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노인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조금 전의 움직임도 감히 내가 쉽사리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빨랐건만, 지금 보여주는 움직임은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나는 달라졌고, 한층 더 빨라진 노인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우습게도 사념의 힘 덕분이었다.
[사념의 지배자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사념으로 인해서 일시적으로 능력치가 폭주합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고, 초감각을 비롯한 나의 모든 신경들이 이전에 비할 바 없이 날카롭게 주변의 모든 것을 감지해 내기 시작했다.
거기엔 당연히 노인의 모든 움직임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노인의 숨소리 하나까지, 더 나아가서 노인의 눈동자의 움직임까지도 초감각이 정확히 포착해 내고 있었으니.
'이 정도의 감지 능력이라니….'
용의 기운을 처음 손에 넣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것만 같다.
내가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던 모든 것들이 내 피부로 와 닿기 시작할 정도로.
그리고 그 순간.
'저기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노인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방향을 포착해냈다.
나는 그 방향으로 지체 없이 검을 움직였으니.
쿠우우웅!
노인의 검이 내 검을 강하게 내리쳤다.
역시나 이번에도 나는 밀리지 않았다.
물론 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전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카아아앙!
온 힘을 다해서 노인의 검을 밀어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을 일일 테지만, 지금 내 일격으로 노인은 뒤로 밀려나는 결과를 만들어냈으니.
"흐흐…흐흐흐하하!"
노인은 그저 영문 모를 웃음만을 터트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인의 반응에 감흥을 느낄 겨를 따위는 없었다.
한 번의 검이 부딪치기가 무섭게 노인의 모습은 다시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딜!'
이젠 나도 그냥 당해 줄 생각 따위는 없다.
탓!
발을 굴렀다.
더 이상 가만히 서서 노인의 공격을 받아낼 수만은 없지 않겠나.
그리고 지금의 나는 노인의 속도를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스탯을 갖추게 된 상황이었으니까.
타아아앙!
내 몸이 엄청난 속도로 한 방향을 향해 쏘아졌다.
그곳에는 노인이 있었다.
눈으로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오직 나의 모든 감각을 통해 포착해 낸 결과였고, 내 감각을 확실하게 믿으며 나의 몸을 움직인 결과였으니.
"허엇…!"
드디어 노인의 입에서 놀라움이 섞인 탄식이 터져 나오게 만들 수 있었으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움직였다.
지금까지 멍하니 서서 노인의 공격을 받아냈던 것과는 달리, 드디어 내가 먼저 노인을 향해 첫 번째 공격을 시도하는 순간!
후우우웅!
그 짧은 찰나에 노인은 몸을 움직여 나의 공격을 피해내며 검은 허공을 갈랐다.
'젠장!'
첫 번째 공격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아쉽지는 않다.
오히려 지금의 일격을 통해서 나는 가능성을 봤다는 쪽이 더 적절하리라.
'이제 나는 저 노인을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
그 순간에도 초감각은 재빠르게 움직이며 노인을 탐지해 냈고, 나는 다시 움직였다.
나와 노인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이번에도 역시나 나는 먼저 검을 움직여 노인을 향해 내질렀다.
"크흣…!"
이번에도 노인의 입에서는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결국.
카아아앙!
노인은 내 공격을 피하지 못한 채로, 내 검을 자신의 검으로 가로막았다.
내가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손아귀가 찢어질 듯이 아파왔지만.
그런 미약한 고통보다도 노인을 다시 한번 공격해 냈다는 쾌감이 내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더 기쁘게 만든 건 다름이 아닌.
콰콰콰콰쾅!
지금의 내 공격으로 노인을 저 먼 곳으로 날려 버리는 것을 성공했다는 점이었다.
'엄청나다. 이건 엄청난 힘이야.'
사념.
이것에 왜 그렇게 많은 플레이어들이 자신을 내던지면서까지 받아들였는지,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갈 정도였으니.
'대단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무서운 힘이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고작 사념을 조금 몸속에 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스탯이 이 정도로 폭발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말이다.
'여기에서 더 욕심을 냈다가는 정만 큰일이 날 수도 있겠지.'
지금 내가 품고 있는 사념은 내가 통제 할 수 있는 최대치.
만약 이 이상으로 사념을 더 흡수해 버린다면, 심장 주변에 세워 놓은 단단한 벽으로도 사념을 완전히 붙잡아 놓을 수는 없으리라.
'어차피 더 욕심낼 생각도 없어.'
과유불급이라는 말을 둘째치고서라도, 나는 지금 내가 가진 사념의 힘에 충분히 만족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내가 다시 발을 디디며 도약한 순간에, 내 발끝으로부터 사념의 힘이 폭발하며 나를 로켓처럼 쏘아 보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 나는 다시 노인의 앞에 도달하여 그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내 주먹 위로 사념의 붉은 기운이 어른거렸고, 노인 역시 눈매를 좁히며 내 주먹을 향해 자신의 검을 움직였다.
노인의 검 위에 피어오르는 용의 기운.
비록 맨손이었지만, 저 노인의 검이 두렵지 않았으니.
쿠우우웅!
내 주먹은 기어코 노인의 검을 거세게 강타했다.
"크흡!"
노인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주먹이 후려친 노인의 검이 잠시 위로 떠올랐다.
곧바로 양손으로 검을 움켜쥔 나는, 내가 도약한 추진력과 함께 노인을 향해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후우우웅!
노인은 간발의 차로 내 검을 피해냈다.
지독하다.
정말 지독할 만큼 강한 노인이다.
