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호… 이것 참 대단하구만. 이건 또 신기하고…. 흐하하!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어!"
영족의 우두머리는 자신 주변에 즐비하게 쌓여있는 빛나는 보석을 뒤적이며 큰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그 앞에서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는 영족 수하들은 그 순간에도 우두머리를 위해 찾아온 빛나는 보석을 바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비스 상부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이 순간.
영족의 우두머리는 태평하게도 수하들이 이곳저곳에서 들고 온 빛나는 보석들을 구경하며 온통 그곳에만 모든 신경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러니 대부분의 영족들은 빛나는 보석, 즉 아티팩트를 모으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자신의 우두머리가 지시한 일이니 다른 생각을 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음... 그런데 말이야."
문득 우두머리가 아티팩트를 손에 쥔 채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영족들을 바라봤다.
"듣기로 요즘 들어 웬 인간 하나랑 마족 꼬마가 날뛰고 있다며?"
"그, 그…."
우두머리의 섬뜩한 한 마디에 영족들이 땀을 뻘뻘 흘려댔다.
"혹시 내가 헛것을 들은 건가? 그런 거야?"
수하들의 대답이 없자 우두머리는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고.
그때.
"사, 사실… 입니다! 최, 최근 들어… 우리의 요새 다섯 개가 넘게 파괴가 되었습…니다! 하, 하지만 크게 염려하실 만한 상황은…!"
"그래? 흐으음…. 이것 참 쥐새끼들이 또 날뛰기 시작한 건가."
불호령이라도 떨어질까 벌벌 떨었지만, 의외로 우두머리는 차분했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영족 몇 명의 머리가 날아가도 나쁘지 않을 상황이건만.
영족 우두머리의 입가에는 아직도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당연히 손에 들린 아트팩트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안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우두머리가 화가 나지 않은 게 아니라는 것을.
그저 '지금'은 관심이 없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절대 안심해서는 안 돼.'
우두머리는 현재 아트팩트에 푹 빠져 있어서 요새 몇 개가 파괴됐다는 사실에 화를 내지 않을 뿐.
언젠가 아티팩트에 흥미가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요새가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에 불같이 날뛰리라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 그때가 되어서라도 요새의 파괴를 막지 못한다면….
'파멸이야.'
영족들의 씨가 말라 버릴지도 모른다.
마족이나 천족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족 우두머리에 의해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영족이 우두머리의 말이 나오기도 전 다급히 소리쳤다.
"바, 반드시… 반드시 인간과 마족을 잡아 대령하겠습니다! 혹시…"
영족은 조심스레 입을 열며 우두머리의 눈치를 살폈다.
"왜. 또 뭐 할 말이 있어?"
"그, 그분들께 도움을…."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한 마디를 꺼낸 영족의 말에.
"아…. 그 녀석들 말이지?"
"그,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 웬만하면 내가 움직일 일은 없게 걔들이 잘 처리하도록 하고. 알겠지?"
"아, 알겠습니다!"
"어, 그래. 고생하고. 나가 봐."
우두머리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아티팩트에 향해 있었고.
아티팩트를 깨부수며 자신에게 새로운 힘을 느끼고 시험해 보기에 바쁠 따름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다급히 몸을 돌린 영족들은 생각했다.
'서둘러야 한다. 반드시 막아야 해. 그리고 그분들이라면… 분명 인간 따위는 어렵지 않게 죽여 버리실 수 있겠지.'
잠시나마 생겨난 시간에 감사하며 그들은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
'훌륭하군.'
영족들은 그야말로 훌륭한 능력치 공급원이었다.
괜히 베르제르가 영족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게 아니었던 모양인지, 영족 하나하나에게서 포식할 수 있는 스탯의 양은 무시할 수 없는 수치였다.
물론 웬만큼 사냥을 한다고 해서 더 이상 내 스탯 수치에 티가 나지 않는다면 그게 문제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이걸로 세 개째.'
