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어서, 서둘러서 칼제르님께 이 사실을 전해라."
"…하지만 주군께서 원치 않으실…."
"쓸데없는 소리! 주군이 원치 않으셔도 어쩔 수 없다. 그래. 물론 주군이 승리하실 수도 있고, 주군을 믿지 못했다는 벌로 내가 큰 징계를 받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건 위험해. 저 녀석은 위험하다고!"
"아, 알겠어."
베르제르와 영족의 싸움이 시작된 후, 베르제르의 수하들은 결국 칼제르를 호출하기로 결정했다.
그들 역시 베르제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영족과 싸움을 시작했는지 모를 리는 없겠지만.
그들로서는 그런 마음가짐 따위보다는 베르제르의 안위가 더 중요한 일이었다.
베르제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 지금, 칼제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금방 다녀오마. 지키고 있어 다오."
"그래. 너희 둘은 최대한 빨리 이 사실을 전해줘."
"그래."
팟!
그와 함께 수하 둘은 순식간에 몸을 날렸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의 수하는 먼 곳에서 베르제르의 모습을 지켜봤다.
쾅! 콰콰쾅!
베르제르와 영족의 격렬한 싸움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 역시 칼제르님께 도움을 청하고 싶진 않았지만….'
영족과의 싸움에서 베르제르가 밀리고 있다는 게 문제다.
지금까지는 베르제르도 잘 버티고 있기는 했지만, 앞으로도 이런 상태가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니, 분명히 베르제르가 밀리게 될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쳐있는 상태이기도 했고.
더 나아가 아직 자신의 새로운 마기를 온전히 다루지 못하는 베르제르의 상태를 생각해 본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베르제르가 영족에게 밀린다는 건 자명한 사실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주군, 용서하십시오.'
베르제르의 자존심도 중요할 테지만, 그에게 있어서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베르제르의 존재였으니까.
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
'이런… 미친…!'
베르제르의 입에서 피가 한줄기 흘러내렸다.
영족을 공격 할 때마다 내장이 뒤틀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방어가 아니라, 공격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눈앞의 영족은 강했다.
하지만 영족 역시 베르제르를 보며 조금은 놀랐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베르제르가 크게 지친 것뿐이지, 영족에게도 데미지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
팟!
영족은 잠시 회복을 위해 베르제르와 거리를 벌렸다.
휴식 시간이 생겼다고 좋아할 일은 아니다.
만약 영족이 다시 숨을 가다듬고 공격해 온다면, 그것은 베르제르에게 있어서 사형선고나 다름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베르제르는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있는 힘껏 몰아쳐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도무지 발을 떨어지질 않았으니까.
"굉장하구나. 전쟁 당시 너와 같은 마족은 기억이 나질 않는데."
잠시 거리를 벌린 영족이 베르제르에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너희 마족과 천족들을 싹 쓸어 버려야 했는데. 괜히 씨앗을 남겨두어 일이 귀찮게 되어 버렸군."
잔뜩 지쳐있는 베르제르와는 달리 아직도 여유가 넘치는 영족의 모습.
"시끄…러워."
베르제르는 긴말을 꺼낼 수도 없을 정도로 지쳐있었다.
온몸이 녹초가 되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태였다.
그런 베르제르의 상태를 눈치챈 덕에 영족은 한껏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언제라도 자신이 베르제르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그러고 보니, 그 노인네는 잘 지내고 있나? 참으로 재수 없는 노인네였는데 말이지."
영족이 말했다.
칼제르를 말하고 있다는 걸 모를 베르제르가 아니었으니, 그 말을 들은 순간 베르제르의 미간이 좁혀졌다.
"네가 감히 입에 담을 분이 아니야. 그분… 아니, 아저씨를 욕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말조차 꺼내지 못하던 베르제르는 한 마디도 더듬지 않으며 영족을 향해 쏘아붙였다.
