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쿠쿠쿠쿠쿵!
'하…!'
전율이 돋았다.
강하다.
믿을 수 없이 강하다.
그 사실에 전율이 일고 또 일었다.
내가 놀라고 있는 건, 칼제르의 강함이 아니었다.
내가 이토록 전율에 휩싸이게 만드는 강함의 주체는 칼제르가 아니라 바로.
'나.'
재수 없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강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알고 있었지만, 이 순간에 나의 강함은 또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해 올라섰다.
'에인션트 드래곤과 다시 붙어 보지 못했던 회한을 지금 풀어낼 수 있게 되었다.'
에인션트 드래곤 앞에서 허무하리만치 쉽게 무너졌던 그 때의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칼제르와 함께 검을 맞대며 나는 다시 증명해 낼 수 있었으니.
콰아아앙!
나와 칼제르의 검이 부딪친 순간.
"크으…!"
칼제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봤다.
방금의 일격으로 나의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지만, 충격을 받은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스윽-
칼제르는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하! 어이가 없군…!"
칼제르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퉤-!
칼제르는 그렇게 한 마디를 남기고선 입 안에 고여 있는 피를 뱉어냈다.
뚜둑- 뚜두둑-!
칼제르가 팔을 돌리며 관절을 풀어냈다.
그리고 다시.
툭- 툭-
바닥을 구르며 몸을 튕기기 시작했다.
"사과하지."
칼제르가 말했다.
"내가 그대를 너무 얕보았던 모양이야."
"그런가."
"어찌 인간의 몸으로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쿵! 쿵! 쿵!
칼제르의 발 구름이 더욱더 거세졌다.
"그대도 보았겠지. 베르제르 녀석에게도 두 가지 모습이 있었다는 것을."
"물론이다."
몸을 풀며, 다시 발을 구르며 말을 이어가는 칼제르.
그와 함께.
뚜둑- 뚜두둑!
칼제르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피부는 더 검붉게 물들었고, 눈은 더 붉게 물들었다.
이마의 뿔은 더 길게 뻗어 나왔고, 등에서는 날개가 꿈틀대며 솟아났다.
그렇지 않아도 흉측하리만치 괴팍하던 전신의 근육은 더 크게 부풀어 올랐으며.
푸시식-
그의 몸에서 증기마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위압감 넘치는 모습.
그 앞에 서 있다면 당장에라도 온몸이 짓눌릴 것만 같은 흉흉한 기세가 나의 전신을 감쌌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 그렇게 나와 줘야지.'
부족하다.
아직도 부족하다.
더 강한 상대가 필요하다.
내가 더 강해지기 위해서.
아직도 내가 모를 부족한 부분을 채워내고, 채워내어 더 완벽한 강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콰아아-!
켈제르가 날개를 펼침과 동시에 강렬한 마기가 하늘 위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베르제르가 성인의 모습으로 변했을 때와는 감히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광폭한 힘!
'아아…!'
그 모습에 나는 다시 전율을 느끼며 검을 고쳐 잡았다.
두근! 두근!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공포감'이 밀려온다.
'두렵다.'
저자의 검에 나의 검이 부딪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나의 몸은 무사할까.
내가 들고 있는 이 검은 멀쩡할까.
이제야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두려움으로 멈추지 않았다.
환희와 희열.
내가 압도적인 공포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그 사실이 나에게 상반되는 감정을 선사했다.
'또 한 번 오를 곳이 남아 있다는 건.'
나에게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뜻.
'강해질 수 있다.'
나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내 앞에 또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그 사실 만으로도.
'나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
콰아아아!
오러가 더욱더 길고, 강하게.
그리고 응축되고 응축되며 검 위로 솟구쳤다.
2미터, 3미터를 넘어 더욱더 길게 뻗어 나온 오러는.
치지직!
칼제르의 마기와 충돌하며 공간을 뒤틀기 시작했으니.
