를 파괴하기 시작했고.
헬라의 등장에 영족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허공으로 스러졌다.
그 모습을 본 천족들 역시 헬라의 등장에 힘입어 더욱더 영족들을 향한 공격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헬라가 나타나자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칼제르와 베르제르가 싸움에 뛰어들었다.
당연히 그들의 뒤를 따라 마족들도 영족들을 향한 공격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건 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는 천족, 마족 연합군이 압도적으로 영족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직 영족의 본대가 채 도착하기도 전에 헬라가 먼저 그들의 허를 쳤기 때문이었다.
'영족의 본대와의 거리는 아직도 꽤 멀리 떨어져 있다.'
여기에서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나도 천족과 마족 진영에 합류해야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만약 내가 지금 합류한다면 확실히 승세를 잡은 상태에서 싸움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아니야.'
물론 시작부터 분위기를 압도하며 싸움을 시작하는 게 나쁜 판단은 아니겠지만.
나의 결론은 조금 달랐다.
'나는 힘을 최대한으로 비축해야 한다.'
곧 마주하게 될 어비스 상부의 탑은 둘째 치고서라도.
영족들의 전쟁 영웅들과의 싸움.
그리고 더 나아가 영족 우두머리와의 싸움을 위해서라도 나는 힘을 비축할 만큼 비축해 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 막 싸움을 시작한 이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점점 다가오고 있어.'
영족의 본대.
그들은 총 네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각 부대의 앞에는 영족의 전쟁 영웅들로 보이는 이들이 이끌고 있었으며.
전쟁 영웅들의 특색에 따라 부대의 특색이 달라지는 모습이 꽤 흥미로웠다.
'그리고 저 녀석….'
가장 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가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로 격한 흥분에 휩싸여 있는 존재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이 영족들의 우두머리가 뿜어내는 기운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우습군.'
그런 영족 우두머리의 기운을 느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 다름이 아니었다.
'아티팩트를 저렇게 휘감고 있다니.'
얼마나 많은 아티팩트를 흡수한 건지,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아티팩트의 종류는 셀 수 없이 다양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만일 녀석이 조금만 더 아티팩트에 대한 이해가 있었으면 싸움이 더 격렬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놈은 아티팩트에 대한 이해도는 전혀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모든 아티팩트의 힘을 흡수해 버린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제 살을 갉아 먹는 꼴이 되고 말 거다.'
말했듯 아티팩트에는 사념의 힘이 묻어 있다.
몇 개의 아티팩트를 사용한다고 해서 부작용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그 수가 과도하게 많아지게 된다면.
분명 사념에 사로잡히게 말 것이다.
그리고 내가 느끼기로 지금 영족 우두머리는 이미 부작용이 일어날 정도로 많은 아티팩트를 몸에 두르고 있는 상황.
'아티팩트의 능력을 남용하며 스스로 제 살을 깎아 먹게 되는 거지.'
놈은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으리라.
만약 알고 있었으면, 저런 식으로 아티팩트를 남용하지는 않았겠지.
'이거 의도치 않게 놈의 약점을 하나 손에 넣게 된 것 같은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놈을 상대하는 게 더 쉬워졌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분명 아티팩트의 힘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이고.
영족 우두머리의 신체 능력이라면 아티팩트의 역작용 따위는 무시해 버릴 정도일 테니까.
'그럼에도….'
약점을 하나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 약점을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을 꿰뚫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승률이 올라갔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러던 중.
"주인니이이이임!"
"꾸우우웅!"
저 먼 곳에서 해츨링과 해츨링의 등 위에 타 있는 몰른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
"어디 있어! 그 망할 인간이 어디 있느냐고!"
영족 우두머리는 화가 날 대로 난 상태였다.
지금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들의 수하인 전쟁 영웅들이 자신에게 도전해 오고 있다는 것도.
웬 마족 꼬마와 인간에게 요새들이 박살 나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처, 천족의 헬라와 마족의 칼제르가…."
"그만 해, 이런 쓰레기 같은 자식들아아아아!"
콰직!
"커억…."
쿠우웅!
우두머리의 주먹에 현재 상황을 보고하고 있던 영족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바로 이것이다.
우두머리가 지금 무엇보다도 화가 나 있는 이유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헬라와 칼제르에 대한 이야기들.
"망할…연놈들이…."
칼제르와 헬라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전신이 욱신거리는 것만 같았다.
이전의 전쟁에서 그 둘의 합공만 아니었어도 천족과 마족, 두 종족을 완전히 몰아 낼 수 있었을 텐데.
다시 한번 두 진영이 힘을 합쳐 자신에게 도전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참아 낼 수가 없었다.
"죽여 버릴 거야… 이번엔 기필코… 그 머리통을 쪼개 버릴 거야…."
꽈득- 꽈드득-
영족 우두머리의 근육이 뒤틀리며 그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래. 좋아… 좋아…!"
새로 손에 넣은 아티팩트의 능력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륵! 파짓!
한 손에서는 화염이, 한 손에서는 전류가.
그리고.