베르제르와 헤어지고 난 뒤 며칠 채 걸리지 않아 영족들의 요새 세 개를 완전히 괴멸시켰다.
문제는 아직도 놈들의 요새가 꽤 많이 남아있었고, 이 순간에도 놈들은 바퀴벌레처럼 수를 불려가며 요새를 증축하고 있다는 것 정도다.
'베르제르는 이제 한 개인가.'
베르제르는 지금 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었으니, 그의 움직임 정도는 어렵지 않게 파악해 낼 수 있었다.
베르제르의 속도를 탓할 생각은 없지만… 충분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대로라 확실히 쉽지 않겠군. 아무리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도… 나 혼자로서는 분명 한계도 있을 테고.'
어서 마족과 천족, 묘족들이 움직여 줘야 이 녀석들의 수를 빠르게 줄일 수 있으리라.
'그건 그렇고… 놈들 쪽에서 유난히 조용하군.'
우두머리는 둘째 치고, 고위급 영족의 털끝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우두머리가 있는 곳에 쳐들어가고 싶기도 했지만, 지금 당장 그건 불가능하다.
우두머리 하나만 해도 쉽지 않은 상대일 텐데, 녀석들을 수호한다는 최상급 영족과 수많은 영족들이 나 하나를 노리며 달려든다면….
'위험할 수 있어.'
그래.
조금 무리를 한다면 놈들을 몰살시킬 수 있다는 생각도 충분히 해볼 법하지만.
문제는 그 후 나의 상태.
혹시라도 큰 부상을 당하게 된다면 그 이후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알다시피 나의 목적은 이 어비스 상부에서 영족들과 싸우는 게 아니다.
놈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어비스 상부에 있다는 석탑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
그 내부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무턱대고 행동하며 괜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여유를 부릴 수는 없겠지만… 너무 성급해서도 안 돼.'
내가 어비스 상부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역경과 시련을 해쳐왔던가.
여기까지 와서 나의 계획을 수포로 돌려 버릴 수는 없다.
'한 계단씩,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
그동안 나의 행동에 과감한 면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는 돌다리를 하나씩 두드려 보며 건넌다는 마음으로 확실하게 단계를 밟아 나가야 할 때다.
'하지만 결국 승리하는 건 나다.'
그 사실에 대한 의심 따위는 없다.
늘 그랬듯.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반드시 성공해 내고 말 테니까.
그런데 그때.
"……."
나는 한 곳을 바라봤다.
저 먼 곳에서 무언가 다가오고 있음을 초감각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영족이었다.
하지만, 다른 영족과는 조금 달랐다.
'…재밌군.'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넌다는 마음을 먹은 지 고작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놈들은 다시 내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
"허억… 허억…."
"주군,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아직 그 힘을 다루는 게 익숙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아냐, 괜찮아."
자신을 부축하는 수하를 향해 손을 저으며 베르제르는 숨을 골랐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수하의 말은 틀리지 않다.
새롭게 손에 넣은 이 힘은 지금의 상태로 다룬다는 게 쉽지 않았다.
엄청난 힘이기는 하지만, 한 번 사용하고 나면 온몸에 맥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아저씨는…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했던 거지?'
완전히 갈무리된 마기.
만일 이 힘을 온전하게 다룰 수 있는 경지에만 올라선다면.
그때는 정말 강민, 그리고 칼제르와도 비등하게 싸울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베르제르는 스스로를 그렇게 위로했다.
'정말… 괴물들이었구나.'
그리고 새삼 그런 생각도 들었다.
칼제르와 강민 말이다.
오만한 마음을 온전히 씻어내고, 바라본 강민과 칼제르라는 두 인물이 얼마나 높게 보이는지.
베르제르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주, 주군…!"
"무슨 일이야."
"저, 저기…."
베르제르는 수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거기엔 영족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영족은 지금껏 그들이 상대해 왔던 영족과는 달랐다.