"와라!"
칼제르가 소리쳤고.
콰아아앙!
나는 도약했다.
번쩍!
칼제르의 검 위에서 맹렬한 빛이 솟구쳤다.
찰나의 순간 나의 시야를 뒤덮은 칼제르의 빛.
나의 시야는 온전히 저 빛에 가로막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다.
이미 놈의 모든 것을 느끼고 있으니까.
그 순간.
키릭! 키리리릭!
쿠오오오!
저주받은 홉 고블린의 외침과 지배자의 권능을 활용했다.
나의 모든 것을 꺼내어 칼제르와 맞설 생각이다.
내가 가진 모든 스킬, 모든 기술, 모든 능력치.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서 저 칼제르와 맞설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알량한 자존심 따위를 부렸다가는 내 뼛조각 하나도 남아나질 않을 게 뻔하니까.
콰아아앙!
칼제르와 나의 검이 충돌한 순간, 어비스 상부를 찢어발길 듯한 폭풍이 일어났다.
"꺄아아아악!"
"미, 미친놈들아아아아!"
어디선가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저 칼제르를 무릎 꿇게 만들겠다는 그 일념 하나로 몸을 움직였고.
키리리릭!
쿠오오오!
소환체들이 칼제르를 향해 움직였다.
그들 역시도 평범한 몬스터 따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의 스탯이 증가할수록, 녀석들이 강해지는 건 당연지사.
그뿐 아니다.
용검술의 묘리를 통해 그들에게도 나의 오러를 나누어 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성가신!"
칼제르의 고함과 함께.
콰콰콰쾅!
소환체들이 저 먼 곳으로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하지만.
키리리릭!
쿠오오오!
놈들은 단 한마리도 숨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눈에 불을 켜고 전방위에서 칼제르를 압박하기 위해 달려들었으니.
휘릭!
칼제르의 신경이 분산된 틈을 노려 그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파직!
내 검이 칼제르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칼제르의 몸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처음으로 그의 몸에 검으로 상처를 낸 순간이었으니.
"…이노옴…!"
칼제르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와라."
칼제르를 보며 내가 말했다.
"나를 더 즐겁게 해 다오."
나의 욕망은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쿠우웅! 쿠우웅! 쿠쿠쿠쿵!
몇 번이나 나와 칼제르의 검이 부딪쳤고, 그 때마다 거센 폭풍이 일어났다.
어느새 우리 주변에 원래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거센 싸움은 끝없이 이어졌고.
몰른과 해츨링, 그리고 다른 마족들도 저 먼 곳으로 달아날 정도였지만.
"흐흐흐흐…!"
칼제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군."
나도 마찬가지였다.
***
"저, 저…."
"저거… 칼제르님의…."
"그래, 맞아! 칼제르님의 기운이야!"
그 무렵, 어비스 상부 전역에 흩어져 있던 마족들은 칼제르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칼제르의 기운을 알아채지 못할 리도 없었을 뿐더러.
"이, 이렇게… 자신의 기운을 흘려보내는 건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닐까!"
"부, 분명해! 칼제르님은 언제나 그러셨지. 베르제르님을 타박하시는 듯하면서도… 언제나 베르제르님을 위해 먼저 나서셨으니까!"
마족들은 생각했다.
분명 칼제르가 베르제르에게 직접 자신들을 소집하라고 말을 했을 테지만.
베르제르를 아끼는 마음으로 자신이 직접 솔선수범하여 자신들을 불러 모으기로 다짐했으리라고.
"역시 칼제르님은…!"
"우리 마족들의 우상!"
"72대악마가 모조리 사라져 버린 지금, 우리가 믿고 의지할 것은 오직 칼제르님뿐이지!"
마족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칼제르를 칭송했다.
마계에서 벌어진 오랜 전쟁 가운데에서 72대악마는 모조리 사라졌고.
