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하하하하! 정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분이 이 어비스에 도착한 뒤로 커다란 지각 변동이 일어났죠. 말 그대로 그 사람을 중심으로 모든 균형이 뒤바뀌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대로군요."
박명철은 내심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가 했던 말들은 자신이 겪었던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탑에서도 그랬습니까?"
알렉스가 묻자, 박명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이죠. 제가 느꼈던 감정이 아마 알렉스 당신이 느꼈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정말… 충격이었으니까요."
그 말에 알렉스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했던 그대로다.
두 사람이 겪은 사건 자체는 다를 테지만, 강민이 걸어온 행적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말도 마십시오. 어느 날 한 플레이어와 만났었죠. 그 사람이 뭐랬는지 아십니까? 자신이 대한민국 탑을 뒤엎어 버리겠다더군요."
박명철은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처음 만났던 강민의 그 말을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이런 허탈한 웃음이 나오곤 했다.
"그래요. 처음에는 지켜나 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실력도 괜찮은 것 같고, 마침 저와 방향성도 맞았으니 뒤에서 지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었죠. 안 되면 말고… 라는 마음이었으니까요."
"하하하…."
알렉스는 내심 놀라기도 했다.
어찌 그리도 자신의 마음과 똑같았는지.
강민이 했던 말들이 틀린 게 하나도 없구나,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더니.'
이제 처음 만나 본 박명철이었음에도, 어쩌면 두 사람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확신이 들었고.
박명철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정말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할, 아니… 상상도 하기 힘든 일들을 해내기 시작했죠. 혼자서요."
"……."
역시나.
똑같다.
자신이 겪었던 일들도 박명철이 겪었던 일들과 너무도 비슷했다.
"하나씩, 하나씩. 마치 계단을 올라가듯 그 사람은 자신의 계획을 이뤄냈습니다. 그 어떤 장애물이 있던지 깨부수고, 올라서고. 깨부수고 올라서면서요."
"……."
"그리고 결국 해냈습니다. 밑바닥에 있던 플레이어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니었는데 결국 정상에 올라서서 자신이 외쳤던 그 모든 것을 이뤄냈었죠."
박명철은 두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와서 생각해 봐도 실감이 안 난다는 그런 얼굴로 말이다.
"지나고 와서 말하니 제가 생각해도 소설 같군요. 어떻게 그런 사람이 저에게 손을 내밀어 줬는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이지 꿈만 같습니다.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는 없었을 테죠."
"하하하하하!"
그 말에 알렉스는 결국 큰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박명철 저 사람과 내가 비슷한 것도 있겠지만…. 어쩌면… 한강민 그 사람 때문일 지도.'
사람에게는 고유한 기운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강민이 풍기는 기운이 그랬다.
믿고 싶은 사람.
무엇을 하건 해낼 것만 같은 사람.
그래서 그 사람 옆에서 그 사람을 도와주며, 함께 가고 싶은 사람.
'결국 대단한 건 한강민.'
역시나 같은 결론.
그리고 박명철이 느끼는 그 모든 마음 역시 알렉스는 공감하고 있는 중이다.
'그 사람이 없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블러드라는 거대한 적.
그들과의 싸움에서 결국 템플과 알렉스 자신이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을 거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결국 패배했을 것이다.
그 확신은 블러드와의 전면전에서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알렉스는 기뻤다.
강민을 만난 것이.
그리고 지금 박명철이라는 사람을 만난 것이.
알렉스는 눈앞에 놓인 잔을 들었고, 박명철을 향해 내밀었다.
"한잔하시죠."
"하하하! 좋습니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손에 든 잔을 입으로 가져갔고.
목을 타고 씁쓸한 포도주가 흘러내렸다.
***
"이제 조금 괜찮아졌는가."
"그래."
깨어나고 나서도 꽤 오랜 시간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이제는 상당히 괜찮아진 상태다.
"그래. 이제는 어쩔 거지?"
헤르야가 물었다.
"글쎄.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군."
블러드의 수장을 처치했지만, 아직 어비스의 상부로 향하는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 문을 열 수 있는 건, 설계자.
지금 내가 어비스의 상부로 가고 싶다고 해서 당장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탑의 설계자와 만났다. 그가 어비스의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고 했으니 그때까지는 기다리고 있는 수밖에 없겠지."
"그렇군. 그렇지 않아도 저 먼 곳에서 소란이 일어나고 있어."
헤르야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헤르야는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고 들을 수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
내가 놈의 분신을 처치한 이상, 저 위에 있는 본체에게서도 무슨 변화가 생기리라는 것을 말이다.
"슬슬 다가오고 있을 뿐이야."
"침착하군."
"들뜰 이유도, 더 이상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
나는 모습이 변화된 검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이 검만 있으면, 더 강한 적이 내 앞을 막아선다고 해도 이겨 낼 자신이 있다.
"그분은… 다시 만나 볼 순 없는 거겠지?"
에인션트 드래곤.
만약 기회가 한 번만 더 주어진다면, 다시 그와 검을 나누고 싶었지만.
"힘들 것이야. 그분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셨다네. 그분을 다시 일깨우기 위해서 나는 더 많은 생명을 소모해야만 할 테니까."
"뭐…?"
"하하하. 부담을 주려는 것은 아니었네. 그분은 이 숲 자체일세. 에인션트 드래곤. 드래곤들의 아버지. 우리 용인들이 살아가는 모든 세상 자체가 바로 그분일세."
