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뭐?"
"가라레와 하파타가 죽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영족 우두머리가 손에 들고 있던 아티팩트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 영족들은 모두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아티팩트에 온 정신을 빼앗기고 있던 영족의 우두머리가 드디어 아티팩트가 아닌 현실로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앞에 앉아있는 날렵한 영족은 우두머리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또 한 명의 전쟁 영웅, 카타라.
제아무리 우두머리라고 해도 자신과 함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전쟁 영웅마저는 쉽게 대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
우두머리의 날카로운 시선이 카타라에게 향했다.
"다른 녀석들은."
"저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두머리의 말에 카타라가 담담히 답했다.
"누구에게 당한 거지?"
"인간 한 명과… 마족 꼬마…. 아니, 칼제르였습니다."
"칼제르… 그 망할 노인네가…."
칼제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영족 우두머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나 있는 커다란 상처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일격이었다.
그 일격만 아니었어도 마족과 천족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을 테니, 영족 우두머리로서도 쉽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더 이상 관망만 하고 계셔서는 안 됩니다. 동족들이 이 시간에도 무수히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고작 인간 하나 때문에요."
"……."
우두머리는 카타라를 씹어 먹겠다는 기세로 바라봤으나, 카타라 역시 지지 않았다.
"그렇게 노려보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나보다 강한 것은 알지만, 당신이 나를 공격하겠다면 나 역시 가만있지는 않을 겁니다."
"많이 컸구나."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요."
"……."
영족 우두머리는 카타라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힘으로 오른 자리인 만큼 언제든 힘으로 내려갈 수 있는 자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카타라는 그만큼 강하다는 것도.
"물론 상황이 상황인 만큼 지금 그 자리를 노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자리를 노리는 건 다시 한번의 싸움이 끝나고 나서라도 충분하겠죠."
"…당장 네 머리를 쳐부수고 싶지만…."
"그리 쉽지는 않을 겁니다. 저라고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니까."
"좋아."
그렇게 말하며 우두머리는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그의 몸에는 수많은 문양들이 새겨진 참이었다.
많은 아티팩트의 힘을 흡수한 결과였고, 그 사이에 영족 우두머리는 벌써 한참이나 강해졌다는 사실을 카타라가 모를 리 없다.
물론 카타라도 마찬가지다.
전쟁 영웅이었던 만큼, 그의 아래에는 우두머리만큼은 아니지만 꽤 많은 수하들이 있었으니까.
"너도 꽤 재미를 본 모양이야."
"물론이죠."
"좋다. 이 싸움을 끝낸 뒤에 가장 먼저 네놈의 머리를 으깨주마."
그런 말을 남기며 영족 우두머리는 커다란 동굴 밖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동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 수많은 영족들이 고개를 조아린 채 우두머리 앞에 무릎 꿇고 있었고.
"오랜만입니다."
"간만에 뵙습니다."
동굴의 입구에는 영족들의 전쟁 영웅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몸에 다양한 문양들을 새기고 있었고.
그런 모습을 보며 우두머리는 눈을 흘겼다.
"내가 너무 정신을 팔고 있었던 모양이군."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된 한 문장.
"머리를 으깨 줄 놈들이 이렇게 많아졌을 줄이야."
"……."
"……."
전쟁 영웅들 역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
"저쪽이야!"
묘족 한 명이 코를 킁킁대다 한 곳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 순간,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천족과 마족들이 날개를 펼쳤다.
수십 명이 모여서 날개를 펴며 허공을 날기 시작하니 그 모습은 과연 장관이었다.
"좋아!"
"가자고!"
마족과 천족이 큰 날개를 퍼덕이며 묘족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천족과 마족들은 순식간에 영족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영족들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잔뜩 당황한 채 천족과 마족들을 바라봐야만 했다.
날지 못하는 그들에게 천족과 마족의 기습은 눈으로 보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공격이다.
그 순간 그들의 무기가 허공에서 번뜩이며 먹이를 찾아낸 매처럼 영족들을 향해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렸다.
"커헉!"
"크하악!"
영족들의 목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렇치이이!"
"좋았어어어!"
짜아악!
천족과 마족은 순식간에 영족 무리를 처치한 뒤 날개를 퍼덕이며 허공에서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
"이것 참… 어색하군."
그들의 기억 속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으르렁대던 서로였건만.
이렇게 힘을 합쳐 공동의 적과 싸우게 될 줄이야.
"이렇게 된 거 앞으로도 잘해보자고."
"그래."
그들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색한 미소를 지우지는 못했다.
"뭐 해! 아직 끝이 아니야!"
그때 다시 아래에서 뛰어오던 묘족이 소리쳤고.
"저쪽에 최소한 스물!"
묘족은 다급히 영족들이 있는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들은 곧바로 묘족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머지 않아 다시 울려 퍼진 영족들의 울음 소리와 함께 천족과 마족들은 다시 하늘 위로 날아 올랐고, 묘족은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영족들의 냄새를 맡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했다.
묘족의 보금자리가 완성된 뒤, 그들은 지체없이 행동을 시작했다.
