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보여줄 거야.'
베르제르는 주먹을 쥐고 자신의 마기를 일깨웠다.
파지짓!
그의 손에서부터 전신으로 마기가 전류처럼 타고 흐르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그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잖아.'
오래 전 벌어진 그 전쟁에서 끔찍한 기억을 품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때는 어린 시절이었으니 베르제르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영족의 모습은 끔찍한 살육자들일 뿐이었다.
자신의 부모와 수많은 친구들이 영족들의 공격에 사망했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런 순간에 나타난 게 바로 칼제르.
마족들 사이에서 이름도 없던 칼제르는 수많은 영족들을 쳐부수고, 기어코 영족의 우두머리에게 큰 상처를 입히며 사실상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그런 칼제르가 어린 베르제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해지고 싶으냐.'
그 한 마디에 베르제르는 완전히 매혹되었다.
강해지고 싶다.
강해져서 영족들에게 복수하고 싶다.
그렇게 칼제르의 아래에서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베르제르는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자신을 따르는 수하도 생겼고, 어느새 마계에서 칼제르 말고는 당할 자가 없을 만큼이나 강해졌다.
그럴수록 베르제르는 오만해졌다.
자신의 실력에 대해 과신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이 일어나고 수백 년이 지났고,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마계에서도 모두가 자신 아래에서 자신을 추앙하고 있는데.
마치 절대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보다 강한 유일한 존재인 칼제르마저도 날이 갈수록 힘이 떨어진다고 투덜대고 있으니.
이대로 시간만 조금 더 흘러 준다면, 정말로 자신이 마계의 절대자가 될 수 있으리라고.
아니, 어쩌면 우주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때 모든 게 바뀌었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마계가 아닌 다른 세계였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영문도 모르던 때.
'저 녀석이 나타났고.'
한강민.
고작 한 명의 인간이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인간은 강했다.
터무니없이.
오만했던 베르제르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릴 정도로.
하지만 문제는 강민의 존재 하나가 아니었다.
영족과 천족.
그들이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베르제르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꿈틀댔다.
영족의 존재는 오랜 시간 속에서 무뎌진 트라우마를 일깨우는 트리거가 되었다.
두려웠다.
강해졌다고 생각했고, 정말로 강해졌지만.
베르제르 마음속의 어린아이는 아직도 그들을 두려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베르제르는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정말로 어린아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래서는 안 돼.'
칼제르의 말마따나, 자신은 언젠가 마족들을 이끌어야 할 존재로 성장해 버렸으니.
이렇게 투정이나 부리고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 아닌가!
'지금부터.'
달라져야 한다.
그 옛날의 공포 따위 집어 던지고.
더 강해져야 한다.
칼제르를 넘어설 정도로.
저 강민이라는 막돼먹은 인간을 넘어설 정도로!
'나는 마족의 정상에 선 남자.'
콰콰콰콰콰!
베르제르의 몸에서 마기가 치솟으며 베르제르의 몸이 더욱더 크게 부풀었다.
그의 눈이 붉게 물들며, 등에서는 날개가 솟구쳤고.
"마, 마족이다!"
"죽여버려!"
"살려둬서는 안 돼!"
영족들이 베르제르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베르제르는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번쩍!
그의 손에서 마기가 응축된 빛이 한 번 번쩍임과 동시에 영족들이 사라졌다.
재조차 남기지 못한 채 증발해 버린 것이다.
"가, 강하다!"
"상급 마족인가? 아니면... 최상급?! 젠장!"
한 순간 펼쳐진 모습에 영족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베르제르는 다시 손을 뻗어 마기를 발산했고, 다시 영족들이 사라졌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내가 왜 저런 것들을 무서워했던 거지?'
그렇지 않은가.
손짓 한 번에 사라질 정도로 나약한 영족들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강력한 영족들을 손짓 한 번으로 증발시킬 만큼 베르제르가 강해졌다는 표현이 적절하겠지만….
'어이가 없군.'
웃음이 나왔다.
자신은 강하다.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분명히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정작 자신은 영족을 무서워하고 있었으니까.
왜?
정말로 자신이 강하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다면 영족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을 텐데.
'…아직도 나를 의심하고 있었던 거겠지.'
아직까지도.
과거의 자신.
마음속에서 울고 있던.
나약했던 시절의 베르제르의 기억에 갇혀 있었음을 인정하게 된 순간이다.
그랬다.
자신이 두려워한 건, 영족이 아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내가 두려워했던 건 약했던 나였을지도.'
강해졌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그게 착각이었음을 이 순간에야 깨달았다.
자신이 오만했던 것은 나약했던 시절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가면이었을 뿐.
그러니 더 스스로의 힘을 뽐내고 오만해져야 했다.
나약한 내면을 가리고, 또 가리기 위해서.
'어이가 없지만….'
이 모든 게 강민 덕분이라는 것은 베르제르 역시 알고 있다.
칼제르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강자.
하지만 강민이라는 새로운 강자의 등장에 베르제르는 스스로에 대해서 곱씹고 또 곱씹을 수 있었고.
그러면서 자신이 미처 몰랐던 스스로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때였다.
