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왜 그동안 연락하지 않은 겁니까."
식사를 끝내고,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나는 잠시 박명철과 따로 나왔다.
"뭐…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저도 나름 정신이 없어서요. 어비스라는 곳에 대해서 조금 알아 둬야 할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박명철은 나를 바라봤다.
"바쁘실 것 같았으니까요."
"……."
"이 왕국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이야기가 뭔지 아십니까?"
"뭡니까."
"강민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하하…."
"국왕이 어찌나 강민씨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 대던지. 아니 국왕뿐만이 아니었죠. 기사들이나 하인들, 시종들 너나 할 것 없이 강민씨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저희가 동양인인 걸 보고선 혹시 강민씨와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을 수도 있고요."
"그렇군요."
나도 꽤 놀랐다.
내가 처음 보았던 발레하드와 지금의 발레하드는 많이 달라졌으니까.
그리 오랜 시간도 아니었지만, 발레하드가 많은 발전을 이뤘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하하. 의도하지 않았다라… 그게 더 무섭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강민씨의 제일 무서운 점이 그거죠. 본인은 의도하지 않지만 주변의 모든 것을 바꿔버립니다. 저도 그랬고, 위드도 그랬고."
박명철의 시선이 움직였다.
저 안에서 위드 길드의 길드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알렉스와 템플의 길드원들이 있는 방향이다.
"저 사람도 마찬가지겠죠. 그뿐인가요. 이 어비스 전체를 바꿨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사실 놀랍진 않았습니다. 만약 강민씨가 어비스를 뒤엎는 일을 해내지 못했다면… 그게 더 놀라웠을 테죠."
"……."
이것 참.
낯이 뜨거워 쉽사리 들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
"그게 정말 무서운 일이지 않습니까. 의도하지 않은 채로도 그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저는 한 길드의 길드장이지만 늘 고민합니다."
"뭘 말입니까."
"내가 정말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이끌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리더인지에 대해서요."
"…잘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했고, 박명철은 미소를 지었다.
"나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금은 위축된 듯한 말투.
내가 박명철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저런 것 때문이다.
잘하고 있음에도 스스로에게 가혹한 채찍질을 멈추지 않는 모습들.
늘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저런 모습들 말이다.
'그러니 나도 내 계획을 위해 망설이지 않고 박명철과 손을 잡았던 거지.'
나는 박명철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박명철이 화들짝 놀라며 알 수 없는 탄성을 터트렸으니.
"어, 어…. 그, 그러니까… 강민씨가 이런… 하하하…."
조금은 어색했던 건가.
어쨌든, 나는 박명철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박명철의 표정.
"그냥… 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하고 싶은 말들은 많았다.
하지만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애당초 누군가에게 응원의 말이나 따뜻한 말을 건네 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나는 다급히 손을 내리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옆에서는 박명철의 히히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의 속내는 잘 전해진 것 같으니.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하자.
***
'이제 곧 문을 열어낼 수 있겠어.'
설계자 한 명은 자신의 가진 힘을 모두 꺼내어 어비스 상부로 진입하기 위한 문을 열어내고 있는 중이다.
다른 설계자들이 모여 탑의 머리의 회복을 늦추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그는 홀로 남아 문을 개방하고 있는 중이었다.
'잘해내야 할 텐데.'
어비스 상부로 향하는 문을 열면서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어비스 상부.
그곳은 설계자들조차도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 정도로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니까.
'어비스를 상부와 지상으로 나누어 놓은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지.'
설계자들이 탑을 설계하고 어비스를 설계할 때, 그들은 괴물이 집어삼킨 세계를 보며 경악하고 또 경악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우주를 집어삼킨 것인지… 그 안에 살고 있던 문명과 생명들은 가히 셀 수도 없었으니까.'
말 그대로.
덕분에 설계자들은 차원과 차원을.
또 세계와 세계를.
그리고 문명과 문명, 더 나아가 종족과 종족을 분류하고 또 분류해야만 했다.
그러는 데까지만 해도 억겁의 세월이 걸렸고.
분류한 것들을 다시 나누어 정립하고 담아내는 데까지는 더 많고 많은 시간이 걸려야만 했으니.
'진정으로 위협적인 존재들은 모두 어비스 상부에 가두어 둔 상태.'
현재 어비스 상부의 상태를 요약하자면, 완전한 '밀봉'상태라고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그 말인즉, 어비스 상부의 모든 존재들은 현재 그 어떤 활동도 하지 못한 채 잠들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문을 열게 되면 그 안에 있는 모든 녀석들은 즉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겠지.'
물론 그는 그 안에 어떤 괴물들이 살아 숨 쉬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인격체 또한 존재하고 있지.'
그게 설계자들조차도 어비스 상부에 갇혀 있는 존재들을 두려워 하는 이유.
단순히 무력만 강하다면 오히려 간편할 테지만, 그 안에는 인격을 가진 존재들 역시 숨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완전히 잠재우지 않고서는 우리도 통제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그 안에서 보았던 눈빛 하나를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강민 그자가 정말 그를 감당할 수 있을지….'