평소에 아저씨라 부르며 친근하게 대하고는 있지만, 칼제르를 향한 베르제르의 존경심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거야 네 입장이지 않겠니, 꼬마야. 그 노인 때문에 우리 대장이 크게 다쳤다고. 아직도 가끔 밤잠을 설친다는 얘기가 있어."
"…시끄러워."
베르제르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다리가 떨렸고, 호흡이 가빠졌다.
'몸이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저 녀석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소리는 기억을 담고 있다고 했던가.
그리 좋은 목소리도 아니었건만.
영족의 목소리가 귀를 두드릴 때마다 과거 전쟁터에서 수많은 마족들을 학살하던 놈의 모습이 계속해서 겹치고, 또 겹치고 있었다.
'젠장….'
베르제르의 입에서 다시금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이대로는 안 돼.'
알고는 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강하다.
저 영족은 너무 강했다.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칼제르가 베르제르에게 했던 말이 있다.
'나는 강하다.'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한 이야기.
물론 저 말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진짜 중요한 건 그다음이었다.
'될 때까지 했으니까.'
어이없는 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바로 칼제르가 강해진 유일한 방법이었다.
노력을 강요하는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었다.
실제로 칼제르는 마족에서도 최하층 계급으로 태어난 최하급 마족.
그렇기에 칼제르가 대단했고, 마족의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마족의 계급을 깨부수고 마기의 '본질'을 일깨운 존재였으니까.
'그 본질.'
이제야 베르제르도 그 본질이라는 것에 손이 닿은 찰나였다.
그동안 유일하게 칼제르만이 다룰 수 있었던 마기의 '극의.'
칼제르라고 하여 처음부터 마기의 극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건 아니었고.
극의를 온전히 다룰 수 있게 된 유일한 방법이 바로 저 한 마디였다고.
칼제르는 말했다.
'될 때까지 해. 될 때까지 하면 뭐라도 되지 않겠냐.'
그 말을 떠올리며 베르제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식한 말이지만, 그만큼 단순 명료한 진리도 없겠지.'
그리고 문득, 한강민이라는 한 인간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지만.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녀석도 마찬가지겠지.'
될 때까지.
어떻게 해서든 되게 만드는 그런 괴물들.
칼제르, 그리고 한강민.
'나라고 못 할 이유가 없잖아.'
베르제르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그리고 영족을 바라봤다.
여전히 두렵다.
여전히 몸이 무겁다.
하지만, 해야 한다.
될 때까지.
이 마기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까지.
'나는… 베르제르다.'
쿠웅!
베르제르가 영족을 향해 도약했다.
영족은 비웃음 가득한 미소와 함께 두 손을 뻗었고.
그의 팔에서 칼날들이 솟구쳐 올랐다.
"어리석은 녀석, 잠시라도 숨을 붙여 줄 요량이었건만, 기어코 명을 재촉하는구나."
영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베르제르의 주먹이 영족의 배를 강타했다.
쿠우웅!
"헛짓거리."
하지만 역시나 베르제르의 일격은 영족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영족은 안간힘을 쓰고 있는 베르제르를 보며 코웃음 쳤고.
콰아앙!
영족은 베르제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크아악!"
베르제르의 몸이 땅에 처박히며 베르제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너는 약하다. 너는 나를 이길 수 없…."
영족의 말이 끝나기도 전, 다시 베르제르가 영족을 향해 도약하며 영족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영족은 어렵지 않게 베르제르의 공격을 막아냈고, 다시 베르제르를 내동댕이쳤다.
콰아앙!
다시 바닥에 처박힌 베르제르.
하지만 베르제르는 멈추지 않았다.
다시, 또다시.
영족은 슬슬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달려든다고 뭐가 달라질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대체 왜 이렇게 무모한 짓을 반복하고 있는지.
그렇게 다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베르제르를 보며, 영족은 생각했다.
'끝내야겠군.'
그때였다.
번쩍!