지금과 같은 식으로 묘족, 천족, 영족 연합군은 빠른 속도로 영족들의 수를 줄이고 있었고, 벌써 이곳저곳에서 영족들의 요새가 파괴되고 있다는 승전보가 들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
나는 벌써 열에 가까운 놈들의 요쇄를 완전히 붕괴시켜 버리고 잠시 쉬고 있던 참이었다.
얼마 전에 획득한 아티팩트, 지진 덕분에 놈들의 요새를 파괴하는 것은 날이 갈수록 속도가 붙고 있었지만, 나라고 해도 혼자의 몸으로 거친 싸움을 끝없이 이어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한참 전부터 누군가가 내가 있는 곳으로 바삐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뒤, 핑곗김에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퍼덕! 퍼덕!
저 먼 곳에서 거친 날갯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칠 정도로 가까워졌다.
'천족.'
나를 찾아오고 있다는 건 바로 천족들이었고.
저 먼 곳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천족의 행렬이 하늘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헬라인가.'
그중에서 단연코 눈에 띄는 천족 한 명은 바로 헬라였다.
그녀의 날개는 다른 천족들과는 달리 금빛으로 찬란히 물들어 있었고, 날갯짓하는 모습을 보며 나조차도 매료될 정도로 아름다웠으니까.
그렇게 그들의 비행 장면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중, 하나둘씩 바닥으로 착륙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헬라마저도 바닥에 착륙한 뒤, 그들을 나를 향해 걸어왔다.
"오랜만이군."
헬라가 나와 가까워진 뒤, 나는 헬라에게 인사를 건넸고.
"그렇군요."
헬라가 답했다.
"어쩐 일이지?"
"이제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아이들과 마족들, 그리고 묘족들이 영족들과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군."
"알고 계셨던 것 같군요."
"그래."
모를 리가 없다.
이미 초감각을 통해서 이 근방에서 격렬한 싸움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눈치챘으니까.
"그렇다면… 그 사실도 알고 계셨을 테죠."
"어느 정도는."
"……."
헬라가 이야기하는 건, 영족들도 본격적인 행동을 시작했다는 것이겠지.
특히나 영족의 우두머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우리들의 피해는 앞으로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지 않은가."
"예. 그렇지요. 하지만 마음이 편칠 않습니다."
"그 말을 하러 내가 있는 곳까지 찾아온 건가? 그건 아닐 테고. 본론으로 빨리 들어가 줬으면 좋겠군."
자신의 걱정을 푸념하기 위해 나를 찾아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헬라의 의도를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헬라가 착용하고 있는 무장 상태나,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천족들의 모습만 봐도 말이다.
"직접 나설 생각인가?"
"예. 얼마 전 베르제르와 칼제르가 영족의 전쟁 영웅을 처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상황엔서 저 혼자 가만히 있는다는 건… 나의 아이들에게 죄를 짓는 일일 테니까요."
"그렇군. 그런데 굳이 그걸 나에게 보고하는 이유는?"
헬라가 미소를 지었다.
"우리를 이끄는 건, 나도 칼제르도 아닌, 당신이니까요. 리더에게 보고하는 것은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당연한 순서 아닌가요."
"…과찬이로군."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당신이라는 존재가 버티고 있다면 우리 연합군은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글쎄. 그렇진 않을 것 같은데."
"아니요. 당신이라는 한 인간 덕분에 현재 천족과 마족은 하나로 융합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전쟁에서도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해 진 건, 오로지 당신 덕분이죠."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역시 헬라는 나를 과대하게 평가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신의 존재가 사라진다면, 이 연합군의 존폐도 크게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몸을 아끼셔야 합니다."
"…괜한 걱정이군. 나는 이곳에서 죽을 이유도, 죽을 생각도 없다."
나는 탑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쨌든 말은 고맙군. 당신 같은 존재에게 이 정도로 걱정 어린 인사를 받는 인간은 아마도 없었겠지. 앞으로도 없을 테고."
"물론입니다."
헬라는 그렇게 말하며 투구의 안면 가리개를 내렸다.
"곧 보지."
"예."
그렇게 말하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헬라와 천족들 역시 다시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비상할 준비를 시작했다.
"놈들도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으니."
내 말 그대로.
저 먼 곳에서부터 영족들의 기척이 초감각에 포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유독 강인한 힘이 느껴지는 영족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었으니.
'저들이 바로 영족들의 전쟁영웅들이겠군.'
지난 번 내가 상대했던 영족이나 베르제르가 고전했던 영족보다도 훨씬 강인한 힘이 느껴지는 영족이었다.
'재미있겠어.'
이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려는 이 순간, 다시 내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 싸움의 끝에 이 어비스의 비밀이 가려져 있을지도 모를 테니까.
'정확한 타이밍을 노려야 한다.'
무작정 적진으로 뛰어들 생각은 없다.
두 진영이 격렬한 싸움을 시작하게 되면, 제아무리 숫자가 많은 영족이라고 해도 분명히 병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을 테고.
'나는 그 빈틈을 노린다.'
영족의 전쟁 영웅을 하나씩 격파하고, 종국에는 영족 우두머리의 목을 따 버릴 계획이다.
'착실히 하나씩. 그리고 확실하게.'
이 싸움을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그래야 최대한 힘을 비축한 상태로 저 탑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