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산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거대한 산이었으니까.
물론 그에 따른 피해는 일절 없었다.
말이 없어도 해츨링은 스스로 보호 마법을 펼쳐서 떨어지는 산의 파편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했기 때문이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하면 좋겠군."
나는 베르제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이 정도 산을 일격으로 부술 때까지 앞으로 대련은 없던 걸로 하지."
역시나 귀찮아서.
그리고 베르제르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그, 그게… 그게 무슨 개소리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베르제르.
하지만 나 역시 변명할 거리는 충분하다.
"이 정도도 되지 않는데 나와 싸움을 해서 무엇 하겠나. 서로에게 번거로울 따름이야. 만약 네가 이 정도 산을 일격에 부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다면 충분히 상대해 주지."
"으… 으으으…!"
내 변명에 베르제르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럴듯한 변명인지는 모르겠다만, 베르제르에게 나름의 목표를 정해 준 셈이었으니.
"기, 기다려! 내가… 반드시 보여 줄 테니까!"
베르제르 역시 각오를 다지고 있는 모양.
나는 속으로 당분간 귀찮은 일이 없게 되었음을 감사하며 이 순간에도 무너져 내리는 산을 바라봤다.
그리고 저 산 깊은 곳에서 얼핏 빛을 뿜어내는 무언가를 발견했으니.
'아티팩트다.'
나는 저 빛나는 물체가 아티팩트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무너지는 산과 함께 속수무책으로 떨어져 내리는 아티팩트는 어느새 무너져 내린 산의 잔해에 완전히 깔려 버렸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나는 아티팩트의 옵션을 확인해 낼 수 있었다.
그 옵션은 내 예상만큼이나 괜찮은 옵션이었다.
특히나 앞으로 벌어지게 될 싸움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유용하리라고 생각되는 아티팩트.
쿠우웅!
어느덧 마지막 파편마저 땅으로 굴러 떨어진 뒤.
"그럼 다시 발굴 작업을 시작해야겠어."
나는 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아티팩트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고, 바위산의 파편들이 워낙 거대한 덕에 중간중간에 커다란 구멍들이 파여 있었다.
마치 바위 동굴처럼 그 내부에는 사람이 충분히 드나들 만큼의 공간이 확보되어 있었고.
간혹 걸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공간이 바닥에 있기라도 하면 해츨링의 마법을 통해 다리를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우리는 조금씩 나아가며 아티팩트가 있는 곳을 향했다.
그러다가 간혹 바위에 의해서 길이 막혀 있기라도 하면.
"내, 내가 부술 거야!"
베르제르가 앞장서서 바위를 부수겠다며 나서기 일쑤였다.
쿠우웅!
베르제르 역시 내가 처음 했던 대로 주먹으로 바위를 부수는 연습을 시작했다.
아이의 모습으로도 곧잘 바위를 부수고 있는 베르제르의 모습을 보며 억지로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바위산 내부로 걸어 들어갔을 무렵.
"여기군."
커다란 바위 너머에서 아티팩트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 내가…!"
다시 베르제르가 앞으로 나섰지만, 나는 그를 가로 막았다.
"아니. 이건 내가 한다."
스릉-
그리고 검을 뽑아 들었다.
괜히 여기까지 왔는데 마구잡이로 바위를 부쉈다가 아티팩트의 위치가 흩어지기라도 한다면 다시 귀찮아질 테니까.
오러를 슬쩍 흘려보내며 바위를 향해 꽂아 넣었다.
서걱!
오러는 바위를 마치 두부 썰어내듯 부드럽게 내가 원하는 모양대로 도려내기 시작했고.
나는 내가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적당하게 바위를 잘라내었다.
나는 도려낸 바위를 천천히 밀어냈다.
카가각!
굉음과 함께 잘려낸 바위가 밀려나가기 시작했고.
이 너머에 있는 아티팩트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바위를 밀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잠시.
쿠우웅!
바위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지금.
'좋군.'
나는 아티팩트 하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아티팩트 - 지진]
>일시적으로 큰 지진을 일으켜 광범위한 피해를 가할 수 있다.
