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구구구구구-쿠우우우웅!
무너져 내리던 숲은 기어코 완전히 반 토막이 난 채로 무너져 버렸다.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눈을 부릅뜨고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무너진 숲 뒤쪽에서는 검은 공간이 드러났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말이다.
그리고 남아 있는 반쪽, 그러니까 숲의 바닥 부분 역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구구궁-!
남은 반쪽은 땅 아래로 꺼졌다.
아니, 땅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래로 꺼지고 있으니 땅이라고 표현했을 뿐.
결국 남은 반쪽마저도 완전히 사라지고, 나는 홀로 검은 공간에 서 있었다.
어디가 위이고, 어디가 아래인지.
어디가 왼쪽인지 앞인지 뒤인지 그 어느 것도 분간할 수 없는 거대하고 공허한 공간에 혼자 서 있었으니.
'알 수가 없군.'
갑자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고, 혼란만 커져가고 있을 따름이다.
헤르야도, 조금 전 그 노인의 모습도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이내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혼란스러울 필요 없어. 헤르야가 데리고 온 곳이라면 나를 함정에 빠트리려는 건 아닐 테니까.'
헤르야를 오래 만난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나를 골탕 먹일 사람은 아니라는 정도는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분명 내가 이런 공간에 도달한 데에도 무슨 뜻이 있으리라.
'침착하게 기다려 보자. 분명 무언가 나타날 거다.'
헤르야도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어비스에 내가 없어서는 안 되리라는 것을.
그런 마당에 나를 이런 곳에 가둬 놓을 리가 없지 않은가.
풀썩
나는 우선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괜히 서서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느니 차분하게 무언이라도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게 낫겠다는 판단 덕이었다.
'뭐가 나오더라도 나타나겠지.'
생각해 보면 간단하지 않은가.
내가 여기 오기 전, 헤르야와 노인이 나누었던 그 대화만 떠올려 봐도 그렇다.
헤르야는 노인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나에게 검을 가르쳐 줄 수 있겠느냐고.
그리고 노인은 묘한 표정과 함께 나를 바라봤었고.
'그래. 어쩌면 이 모든 게 나를 위한 교육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더 편해졌다.
아직도 이곳에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 또한 나를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과정의 일부라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후우…."
나는 천천히 숨을 쏟아내고, 다시 들이켰다.
숨을 들이켜고 내뱉기 시작하기를 몇 분째.
꿈틀!
용의 기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용의 기운들은 내 몸속에서 떠도는 렘과 오러를 같이 끄집어내어 내 코와 입 밖을 넘나들며 이 공간에 떠도는 알 수 없는 기운들을 내 몸속으로 운반했다.
'묘하군.'
공기인 줄 알았지만, 이곳에 떠도는 건 공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게 신기했지만.
어쨌거나 평범한 공기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명백하게 그런 사실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곳은 하나의 새로운 차원일 수도 있겠어.'
역시나 어비스나 탑과는 별개된 새로운 차원의 공간.
그리고 그 순간에도 용의 기운과 뒤섞인 오러와 렘은 차분하게 내 몸과 밖을 오가며 이 공간에 떠도는 기운들을 내 몸속에 조금씩 축적했다.
그 순간.
[능력 '사념의 지배자'의 숙련도가 미세하게 증가합니다.]
'뭐?'
갑작스레 떠오른 메시지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사념의 지배자의 숙련도가 갑자기 왜 증가한다는 말인가?
'설마….'
이곳에 떠도는 이 기운들이 사념이라는 뜻일까?
그렇다면 용의 기운이 내 몸속에 쌓아 올리는 이것이 사념이라는 말일까?
'그건 말이 안 돼. 이미 사념이 어떤 힘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내 몸속에 차오르는 기운은 내가 알던 사념과는 많이 달랐다.
만약 이게 사념이었으면 내가 모를 리가 없다.
블러드의 플레이어들과.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탑의 분신과도 싸웠던 내가 사념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과 같은 메시지는 계속해서 떠올랐다.
[능력 '사념의 지배자'의 숙련도가 미세하게 증가합니다.]