데에에엥-!
머릿속에서 마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순간 언젠가 칼제르가 했던 말 한마디가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 네가 스스로 세워 놓은 벽을 넘을 때, 너는 비로소 나를 뛰어넘을 만큼 강해질 수 있을 게다.'
칼제르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건.
베르제르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
고오오오!
베르제르의 몸에서 폭풍처럼 솟구치던 마기가 갈무리되기 시작했다.
질서없이 혼란하던 마기들은 차분하게 베르제르를 감쌌으며, 그의 피부 위로 밀착되기 시작했다.
'…….'
베르제르는 변화한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
베르제르는 자신이 칼제르가 말했던 그 벽을 허물고 새로운 단계로 도약했음을.
베르제르는 저 앞에 있는 영족들을 바라봤다.
가만히 서 있는 베르제르를 두고서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잔뜩 겁에 질려 있는 영족들.
'…한강민….'
그 이름을 짧게 되뇐 순간.
베르제르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고.
번쩍!
섬광이 잠시 세상을 가리웠다.
***
잠시 섬광이 일어난 뒤.
"……."
나는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보며 잠시나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빛과 함께 영족 녀석들의 모든 게 사라졌다.
영족은 당연하고, 그들이 공들여 만들어 놓은 요새마저도.
'대체 무슨 일이….'
지금 저기 있는 게 내가 알던 베르제르가 맞는 건가 싶을 정도다.
베르제르는 자신이 해낸 일에도 불구하고 담담한 표정으로 우리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던 어린아이 같은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새로운 인간… 아니, 마족이 되었다는 건가.'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 혼자 느끼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주, 주군…."
"주군께서…."
"저건… 칼제르님의…."
달라진 베르제르의 모습을 보며 어쩔 줄 모르는 베르제르의 수하들.
그리고 그들의 말대로 베르제르는 달라졌다.
저 모습은 마치 칼제르의 모습과도 비슷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그렇지? 주군께서… 이제 정말 새로운 경지에 올라 선 거 아니냐고!"
"맙소사… 맙소사…!"
정말로 베르제르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난 듯이 보였으니.
그 순간에도 베르제르는 말없이 우리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베르제르는 곧 다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칭얼대거나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큰소리치며 떠들지 않았다.
다만 조금 머쓱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대단하군."
나는 그런 베르제르를 향해 격려를 던졌다.
원래 같았으면 또 한 번 봤지? 잘했지, 라거나.
흥, 쳇, 같은 반응이 터져 나올 법도 했지만 베르제르는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에.
"고마워."
"……!"
고맙다니.
오히려 저 말을 듣고 내가 흠칫 놀랐다.
"네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 거라고 생각은 못 했는데."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온몸에 닭살이 돋는 건 기분 탓일까.
베르제르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고 나니 낯뜨거운 기분도 들었다.
괜히 무게를 잡는 것 같은 베르제르의 모습이 낯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베르제르가 더 강해졌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 공을 나에게 돌리려는 베르제르가 기특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나에게 고마워할 이유는 없지."
"끝까지 재수 없기는."
베르제르가 피식 웃었다.
그제야 내가 알던 베르제르의 모습이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베르제르는 확실히 이전처럼 가벼운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사춘기를 지나 철이 든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여러모로 나에게 묘한 감정을 들게 하는 녀석인 것은 틀림없다.
"어쨌든… 이걸로 선전 포고는 된 셈인 것 같군."
"그래. 이 정도로 해 놨으면 영족에서도 가만있지는 않을 거야."
"그렇겠지."
나는 저 먼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근방에는 꽤 많은 영족들의 요새가 즐비해 있었다.
이들은 분명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고 우리가 주둔한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이 근방을 중심으로 영역을 확장해 가고 있었겠지.
"그러면 잠시 떨어져도 괜찮겠군."
내가 베르제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흠칫 놀라는 베르제르.
"내가 지금 너에게 해줄 만한 건 다 해준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그, 그건 그렇지만…."
"내가 너의 보호자도 아니고 너를 계속 데리고 다닐 의무는 없을 테니… 잠시 떨어져서 각자 할 일을 하는 편이 효율적이지 않겠나."
베르제르의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스쳐 갔다.
이것 참.
내가 정말 베르제르의 보호자가 된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내.
"……."
베르제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할 일이라면… 그게 뭔데?"
"뭐겠나. 놈들의 요새를 하나씩 격파하는 거지."
"아…!"
"녀석들의 요새의 수가 늘어날수록 영족들의 수는 끝없이 불어날 테니, 최대한 빠르게 그 수를 줄이는 게 앞으로 우리에게 더 이로울 테지."
"맞는 말이야."
베르제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제르도 이제 영족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씻어낸 듯하니.
나도 족쇄를 풀고 마음대로 날뛸 시간이 됐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몸을 돌리기 전, 나는 베르제르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다시 한번 검을 부딪쳐 줄 생각은 있다."
솔직히 지금 베르제르의 실력이 어느 정도가 되었는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으니.
그런 내 떡밥을.
"조, 좋아!"
베르제르가 덥석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