>지진의 공격력은 힘 스탯에 영향을 받는다.
지진이라는 아티팩트.
그리고 그 효과는 적혀 있는 많은 대상을 공격할 수 있는 효과.
지금 내게 범위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스킬은 충격파나 지휘관의 외침 정도가 고작.
그것들 역시도 나쁘지 않은 능력이나, 문제는 범위다.
지휘관의 외침은 최대 150마리, 혹은 명의 적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능력이지만 앞으로 영족과의 싸움이 벌어지게 될 양상을 파악해 본다면 150이라는 제한 숫자는 한정적일 수 있다.
'영족들의 숫자가 꽤 많다는 게 문제지.'
지금 어비스 곳곳에서 모여들고 있는 천족과 마족들의 숫자만 하더라도 150이라는 숫자는 한참이나 부족한 수.
'게다가 천족과 마족이 하늘을 날 수 있지만 영족은 오직 땅 위를 걸어야만 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영족과의 싸움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아티팩트라고 할 수 있으리라.
'운이 좋았어.'
마침 손에 넣은 아티팩트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그런데 이거….'
내가 막 손에 넣은 아티팩트에서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건가.'
이 아티팩트에서 느껴지는 힘은 바로 사념의 힘.
'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사념의 힘이 그리 짙지는 않아. 몇 개 정도는 사용해도 되겠어. 하지만 그 수가 많아진다면… 좋지 않겠는데.'
말 그대로다.
어비스 상부라서 그런지 아티팩트에는 사념이 묻어 있었다.
만약 욕심을 내어 이 아티팩트를 과도하게 사용했다간 부작용이 뒤따르게 되리라.
'경고해 둬야겠군.'
영족과 마족이 아티팩트를 수집하되, 그 수가 너무 많지 않도록 말이다.
'어쨌든 결과는 나쁘지 않았어.'
"그럼… 가자. 곧바로 가볼 곳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멀지 않은 곳에 '그 녀석'들이 있다.
영족도 마족도, 천족도 아닌.
이곳의 그 누구도 정체를 알지 못하는 낯선 종족들 말이다.
***
콰콰콰쾅!
두 남녀가 사방을 종횡하며 어디선가 나타난 영족들을 공격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너무도 잽싸서 움직임이 둔한 영족들이 감히 따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으으으아아!"
콰아앙!
"제엔자아아앙!"
쿠우우웅!
영족들은 화가 났는지 사방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괴성을 내지를 뿐이었다.
그들이 흥분할수록, 두 남녀는 더욱더 속도를 높이며 영족들의 몸에 상처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공격이 영족들을 쓰러트릴 정도로 강력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하나 더하자면 그들은 이미 지쳐있는 상태라는 것.
멀쩡한 상황이었다면 영족 몇 명을 처치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보금자리를 찾지 못해 기척을 감추며 버텨오기를 꽤 오랜 시간.
크게 지쳐있던 상황에서 영족들의 공격은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이대로는 안 돼!"
"젠장! 여기에서 이 녀석들을 만날 줄이야!"
그들은 영족들과 먼 곳에 떨어진 채로 거칠게 숨을 내쉬며 잠시 상황을 살폈다.
총 열 명의 영족 중, 남은 건 셋.
벌써 일곱이나 처치했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남은 셋이 열 명 중에서도 우두머리 격에 속하는 것 같다는 점.
"저 셋을 처치할 수 있겠어?"
"해 봐야지. 우리 동족들은 모두 지켜 있어.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돼."
"흐으응…. 젠장!"
여자가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어쩔 수 없지."
카앙!
그렇게 말하며 손에서 손톱을 길게 뽑아냈다.
"한번 불태워 보자고. 해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
"그런 말 하지 말아라. 우리 묘족들 모두가 너 하나를 보고 있으니까."
"말이라도 고맙네. 흐응…."
여자는 콧소리를 내며 영족들을 바라봤다.
"쥐새끼 같은 것들…. 잘도 우리를 귀찮게 했겠다."
"머리통을 뽑아주마."
"아니야. 팔과 다리를 뜯어내 버리는 게 좋겠어."
영족들은 끔찍한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내뱉었다.
