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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창이 달라졌다-247화 (247/277)

247화

스릉-

내가 검을 슬쩍 꺼내든 그 순간.

"머, 멈춰! 제발 멈춰!"

꼬마 녀석이 다급히 소리쳤다.

"……."

"부탁할 게. 제발 아저씨 앞에서 검을 함부로 꺼내지 마! 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나를 위해서라고 말은 했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신변의 위협 때문에 하는 말 같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선은 저 말을 듣는 게 나에게로 낫겠다는 판단을 한 뒤.

철컥-

다시 검을 집어 넣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으로 날아오고 있는 무시무시한 기세는 나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였다.

'에인션트 드래곤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

이 한 문장으로 '아저씨'라는 자의 힘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리라.

그만큼 지금의 나로서도 쉽사리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임은 틀림이 없었다.

'뭐... 마계 대왕이라도 된다는 건가.'

아직 그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정황들로 미루어 보건대, 그렇게 틀린 추측은 아닐 것 같았으니.

쿠우우우웅!

어느샌가 코앞으로 다가온 한 남자가 굉음과 함께 땅에 착지했다.

구르르릉!

착지를 한 것뿐인데도 지축이 흔들릴 것처럼 땅이 요동쳤다.

쩌저저적!

땅이 갈라지고 갈라진 틈새에서는 용암이 솟구쳐 올랐다.

그 순간.

"베르제르으으으-!"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포효와 함께, 한 남자가 베르제르라는 이름을 불렀다.

저 꼬마의 이름이라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추측해 낼 수 있었고.

"아, 아저… 아저씨…!"

베르제르가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눈앞의 노인을 바라봤다.

'아저씨라고 하기엔… 할아버지 쪽이 가까워 보이긴 하지만.'

그런 호칭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겠지.

찌릿!

노인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감정은….

'복잡하군.'

말 그대로였다.

적대감과 호기심, 경멸과 가엾음.

상반되는 감정들이 뒤엉킨 저 시선을 마주하기란 나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살기는 없다.'

속으로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베르제르의 충고를 듣지 않고 검을 들고서 내가 살기를 풀풀 흘려 보냈으면, 지금쯤 쉽지 않은 싸움을 시작하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내가 처참하게 져 버릴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에인션트 드래곤과 비등한 힘을 가진 것으로 추측되는 존재긴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적어도 상대에게 치명상 정도는 입힐 자신이 있다.

'못 이길 것도 없겠지.'

에인션트 드래곤을 만나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저 자의 목숨을 취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만큼 강해졌다고 자부할 수 있다.

"어찌 된 일이냐, 베르제르."

그런 나의 복잡한 생각들은 관심도 없다는 듯, 노인이 베르제르에게 말했다.

"예, 예…?"

베르제르는 역시 잔뜩 겁먹은 채로 되물었고.

"네가 어찌 인간을 네 하수인으로 두고 있느냐는 말이야. 그리고 저 도마뱀은 애완동물인 게냐."

"아, 그, 그…."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물음에 베르제르와 세 명의 마족은 크게 당황했다.

물론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나를 베르제르의 수하 따위로 생각하고 있다니.

'저 정도라면 내가 베르제르보다 강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을 텐데?'

하지만 질문은 아직.

나는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얘기 좀 들어 봐요!"

노인을 향한 베르제르의 알량한 발악(?)과 함께.

"껄껄껄!"

노인은 귀여운 손자를 보는 듯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말해 보아라. 대체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말이야!"

"휴우…."

베르제르는 짧은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

"그리 된 게로군."

베르제르의 설명이 끝난 뒤, 노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제 불호령이 떨어지고 나를 향한 공격이 시작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최대한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장한 일을 해내었군."

노인은 나를 향해 저런 격려의 말을 건네주고 있었다.

"……."

그나저나 장한 일이라니.

"저 녀석이 아직 어린 나머지 제 힘만 믿고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날뛰기에 언제 한 번 꽉 밟힐 거라고 생각했거늘… 그게 오늘이 되었을 줄이야! 헛헛헛!"

"…꽤 아끼는 녀석인 것 같은데."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베르제르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고.

노인의 반응에 나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아끼지. 저 녀석은 마계에서도 내가 가장 아끼던 녀석이야! 허나 도통 내 말을 들어 먹어야 말이지! 마계에서는 그 누구도 저 녀석에게 혼꾸멍을 내주지 못했건만… 기어코 인간에게 혼이 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지 않나!"

"아, 아저씨…!"

베르제르가 황급히 노인의 말을 끊어냈지만.

"너는 조용히 해라! 내 언젠가 그 오만방자한 콧대가 눌릴 거라고는 예상했다. 이제야 알겠나, 베르제르! 너는 강하지만 그리 강하지 않아. 고작 인간에게 그렇게 혼이 날 정도로 말이지!"

"……."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얼핏 들으면 나를 향한 호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나와 베르제르를 동시에 깔아뭉개는 말이군.'

자신의 눈에 보기엔 한없이 약한 베르제르와, 조금 강한 듯하지만 그래봐야 '고작' 인간인 나.

'능구렁이가 따로 없군.'

그리 유쾌하지 않은 노인의 발언에 나의 눈썹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저 노인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나도 누군가에게 무시 당할 만큼 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아… 오해는 말게."

그때 노인이 나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를 무시하려던 게 아니야. 그저 내 기준에서 조금 모자랄 뿐…."

"그런가."

내가 노인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렇다만…."

"그럼 어디 확인해 볼 생각은 없나."

"무어라…."

"네 기준에 못 미치는지 아닌지, 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다."