지금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영족의 덩치는 작았다.
하지만.
"미친…."
베르제르는 그 영족을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베르제르가 잘 알고 있는 영족이다.
그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영족을 알고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과거의 전생에서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저 녀석은….'
영족의 전쟁 영웅 중 하나.
우두머리를 옆에서 수호하며 헬라와 칼제르와 맞섰던 영족들의 전쟁 영웅 말이다.
'젠장… 젠장…!'
베르제르는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팔과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이겨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두려움이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안 돼. 정신 차려.'
베르제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너희는 물러나 있어."
"안 됩니다, 주군!"
"싫어요. 같이 싸울 겁니다!"
수하들이 완강히 거부했다.
하지만 베르제르 역시 그들의 뜻을 받아 줄 마음은 없다.
"너희가 있으면… 방해만 될 뿐이다."
"……!"
냉정하다고 느껴질지도 모를 그 한 마디.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영족의 전쟁 영웅 앞에서 베르제르의 수하들은 방해만 될 뿐.
그들이 아무리 힘을 내어 공격을 해 봐야 저 자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기적이리라.
"빨리!"
베르제르가 다시 소리쳤고.
"크윽…!"
수하들은 입술을 잘근 깨문 채 먼 곳으로 벗어났다.
"호오오…."
그 모습을 본 영족이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꼴에 부하를 지키겠다는 건가."
"……."
기분 나쁜 한 마디에 베르제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말을 할 수 없었다.
'무서워.'
이젠 잘 기억도 나지 않은 어린 시절 보았던 저 괴물의 모습만은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저 괴물이 손을 휘두를 때마다 수십, 수백의 천족, 마족의 머리가 잘려 나갔고.
땅을 구르면 땅이 갈라지고 지축이 흔들리곤 했었다.
다시금 입술을 깨문 베르제르는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달라졌어.'
물러설 수 없다.
여기에서 물러섰다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콰콰콰콰콰!
순간 베르제르의 몸에서 다시 마기가 솟구쳤다.
"재미있구나."
그런 베르제르를 보며 영족이 말했다.
"하지만 정해진 미래는 바뀔 리 없다. 너는 내 손에 죽는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게 말하며 영족이 걸음을 움직였다.
'젠장...!'
베르제르는 다시 한번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신이 가진 모든 마기를 이끌어냈다.
'쫄지 마. 이길 수 있어. 아니… 이겨야 돼.'
어쩌면 이것이 베르제르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련일지도 몰랐다.
과거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 버리기 위한 마지막 시험 말이다.
***
빠직!
"커…커어억…."
내 손에 머리가 붙들린 채 바둥거리는 영족 한 명.
그의 얼굴에 나 있는 모든 구멍에서는 역겨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네깟 놈 따위가 나를 어찌해 보겠다고 쫄래쫄래 나타난 게 말이야."
"미, 미… 미친…."
아무리 봐도 영족들 중에서 꽤나 짬 좀 먹은 녀석 같긴 했지만, 놈은 나의 상대가 될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다.
"전략이 잘못됐다. 만약 나를 쓰러트리고 싶었다면, 네가 아니라 너희 우두머리가 나타났어야 했어."
물론 그렇게만 되었다면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겠지만.
지금은 놈들 중 강한 전력 하나를 제거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을 테지.
꽈가각-
나는 놈의 머리를 쥐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파직!
곧 놈의 머리통은 묵사발이 난 채 허공에서 터져 버렸다.
그와 함께 스탯 포식 메시지가 쏟아져 내렸다.
꽤 훌륭한 스탯이었지만, 역시 큰 감흥은 없었다.
'싱겁군.'
그보다….
나는 한 곳을 바라봤다.
베르제르가 있는 그곳에서 역시 한참 싸움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우선 지켜보는 게 낫겠어.'
여차하면 끼어들겠지만.
베르제르가 혼자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한 번 지켜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