쩌적- 쩌저적-
발아래에서는 얼음 결정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한쪽 다리는 검게 물들었고, 다른 한쪽 다리는 붉게 달아올랐다.
등 뒤에서는 가시가 솟구쳤고, 전신에는 투명한 막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수없이 많은 아티팩트를 흡수한 결과였다.
"좋아… 아주 좋아…."
영족 우두머리는 아티팩트의 힘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꺼림칙한 감탄사를 흘려보내며 자신의 힘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콰아아아앙!
저 앞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천족, 마족과 카타라님의 부대가 충돌했다는 소식입니다아아아!"
어디선가 그런 외침이 들려왔다.
***
"칼제르!"
"헬라군."
한참 전투를 벌이고 있던 중, 하늘 위에서 칼제르와 헬라가 조우했다.
"그렇게 성급하게 어디론가 향하더니, 말도 없이 싸움을 시작해 버리면 어쩌자는 말이오."
칼제르가 헬라에게 말했다.
핀잔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칼제르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헬라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봤다는 놀라움이 담겨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의 아이들에게 힘을 보태주기 위해서. 아니, 그 전에 아이들의 희생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서였죠."
"말 그대로 천족들의 어머니라는 말이 조금도 아깝지 않군."
"그게 제 일이니까요."
헬라는 담담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헬라의 태도에서는 스스로의 공을 치하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자신의 일을 해낸다는 담백한 어조다.
"그런가."
칼제르는 그런 헤라를 보며 내심 존경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자신 역시 마족들의 수장이기는 하지만, 마족 전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결코 헬라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희생은 하지 못하리라.
그때.
"그건 그렇고… 베르제르 당신은 더욱더 늠름해지신 것 같군요. 이제 정말 어엿한 마족이 된 것 같아요. 어떤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것이겠지요."
헬라가 칼제르 옆에 있는 베르제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베르제르는 이미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헬라는 베르제르의 겉모습만을 보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헬라의 눈에 비치는 베르제르는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칭얼대는 마족이 아니었다.
정말로 마족이라는 집단을 이끌어 갈 준비를 갖추고 있는 듯한 모습.
'…역시 그 사람 때문이겠지요.'
헬라의 머릿속에는 강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베르제르와 강민 둘 사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베르제르를 만든 건 분명 강민일 것이라고.
헬라는 의심치 않았다.
한동안 말이 없던 베르제르는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헬라의 물음에 답했다.
"…뭐, 그렇게 됐…습니다."
베르제르는 어설픈 존대와 함께 헬라에게 말을 건넸다.
그 말에 칼제르가 흠칫 놀라며 베르제르를 바라봤다.
헬라 역시도 쉽사리 놀라움을 감추지는 못했다.
.
베르제르 역시 자신을 향한 헬라의 시선이 바뀌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헬라 앞에서 영 어색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베르제르였다.
"잘 부탁해요, 베르제르."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 헬라는 베르제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다시.
헬라의 입이 열렸다.
"이제는 정말 당신이 칼제르의 뒤를 이어 마족을 이끌 만한 훌륭한 마족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헬라는 칼제르를 한 번 바라봤다.
어쩌면 칼제르를 무시하는 발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칼제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화를 내기는커녕.
"이 놈아, 뭣 하느냐. 헬라의 손이 무안해 보이는구나."
베르제르를 타박하는 칼제르.
"……."
베르제르도 칼제르의 저 말이 헬라의 말에 대한 긍정의 표현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꽈악-
헬라의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합니다."
베르제르게 헬라에게 말했다.
헬라는 여전히 입가에 푸근한 미소를 걸어 올린 채 맞잡은 베르제르의 손에 힘을 주었다.
어쩌면 마족과 천족의 미래가 크게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를 커다란 분기점 앞에 그들이 서 있는 셈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순간.
콰아아아앙!
저 먼 곳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천족 한 명이 다급한 날갯짓과 함께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헤, 헬라님! 영족의 전쟁 영웅 카타라와 연합군이 충돌했다는 소식입니다!"
다급히 날아 온 천족 한 명이 그들에게 소리쳤고.
천족의 보고를 들은 셋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군요."
"그렇군."
이제 정말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순간이다.
오래전 끝났던 끔찍한 전쟁.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그 전쟁의 서막.
"갑시다."
"예."
그들은 서둘러 영족과 연합군의 충돌 지점을 향해 날갯짓을 시작했다.
한참이나 날갯짓을 하며 허공을 가로지르던 중.
베르제르의 시야에 문득 칼제르의 뒷모습이 비쳐 들어왔다.
왜 그런 것일지.
이 순간에 유난히도 칼제르의 뒷모습이 거대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조금 전 헬라가 했던 그 말이 아직도 베르제르에게 큰 여운을 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저씨.'
언제나 자신의 옆에서 자신을 지켜 줄 것만 같았던, 산 같은 존재가 자신을 인정했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샘솟는 아린 감정은 본인조차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빨리 와라, 베르제르! 그렇게 굼벵이처럼 날아서 어디 마족 놈들이 네놈을 따르기나 하겠느냐!"
칼제르가 베르제르를 향해 소리쳤지만.
"……."
베르제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