[능력 '사념의 지배자'의 숙련도가 미세하게 증가합니다.]
.
.
.
반복해서 뇌리에 울리는 음성들.
당황스러운 상황이지만, 나는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어쨌거나 사념의 지배자의 숙련도가 증가한다는 건 나에게 있어서도 좋은 소식이었으니.
조금 더 이 상황을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더 적극적으로 호흡을 시작했다.
용의 기운을 그냥 놔두지 않았고, 내가 터득한 호흡법을 통해 내가 용의 기운과 렘, 그리고 오러를 조절하며 대기중에 떠도는 기운들을 내가 스스로 쌓아 올렸다.
그러자 메시지에는 변화가 생겼다.
[능력 '사념의 지배자'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미세하게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이다.
그런 메시지는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떠올랐고, 내가 더 적극적으로 이 기운을 쌓아 올릴수록 메시지가 떠오르는 속도는 더 빈번해졌다.
그리고 결국에는.
[능력 '사념의 지배자'의 숙련도가 빠르게 증가합니다.]
빠르게라는 단어가 추가될 정도로까지 이르렀으니.
"흐읍…!"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오러가 머무르는 장소를 반으로 나누어 오러와 알 수 없는 기운이 반씩 자리해 있었으니.
'정말… 이게 사념일까?'
내 몸에 쌓아 올렸음에도 이 기운이 사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동안 내가 겪었던 사념은 폭력적이고 거친 기운이다.
아니, 그런 정도를 뛰어넘어 사념은 그 사념을 품고 있는 자를 집어삼키려 하는 탐욕적인 기운이다.
하지만 이 기운에서는 전혀 그런 기미는 찾아볼 수 없었으니.
대체 어떻게 이것을 두고 사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의문에 의문이 더해가고 있던 중.
저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가 들려오는 곳에는.
'언제?'
그 노인이 서 있었다.
그가 대체 언제 어디에서 모습을 드러냈는지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나는 오히려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내가 저 노인의 기척을 찾아낼 수 없었다는 건, 저 노인은 명백하게 나 이상의 실력자라는 사실일 테니까.
그리고 그때, 노인이 천천히 자신의 손을 움직였고.
채애앵!
어느새 그의 손에는 길게 뻗은 도 하나가 들려 있었다.
"자. 일어나시게."
노인이 말했다.
***
'너무 어려운 부탁을 한 건 아닌지 고민이 되지만….'
강민과 에인션트 드래곤이 사라진 자리에 홀로 남은 헤르야는 복잡한 감정이 드러나는 표정을 한 채로 조금 전 강민이 서 있던 곳을 바라봤다.
'아니야. 그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헤르야는 강민을 믿었다.
일개 인간으로서 용인의 수장인 자신보다 더 강하게 성장한 남자다.
그리고 그가 본 강민은 결코 쉽사리 무너질 존재가 아니다.
'그 남자가 무너진다는 건 나로서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야. 내가 그 어떤 존재보다도 강한 존재니까.'
헤르야가 가지고 있는 강민에 대한 믿음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모든 것을 꿰뚫는 용의 눈을 가진 헤르야.
그가 그렇게 봤다면, 자신의 판단은 틀릴 수가 없으리라.
'무너지지 않고,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그대는 더욱더 강해질 수 있을 걸세. 절대로 포기하지 말게나.'
그렇게 생각하며 헤르야는 가만히 서서 강민이 있던 곳을 바라봤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강민의 성격을 보더라도.
그리고 에인션트 드래곤의 성격을 보더라도.
'결코 지지부진하게 길게 끌 인물들은 아니니까.'
***
쿠우우우웅!
"커허억!"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저 노인의 손에 들린 검이 움직였다는 것을 알아채기도 전, 엄청난 무게가 내 전신을 짓눌렀다.
'심지어 나를 공격한 것도 아니다.'
저 노인은 지금 나와 족히 10m는 넘게 떨어져 있었고,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저 검을 위에서 아래로 한 번 휘둘렀을 뿐.