베르제르의 몸이 사라졌다.
그리고.
쩌어어엉!
다시 복부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순간, 영족의 눈이 커졌다.
달랐다.
그동안 베르제르의 일격과는 무게감이 달라져 있었다.
"무슨…."
영족이 눈을 부릅뜬 그 순간.
"될 것 같은…데."
베르제르의 주먹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진짜… 되잖아…."
베르제르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베르제르는 그때부터 영족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한계를 넘어 극한의 상황까지 치달았지만, 베르제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커억… 크윽… 크아아악!"
베르제르의 공격이 먹혀 들어가기 시작했다.
영족의 입에서 피가 쏟아지고, 그의 몸이 뒤틀리며 괴성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하지만….'
베르제르 자신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
잠시 몰아치는 공격에 방종하고 있던 영족이 빈틈을 드러낸 건 사실이지만, 영족의 숨통을 끊어낸다는 확신은 없다.
'그래도… 한다. 될 때까지!'
콰콰콰콰쾅!
베르제르의 손바닥에서 마기가 응축된 구체가 뿜어져 나가며 영족의 전신을 강타했다.
하지만 그때.
번쩍!
빛무리와 함께 베르제르가 뿜어낸 구체가 모조리 사라졌다.
"이런… 미친… 자식이…."
영족의 몸 주변으로 빛과 함께 펼쳐진 막이 베르제르의 구체를 막아냈다.
"잔재주는… 거기까지."
영족의 싸늘한 미소가 베르제르에게로 향했고.
"죽어라."
영족의 몸이 베르제르를 향해 쏟아졌다.
베르제르가 눈을 깜빡할 새도 없이 가까워진 영족을 바라보며.
'됐어. 할 만큼 했잖아.'
베르제르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때.
쩌어어어엉-!
굉음과 함께 영족의 몸이 멈춰 섰다.
"뭐, 뭐야!"
영족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리고 그때.
빠직!
"커, 커억…!"
커다란 손이 영족의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거구의 손에 붙들린 영족이 켁켁 대며 발을 버둥대기 시작했다.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손아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눈앞의 거구의 얼굴을 확인한 영족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너, 너… 너는…!"
'……?'
영족의 몸이 멈췄다.
그리고 그런 영족을 가로막은 한 남자가 베르제르의 시야에 들어왔다.
"멍청한 놈."
칼제르였다.
"…아저…씨…?"
"내 말을 정말 믿었느냐."
그런 칼제르가 베르제르에게 말했다.
"뭐, 뭐…?"
"될 때까지 하면 된다는 그 말을 믿었느냔 말이다."
"그게 무슨…."
"내가 강한 건 내가 강해서 그랬다, 이 멍청한 녀석아."
그리고는 칼제르가 주먹에 힘을 쥐었다.
빠득!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꺼…어…억…."
영족의 목이 축 늘어졌다.
"이것 봐라, 이 멍청한 자식아. 네가 백날 천날 노력한다고 나만큼 강해지겠는가. 크하하하하!"
칼제르가 호쾌한 웃음과 함께 주저앉은 베르제르를 바라봤다.
"그, 그…."
베르제르가 무언가 입을 열려던 찰나.
"하지만 잘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한강민 그 친구의 발목 정도는 따라갈 수 있겠어."
"……."
베르제르는 칼제르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서는 실망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칼제르로부터 언제 들었는지 생각도 나질 않는 칭찬을 다시 듣게 된 날이었으니까.
***
"…슬슬… 움직여도 괜찮겠군."
먼 곳에서 베르제르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설마 칼제르까지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조금 더 과격하게 움직여도 좋겠어."
영족들의 전쟁 영웅 둘이 사라졌다.
그 말은, 저들의 전력이 크게 약해졌다는 뜻일 테고.
이제 슬슬 영족과 천족, 묘족들도 움직이기 시작할 테니까.
"조금 더 흔들어 줘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