그건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믿고 맡기는 것뿐.
'그래. 정 안되겠다면, 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겠지.'
후우우우웅!
그렇게 다짐하며 설계자는 허공을 향해 거세게 팔을 휘둘렀다.
그의 손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거센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포탈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그 너머에 새로운 공간이 비쳐 보였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용암 지대.
중앙섬의 모습과 판박이인 그곳.
그리고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어비스 상부로 향하는 게이트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
터어어어엉!
"허어어엉…."
몰른과 해츨링이 합동하여 온 힘을 쏘아 날려 보낸 화살을 나는 어렵지 않게 쳐냈다.
무려 맨손으로.
"실력이 많이 늘었군."
하지만 이 말 역시 진심이었다.
저들이 약한 게 아니라, 단지 내가 너무도 강해졌을 뿐이니까.
"하지마아아안…."
"꾸우웅…."
해츨링과 몰른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들도 어비스에서 벌어진 블러드와의 싸움에서 꽤 활약을 하고 난 뒤라 자신감이 차올랐기 때문일 테지.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확실히 강해.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어."
사실 굳이 내가 증명해 줄 필요도 없을 것이다.
"허어어어어억…."
"한강민 대체 당신은…."
저 옆에서 입을 쩍 벌린 채 몰른의 모습을 보고 있는 김민희와 한동희의 리액션만 보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을 테니까.
"대, 대체… 몰른 씨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대체 왜 몰른씨가 저런 미친 궁수가 되어 있느냐구요!"
김민희가 나에게 와서 따져댔지만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는 시늉만을 보여 줬다.
"그냥 활 쏘는 법을 조금 가르쳤을 뿐입니다. 나머지는 저 녀석이 해낸 거고요."
"아니, 이거… 조금…."
김민희는 조금 머뭇대더니 나를 바라봤다.
"저, 저… 저도 좀 키워 주시죠…."
"……?"
"저도 어떻게 좀 키워 줘 봐요. 몰른씨 저렇게 만든 거 보면 나도 어떻게 해 줄 수 있을 거 아니…."
"이 사람이 정신이 나갔나!"
한동희는 다급히 김민희를 끌어냈다.
그리고서는 몰른과 나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아무튼 대단합니다. 몰른씨. 정말로요. 제가 봤던 그 어떤 궁수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단연코 독보적이에요. 궁술 명가 플레이어들 뺨치도록 훌륭한 활 솜씨였어요!"
"오호호호…! 저, 정말입니까아아아!"
한동희와 김민희가 격한 반응을 보여주자 그제야 몰른의 기분도 조금이나마 풀린 모양이다.
"정말이다, 몰른. 그리고 나도 지금 마침 결심을 했다."
"……?"
"함께 어비스 상부로 가자. 너희 둘 말이야."
해츨링과 몰른.
저 둘이라면 지금 내게 확실하게 큰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이 둘과 대련 아닌 대련을 한 것도 그것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저들이 아무리 성장했다고 한들 어비스 상부에는 데리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설픈 실력으로는 나에게 방해만 됐을 테니까.
"우아아아아!"
"꾸우우웅…!"
해츨링과 몰른이 만세를 부르며 환호를 내질렀다.
그리고 나는 한쪽에 서 있는 박명철을 바라봤다.
박명철.
훌륭한 사람이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비스 상부로 함께 갈 정도로 강한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박명철에게도 맡겨두고 싶은 일이 있었다.
"박명철씨."
"예."
내가 함께 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박명철에게 실망한 기색 따위는 없다.
언제나 말했듯, 박명철은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또 스스로가 있어야 할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으니.
괜한 욕심을 낼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당신은 이곳에 남아 주십시오. 알렉스와 함께 어비스의 혼란을 수습하는 역할을 맡아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박명철이 해 줘야 할 일.
알렉스 혼자라면 조금 힘들 수도 있을 테지만.
박명철과 위드 길드가 템플과 합세한다면, 다른 거대 길드들과 협상하고 중요 사안에 대해서 조율하며 어비스의 혼란을 빠르게 수습할 수 있으리라.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박명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알렉스를 바라봤다.
"너도 느꼈을 테지만, 좋은 사람이다."
"물론. 나도 알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저 사람과 함께 일하게 될 순간이 말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라면 어비스를 충분히 맡겨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되어 준다면, 나는 이제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내 목적지를 향해서 빠르게 나아갈 수 있을 테고.
"그래서… 언제 떠날 겁니까."
박명철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그도 나에게 어비스 상부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 들은 참이었으니까.
"…아마 곧 떠날 것 같습니다."
나는 저 먼 곳을 바라봤다.
중앙섬이 있는 방향.
그곳에서 거센, 그리고 사악한 기운이 몰려오고 있었다.
여기 있는 이들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지만, 나에게만은 또렷하게 느껴지고 있었으니.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아.'
거대하고 사악한 기운.
어비스 상부에서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헤아릴 수 없이 강한 괴물들의 숨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리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