그렇다는 건, 지금 나를 누르고 있는 건 저 노인이 뿜어낸 기세라는 뜻이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물리적인 공격도 아니고, 그저 기세만으로도 나를 이렇게 억누를 수 있다는 게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무엇 하고 있는 겐가."
그때 노인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헤르야가 내 앞으로 데려온 자라면 재미있는 무엇인가를 보여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한마디 하고 싶었다.
이게 지금 대체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황이냐고.
당신이라면 내 입장에서 뭐라도 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지금 이 모든 건 훈련의 과정일 것이다.
물론 저 노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이 상황을 이겨낸다면… 나는 더 강해질 수 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그것이 바로 헤르야의 의도일 테고.
어쩌면 저 노인의 교육 방식일지도 모른다.
'보여드리지.'
내가 저 노인의 몸에 흠집이나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어떻게 해서든 강해지고 말리라.
콰아아아앙!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오러를 끌어 올렸다.
굉음과 함께 오러가 맹렬히 피어올랐으니.
용의 기운과 뒤섞인 오러는 붉은 화염처럼 거세게 타올랐다.
그리고 변화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고오오오오!
내 몸에 깃들어 있던 기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게 정말 사념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콰콰콰콰쾅!
그 기운이 몸 밖으로 터져나온 그 순간에 다시 나를 중심으로 거센 폭발이 일어났으니.
그제야 노인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이제야 무언가 보여주려고 하시는구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스으으-
노인의 발이 움직였다.
아주 미세한 동작임에도 불구하고, 그 작은 움직임이 내 피부로 느껴지듯 가깝게 느껴졌으니.
'보인다. 이제는 보이기 시작했어.'
그렇다.
새로 내 몸속에 깃든 그 기운의 도움으로 나는 지금 노인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것.
나는 검을 움직였다.
극히 찰나였으나, 나의 검이 움직인 그 순간에.
쩌어어어어엉!
내 검 위로 노인의 검이 닿았다.
"호오!"
노인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고.
"크허억!"
내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앙!
그 일격으로 내 몸은 먼 곳으로 내동댕이쳐진 채 바닥을 수차례나 구르고서야 멈춰 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의 모든 신경은 노인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어느새 이 주위 모든 것을 포착하고 있는 초감각의 섬세함은 이전의 수준을 한참이나 초월한 상태였다.
저 노인의 움직임마저도 느껴질 정도로.
노인은 움직이고 있었다.
큰 동작이 아니다.
이전과 같이 그저 발을 살짝.
아주 미세하게 굴렀을 뿐이지만, 초감각은 경고하고 또 경고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검을 들어 올리라고.
그리고 저 노인의 공격을 막아내라고!
온 힘을 다해 초감각이 경고하는 그대로 검을 들어 올린 그 때.
쩌어어어어엉!
다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발을 단 한 번 구름으로써 저 노인은 순식간에 수십 미터의 거리를 도약하여 나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는 뜻이다.
'궁신탄영도 이 정도는 할 수 없어.'
그 어떤 준비 동작도 필요 없는 말도 안 되는 탄성.
이건 어떤 스킬도, 기술도 아니다.
그저 이 노인의 몸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유연하고 탄력적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결과물이다.
그래.
지금 이런 잡생각들은 집어치우자.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거다.
콰아아아아앙!
나와 노인의 검이 부딪친 순간 다시 한번 굉음과 함께 엄청난 검풍이 몰아쳤다는 것.
조금 전, 나를 억눌렀던 그 무거운 기세로 인해서 몰아치는 검풍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버텨냈다.
이 노인의 무지막지한 일격을 받아내고서도 밀리지 않았고, 그 자리에 멀쩡히 서 있다는 말이다.
그 순간.
"흐하하하하하!"
노인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콰아아아!
내 몸에서 웅크리고 있던 기운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금 전 축적했던 알 수 없는 그것.
그 기운은 마치 노인의 웃음소리에 반응하고 있는 듯했으니.
"자, 네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노인의 입에서는 웬 뚱딴지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 노인은 이 기운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