그 말을 들으며 두 묘족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잠시 지어 보였을 뿐.
"갈까?"
"그래."
그들이 서로를 보며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아가려던 그때.
파직!
콰아아앙!
순식간에 세 명의 영족이 사라졌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 영족 셋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
"무, 무슨…."
묘족들은 눈을 부릅뜬 채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누, 누구야!"
"이런 젠장!"
영족이 사라졌다는 기쁨 따위는 느낄 틈도 없었다.
자신들이 애를 먹고 있던 영족이 없어졌다는 것.
영족들보다.
그리고 자신들보다도 훨씬 더 강한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그 존재가 자신들마저도 저렇게 짓눌러 버릴지 모른다는 것.
그때였다.
"걱정 마라."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고, 고마워."
"아까는… 오해를 했었다."
묘족이라는 이들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난 뒤, 그들은 우리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물론 나 역시도 그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냈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적어도 묘족들은 영족과 붙어먹을 종족이 아니라는 것.
물론 그들의 경계를 허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묘족들은 경계심이 강한 종족들이었다.
외모만이 고양이처럼 생긴 건 아닌 모양인지, 여러모로 고양이를 생각나게 하는 행동들도 꽤 많이 보이고 있었으니.
생각보다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종족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저들에게 선택권이 있는 건 아니지.'
어쨌거나 이 관계의 우선권을 지닌 건 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더 강하니까.
저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테고, 애초에 나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짐작했을 터.
그런 상황에서 내가 공격하지 않고 호의적으로 나오는 걸 보며 저들도 안심을 했을 테지.
"어쨌거나… 우리 역시 영족이라는 녀석들의 공격 때문에 골치가 아팠던 차였는데 그렇게 이야기해 주니 마음이 놓이네."
묘족 여자가 말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꽤 걱정을 했었지."
"걱정…? 네가…?"
여자가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혹시라도 너희가 영족 편으로 붙어 버릴까 봐 말이지."
"그럴 리가! 절대! 저렇게 냄새나는 놈들이랑 어떻게?!"
묘족 여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마 저 여자는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저 말을 들은 순간 머리에서 번쩍, 하고 좋은 생각이 하나 스쳐 지나갔다.
냄새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묘족 여자에게 물었다.
"냄새? 저들에게서 냄새가 나나?"
"응? 그래. 아주 더러운 악취가 나. 물론 너희한테서도 마찬가지지만… 그 녀석들하고는 비할 게 아니야."
여자는 허공에 킁킁대는 시늉을 하고,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과도한 액션을 취해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그게 뭐?"
"너희가 해 줘야 할 게 하나 있다."
묘족을 처음 만나고 저들을 직접 보며 판단하기로 저들의 전투력은 쓸모가 없다.
영족과의 싸움에서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처참하다.
'하지만… 저 정도의 후각이라면….'
탐지용 레이더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리라.
마족, 천족과 함께 다니며 주변에 얼쩡거리는 영족 녀석들을 미리 파악하는 역할 말이다.
"해줘야 할 일…?"
"그래. 너희가 정말 영족 녀석들과 손을 잡을 생각이 아니라면, 이곳 어비스에서 영족의 씨를 말리기 위한 싸움에 동참해 주어야겠어."
"……."
두 사람의 얼굴에서 순간 갈등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건대 저들에게 선택지 따위는 없다.
내 손을 잡고 목숨을 부지하느냐, 거절하고 지금과 같은 삶을 이어가느냐 뿐.
"물론 너희가 내 제안을 수락한다면 너희들이 원하는 보금자리 따위는 충분히 제공할 수 있다."
역시 받는 게 있으면 응당 그에 따른 보상도 있어야 하겠지.
"그, 그게 정말이야?"
내가 던진 당근에 두 묘족의 얼굴이 밝아졌다.
"물론이다. 이 녀석이 충분히 해줄 수 있을 거야."
나는 해츨링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저들이 원하는 것은 '숲'이라고 했으니.
해츨링의 마법이라면 묘족들이 살아갈 숲 따위는 충분히 만들어 줄 수 있을 테니까.
"어때.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