그 한 가운데에서 전쟁 영웅으로 모든 마족들을 결집시킨 것이 바로 칼제르였으니.
그들의 그런 존경심은 결코 이유 없는 존경심이 아니었다.
"가자…!"
그렇게 마족들은 하나 둘씩 칼제르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결코 순탄한 길은 아니다.
어비스 상부라는 낯선 환경도 물론이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도중 필연적으로 천족과 영족들과 조우하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칼제르가 자신들을 부르고 있다!
칼제르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 라는 그 일념 하나로 그들은 모든 역경을 뚫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어비스 상부가 도대체 얼마나 넓은 공간인지, 가도 가도 끝이 나질 않았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아니,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세계가 바로 어비스 상부였지만.
정말 오랜 시간동안 계속해서 저 먼 곳에 있을 칼제르를 향해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던 중, 문득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가까워질수록… 저곳에 있는 낯선 기운이 느껴져."
"그래. 그런데 대체 누구의 기운이지…?"
그들의 의문은 바로 그것이다.
칼제르의 기운과 뒤엉켜 있는 낯선 기운.
문제는 두 개의 기운이 씹어 먹을 듯이 폭발적으로 뒤엉켜 있다는 것.
"이건 마치…."
"싸우는 것 같아…."
그리고 다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부르는 게 아니라…!"
"칼제르님이 누군가와 싸우고 있는 게 아닐까?"
"그, 그런!"
큰일이다.
칼제르가 자신들의 등대가 되어주고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싸우고 있다면…!
"서, 설마 천족이나 영족의 우두머리와…!"
"제, 젠장!"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렇게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다.
칼제르가 대신하여 적의 우두머리와 싸우고 있는데 자신들이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들은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칼제르를 도와줘야 한다.
비록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마계의 전쟁 영웅인 칼제르를 위해 목숨 따위는 언제든지 버릴 각오가 되어 있으니까.
속도를 높이고, 더 속도를 높이며 달려가기를 오랜 시간.
그들은 결국 칼제르의 기운이 느껴지는.
아니, 느껴졌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느새 칼제르의 기운이 사라진 지는 꽤 오랜 시간이 되었다.
그 사실이 그들을 더욱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설사 칼제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하지만 그건 그들의 착각이었다.
이미 마족들이 도착한 곳에는, 수많은 마족들이 모여 있었고.
칼제르는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었다.
칼제르의 옆에는 당연히 베르제르가 뚱한 표정을 한 채로 앉아 있었으며, 그 뒤에는 베르제르의 수하 넷… 아니, 세 명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런데…."
문득 마족 한 명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저건… 누구…?"
칼제르의 옆에 서 있는 한 명의….
"이, 인간…?"
분명히 인간이다.
하지만 도대체.
아니, 어떻게 인간 따위가 칼제르의 옆에 서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마족들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상황들의 연속.
게다가 칼제르의 몸에 나 있는 무수한 상처들은 그들의 혼란을 더욱더 가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때였다.
"끄응…."
칼제르가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수백도 넘게 모여든 마족들의 시선이 칼제르에게로 일제히 향했으니.
"많이들 모였군. 내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다들 용케도 나를 찾아왔어."
칼제르가 태연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모여든 마족들을 쭈욱 둘러봤다.
"다들 고생 많았다. 그리고…."
칼제르는 자신의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이자를 소개하겠네."
"……?"
마족들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칼제르와 남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결국, 칼제르의 입에서 한 마디가 흘러나왔으니.
"우리 마족을 승리로 이끌 영웅이 등장했다네."
영웅?
영웅이라니?
고작 인간 따위가 어떻게?
그보다.
칼제르야말로 마계의 전쟁 영웅이건만.
대체 왜 인간 따위가 영웅이 되어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다음 한 마디에 모든 마족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자와의 싸움에서 나는 결국 패배를 시인했으니… 이자야말로 우리 마계의 새로운 영웅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으하하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