스륵-

나는 검을 검집에서 슬쩍 꺼내 올렸다.

검이 슬쩍 날을 드러냄과 동시에 오러가 일렁였다.

그 순간.

"오호…?!"

노인의 눈이 커졌다.

"어찌… 인간이…."

"왜. 구미가 조금 당기나?"

"구미라… 구미가 당기고 말고…. 인간이 어찌하여 용들의 왕의 힘을 가지고 있느냐!"

"……."

역시 노인은 오러를 본 순간 그 힘의 본질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으하하하하하하!"

노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와 함께 폭풍같은 살기가 몰아쳤다.

노인이 뿜어낸 살기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나의 전신을 휘감았다.

하지만.

파아앗!

노인의 살기를 쳐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굳이 내가 의지하지 않더라도, 렘의 힘은 마치 사념을 중화해 내듯, 노인의 살기를 완전히 차단하며 나를 보호했고.

채앵!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강하게 응축된 오러가 검 위로 일렁였다.

노인의 눈썹이 다시 한번 꿈틀대고,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발견했다는 듯.

"제발, 제발…."

그 장면을 보며 팔다리를 떨어대는 베르제르와, 벌써부터 거품을 물고 쓰러질 듯이 거칠게 숨을 내뱉는 세 명의 마족들.

하지만.

"되었네. 이 나이 먹고 무슨 싸움박질이나 하고 있겠는가."

노인의 살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 옆에 있던 몰른과 해츨링도 사색이 된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으니.

"내 진심으로 사과하지. 그대는 고작 인간으로 치부할 존재가 아니었어."

노인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싸우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실하게 드러낸 셈이다.

그리고 노인도 분명 느꼈을 것이다.

나와 싸운다면 자신 역시 치명상을 피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내가 3천 살만 더 덜 먹었어도 나의 패기를 주체하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아닐세. 그렇게 무모한 싸움을 하고 싶은 마음도, 체력도 남아 있지 않아."

"……."

"인정하지. 그대는 강하네. 시간이 지나면 나보다 더 강해질 걸세."

어느새 나를 향한 호칭이 '그대'라는 호칭으로 변해 있었고.

"하…!"

베르제르는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나와 노인을 바라봤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한강민."

"한강민! 멋진 이름이군. 나는 칼제르일세."

노인.

아니, 칼제르가 손을 내밀었고.

"……."

나는 그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기가 차군.'

나는 노인의 손을 맞잡은 순간, 노인의 모든 기억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용의 기운 덕분이기도 할 것이며.

씨익-

노인이 입꼬리를 들어 올린 것을 보면 나의 능력을 간파하고 손을 맞잡음과 동시에 나에게 자신의 정보를 건네준 모양이다.

"어떤가. 그대가 원하는 대답이 조금은 담겨 있었나?"

칼제르가 말했다.

"…충분하군."

그리고 내가 답했다.

***

"결국 이곳은 또 하나의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말이겠군."

"그래. 강민, 그대의 추측이 정확하네."

내 물음에 칼제르가 답했다.

칼제르의 기억 속에서 얻어낸 정보들은 꽤 흥미로웠다.

'천족과 마족, 그리고 영족이 모두 이곳에 뒤엉켜 있다고 했지.'

천족, 그리고 마족.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족까지.

영족이란 저들이 살던 세계에서 천계와 마계의 중간 세계의 존재들이라고 했다.

천족도, 마족도 아닌 중간의 존재들.

흔히 인간과 같은 존재들이었지만 그들은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고, 천족과 마족의 분쟁에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균형을 이루는 존재들이라고 했다.

더 놀라운 건, 칼제르다.

칼제르는 어비스 상부의 모든 것이 멈춰 있는 그동안에도 눈을 뜬 채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존재는 천족에서 한 명, 영족에서 한 명.

칼제르까지 총 셋이라고 했으니.

이미 칼제르를 포함한 나머지 둘도 어비스 상부에 대해서 꿰뚫은 채 자신의 종족을 끌어 모으고 있을 것이라는 게 칼제르의 추측.

"천족 비둘기 놈들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영족일세. 그들은 자신들의 터전인 영계를 목숨보다 소중히 하지. 하지만 영계가 사라진 지금에 와서는 이곳을 자신들의 손에 넣기 위해 온 힘을 다하기 시작할 거야."

"결국 천족과 영족이 나와 경쟁해야 할 상대라는 뜻이겠군."

나는 칼제르에게 말했다.

경쟁 상대에서 마족을 뺀 이유는 하나다.

나를 도울 생각이 있느냐는 물음과 동시에 내가 칼제르의 편이 되어 주겠다는 제안이기도 했다.

"흐흐… 흐흐흐하하하하!"

칼제르가 웃음을 터트렸고.

"그렇지. 아마도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칼제르는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잘 되었군. 나는 이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칼제르의 기억 속에서 읽어낸 가장 중요한 정보가 있었으니.

"그것이겠군."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비스 상부 가장 북단에 위치해 있는 거대한 석탑.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 다른 녀석들도 그곳을 노리고 있을 터. 한눈에 보더라도 이곳에서 가장 강인한 에너지가 흘러나오는 곳이었거든."

"어쩌면 그 탑이 어비스 상부를 지탱하는 '심장'일지도 모를 일이지."

"재미있겠군. 흥미로워. 너무도 흥미로워. 비둘기 놈들과 민둥이들의 머리통을 깨부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몸이 근질거리는구나! 으하하하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이가 들어 싸우고 싶지 않다던 칼제르가 맞나 싶기도 했지만….

'잘 되었어.'

어비스 상부에서 꽤 든든한 동맹군을 만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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