몸을 비튼 노인은 그대로 다리를 움직여 내 몸통을 걷어차기 위해 다리를 내뻗었지만.
콰아앙!
나는 노인의 발길질을 내 다리로 막아냈다.
다리와 다리가 충돌한 순간에 다시 울려 퍼진 굉음과.
콰콰콰콰콰!
내 안에서 더 많은 사념들이 솟구치며 내 몸에 충만한 기운을 더했다.
나와 노인은 잠시 떨어진 채 서로를 바라봤다.
처음에는 조금 무료해 보였던 노인의 표정에는 어느새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두껍고 흰 눈썹이 쉴 새 없이 꿈틀댔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넘을 수 없는 산처럼 거대해 보였던 저 노인이 이제는 나를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허허허!"
노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검을 잡고 있는 쪽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걸 보니, 분명 내 공격으로 인해서 타격을 입은 게 분명해 보였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자로구나! 그렇게 단시간에 이리도 성장해 버리다니. 대체 너는 어떻게 되어 먹는 녀석인지, 원!"
"덕분입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저는 그대로 이 사념에 잡아 먹혀 버렸을 테니까요."
"또 그 소리! 나는 그대에게 커다란 똥물을 끼얹었을 뿐이야. 만일 그대가 한없이 나약한 존재였다면, 내가 깨운 그 사념에 진즉에 잡아먹혔을 테지. 결국 사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은 전적으로 그대의 능력!"
한없이 차가운 것 같던 노인이 이제 와서는 나를 끝도 없이 치켜세워주고 있었다.
묘하다.
그리고 기뻤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내가 저 노인을 쓰러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때였다.
노인의 입꼬리가 묘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나 착각은 하지 마시게나."
"……?"
"그대가 대단한 것은 맞지만, 혹여 속으로 그대가 나를 넘어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런 생각은 지금 당장 집어치우는 게 좋을 것일세!"
내 속이라도 읽은 것인지.
노인이 그렇게 말했고.
나 역시 답했다.
"대 봐야 알지 않겠습니…."
라는 말을 꺼내기도 잠시.
번쩍!
빛이 번쩍였다.
그 빛은 노인으로부터 뿜어져 나왔고.
노인의 몸에서 터져 나온 강렬한 붉은빛은 이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이곳을 완전히 집어삼키기 시작했으니.
'이런 미친….'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보며 나는 내가 상대하고 있던 존재가 누구였는지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고.
내가 조금 전 품었던 그 생각이 얼마나 하찮고 알량한 것인지 다시 한번 느껴야만 했으니까.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건, 노인이 아니었다.
저곳에 있는 것은 저 노인의 본모습.
드래곤.
아니, 평범한 드래곤 따위가 아닌.
드래곤들의 드래곤.
그 모든 드래곤들의 추앙을 받아 마땅한, 드래곤들의 중심.
에인션트 드래곤이었다.
어느새 노인은 자신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으니, 그 거대하고 타오르는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고.
쩌어억-
노인.
아니, 에인션트 드래곤의 거대한 입이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 한 거 아니냐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벌어진 입 틈새에서 강렬한 기운이 모여들고 있었으니까.
'드래곤… 브레스…!'
일전에 탑에서 싸워 보았던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 따위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에너지가 폭풍처럼 에인션트 드래곤의 입속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피해야 한다.
저 브레스를 정통으로 맞는다면 나는 반드시 죽는다.
부상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라고 내 몸의 모든 세포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파앗!
재빨리 브레스의 사정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을 굴렀다.
하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내가 어느 곳으로 이동하건, 저 드래곤은 커다란 눈을 굴리며 나를 한 시도 놓치지 않았다.
부처님 손 위에 올라 있는 손오공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아무리 도망쳐도, 아무리 달리고 먼 곳으로 날아올라도 도무지 드래곤의 시야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
결국.
쿠어어어어어어!
고막이 터져 나갈 것 같은 괴성과 함께 에인션트 드래곤의 입속에서 백색 찬란한 브레스가 나를 집어삼킬 기세로 날아들었다.
시야가, 청각이, 촉각이,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감각들이 마비되었다.
고통같은 것은 느낄 여력도 없었고.
그저 내가 이렇게 죽어 버리는구나, 라는 무력감에 빠져들어 가고 있을 무렵.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에인션트 드래곤의 수제자!]
[능력 '용검술'을 획득했습니다!]
[에인션트 드래곤의 지혜가 담긴 검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검의 속성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검에 에인션트 드래곤의 가호가 적용됩니다!]
내 눈앞에는 알 수 없는 메시지들이 무수하게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 메시지들을 파악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이 순간 말 그대로 하얀 빛무리에 싸인 채로 모든 의식의 끈을 놓아 버렸기 때문이다.
***
"너무하셨습니다."
"하하하하하! 오랜만에 재미있었네. 나에게 좋은 선물을 준 만큼 나도 화끈하게 보답한 것인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었을지…. 아무리 그래도 저자는 인간. 인간 앞에서 본모습을 꺼내 보이시는 것은 너무도 과했습니다. 만약 조금만 나약했다면…."
"이보게, 헤르야. 저자는 강해. 이제 머지않아 나보다 더 강해질 걸세. 나는 그렇게 느꼈다네. 그리고 네가 말한 대로 저 아이야말로 그 괴물을 두 동강 내어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 걸세."
그렇게 말하며 노인은 다시 숲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노인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 보였으니.
그런 노인의 마지막 말을 곱씹으며 헤르야는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단하구나, 정말로.'
헤르야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아직 눈을 감고 정신을 잃은 채 누워 있는 강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