"허…."
나는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이 숲.
이 숲이 바로 그 드래곤이라는 말이었다는 말인가.
내가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을 보며 헤르야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추측이 정확했네. 내가 지키려고 했던 것. 나의 생명을 소모해서라도 이 괴물의 뱃속에서 지키려고 했던 게 바로 이 숲이요, 나의 아버지인 것이지."
"하…."
놀라웠다.
그리고 그제야 이 숲에서 피어나오는 용의 기운이 바로 에인션트 드래곤의 기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니.
"고맙다, 헤르야."
나는 헤르야에게 다시 감사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내가 해야겠군. 아버지께서도 그대와의 만남을 기뻐하고 계시니까 말이야."
"……."
그 순간.
휘이이잉!
바람이 불어왔다.
그냥 넘길 수도 있을 테지만, 이 바람이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나는 스쳐가는 바람을 향해 손을 뻗었고.
휘릭!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바람은 내 손가락을 한 바퀴 돌고서는 다시 저곳 어딘가로 흘러 지나갔다.
"아버지께서 그대에게 인사를 하시는군."
"…그래."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중.
[박명철 : 강민씨. 연락이 늦었습니다.]
박명철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라는 마음 때문이었지만.
확실했다.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분명히 박명철이었고.
"좋은 일이 생긴 모양일세. 긴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잠시 마음을 편히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
헤르야가 말했다.
"그래. 먼저 가봐야겠어. 곧… 아니,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헤르야."
"그래. 나는 언제나 이곳에 있을 테니 도움이 필요하다면 항상 들러주시게."
"그래. 고맙다."
그 순간.
타악!
헤르야가 손을 튕겼다.
"그대의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
그리고 나의 시야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
"어, 어…?"
"무, 무슨…."
"오호호호호?!"
순식간이었다.
조금 전 헤르야가 손가락을 튕기기가 무섭게 나는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해 버렸다.
그리고 그곳은, 발레하드 왕국.
"가, 강민… 강민씨!"
"허, 허어억!"
"어, 어머머머!"
익숙하고 그리운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박명철과 한동희, 그리고 김민희.
게다가 알렉스와 몰른, 해츨링까지.
"하, 하하하하…!"
내 입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언제 웃었던 게 마지막인지 모를 정도로 오랜만에 터져 나오는 웃음이었지만, 이번 웃음은 정말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이었으니.
"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강민씨!"
박명철이 내 앞으로 한걸음에 다가와 소리쳤다.
"고마운… 친구가 나를 이곳으로 보내 준 모양입니다."
"뭐… 영문은 모르겠다만… 잘 됐습니다. 강민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렇게 말하며 박명철은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박명철의 손을 맞잡았다.
"그나저나…."
박명철은 내 몸을 훑어보며 말끝을 흐렸다.
"무슨 문제라도?"
"아뇨. 문제가 아니라… 제가 마지막으로 봤던 강민씨와 지금의 강민씨는… 허허… 참…."
"……."
박명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 것 같았다.
탑에서 벗어나기 직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졌다
.그것도 아주 많이.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랬겠죠. 하지만 강민씨는 언제나 제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지금 보는 강민씨는… 마치 거대한 산 같군요."
"그렇습니까."
"말 해 무엇 하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우리 길드 소속이라니, 누차 말하지만 정말 꿈만 같습니…."
"아, 좀 비켜 봐요!"
"그래요. 혼자서만 인사하고, 상도가 없어. 안 그래요? 누님?"
"그러니까!"
박명철과 나 사이로 끼어든 건, 김민희와 한동희.
"와아아아… 대체… 무슨…."
한동희 역시도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란 채로 말을 더듬기 시작했고.
"미, 미친…."
김민희는 조금 과격한 탄성을 터트렸다.
"대체… 얼마나 강해진 거예요? 이거 사람 맞아? 조금 너무한 거 아닌가?"
"야, 임마! 사람 앞에 두고 그게 무슨…!"
짜아악!
김민희는 한동희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강하게 내리쳤고, 한동희는 한동안 끙끙대며 울상을 지어 보였다.
"말했듯 꽤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건… 우선 앉아서 이야기해야겠군요."
그리고 나는 봤다.
저 먼 곳에서 나를 향해 애정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중년의 남성을 말이다.
"여, 영웅이여!"
그건 바로 발레하드 왕국의 국왕.
왕 앞에서 이런 커다란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서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
"이게 얼마 만이오, 강민! 내 꿈에도 그대를 그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소.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레 나타나 주다니! 미리 기별이라도 하였다면 내 친히 마중을 나갔을 터인데!"
"…저도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지금 여기에 바로 도착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하하하하! 그래. 그게 무엇이 중요하겠소. 여봐라! 음식을 들여라! 더 많은 음식과 술을 들여라! 오늘은 창고를 거덜 내도 좋으니 백성과 모든 이들에게 음식을 베풀라!"
국왕의 기쁨 가득한 외침이 터져 나왔고, 한동희와 김민희는 양쪽에서 내 손을 잡은 채 진수성찬이 펼쳐 있는 커다란 식탁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래. 잠시라면 괜찮겠지. 어비스 상부로 가기 위한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헤르야가 말했던 그래도.
지금은 잠시나마 마음을 놓고 편히 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