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헤르야를 따라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와 헤르야는 다시 숲속으로 들어섰다.
이전에도 한 번 와봤던 그 숲이다.
나에게 용의 기운을 불어넣고, 해츨링을 더 강하게 만들어줬던 그 숲 말이다.
나는 말없이 헤르야의 뒤를 따랐다.
이 숲은 이제 고작 두 번째 방문일 뿐이긴 하지만, 용의 기운을 손에 넣고 난 다음부터 이 숲이 마치 고향처럼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깊은 곳 어디에선가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만약 내가 용의 기운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면, 눈치조차 챌 수 없었을 테지만.
이 숲에 들어온 순간부터 용의 기운이 꿈틀대며 저 먼 곳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중이다.
'하긴… 헤르야조차 말을 높일 존재라면….'
그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나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용족의 가장 큰 어른일지도 모르지.'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추측이었다.
헤르야는 아무런 말도 없이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한 걸음씩 걸어 나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더 깊숙하게 들어갈수록 범상치 않은 존재의 에너지가 더 강렬해졌고.
이제는 내 전신을 휘감을 만큼 그 기운이 거세게 피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이 결코 불쾌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푸근하게 느껴지고 있는 중이다.
용의 기운은 그 어느 때보다 들뜬 듯이 춤을 추고 있었고, 그에 따라서 나 역시 마음이 고양되고 있는 중이다.
잠시 후.
"우선 마음에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야."
헤르야가 말했다.
"마음의 준비라니?"
"물론 그분께서 그대를 해하지는 않으실 것이나, 그분의 존재감 앞에서 감히 인간이 버텨내기란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
"…그 정도라는 말인가?"
"그래. 힘의 고강함 따위는 그분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테지. 그분 앞에서 멀쩡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본인의 정신력에 따라서 달라질 뿐."
정신력.
그것이라면 나도 어디에서 지지 않을 자신이 없다.
하지만 헤르야가 저렇게 말하고 있다는 건 분명 나를 염려한다는 뜻일 거다.
그리고 아무래도 '종'의 차이 역시 있을 수밖에 없을 테지.
내가 아무리 정신력이 탁월하다고는 해도 인간과 용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어떤 벽이 존재할 테니까.
"알겠다. 잘 버텨보지."
"그래도 그대는 우리의 기운을 가지고 있으니 어느 정도 보호 받을 수는 있을 걸세."
"좋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존재를 만나려 하기에 이렇게까지 조심스러운 것인지.
두려움보다도 설렘이 앞서기 시작했다.
"가지."
헤르야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
"크릉- 크르륵-"
어비스의 꼭대기.
그곳에서는 머리만 남은 생명체가 꾸준히 자신의 피를 뿜어내고 삼키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 녀석의 모습은 꽤 많이 달라져 있었다.
썩어 문드러졌던 비늘은 어느새 조금씩 윤기가 돌기 시작했으며, 머리만 남은 채 잘려 나간 흔적들이 천천히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서 있었다.
'…….'
한 명이 아니다.
섞여 있는 남녀는 움직이고 있는 생명체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탑의 설계자들.
"저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건, 분명히 한강민 그 사람이 저 아래의 분신을 없앴다는 뜻이겠지."
"그래. 우선 한 고비를 넘긴 건 맞지만… 이게 정말 맞는 선택인지는 모르겠군."
어비스의 정상에 탑의 머리를 봉인해 놓은 채 상태를 관망하던 설계자들.
그들로서는 지금 저 탑의 머리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으니 그저 지켜 보고 있는 수밖에.
"걱정하지 마. 지금 당장은 넘어야 할 큰 산이라고는 하지만… 저것을 가만히 방치해둔다면 언제고 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괴물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래. 그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가 탑을 만들었으니까."
설계자들의 어두운 얼굴 속에서도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치 않는 것을 바로 강민이라는 존재를 발굴해 냈다는 사실 덕분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선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이는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가 서 있었다.
"자, 어때. 이제 인정 하겠어? 어중간한 다수보다는 확실한 한 명이 낫다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자신의 신념을 다시 한번 토로하며 다른 설계자들을 향해 큰소리를 치는 그녀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다른 설계자들.
"그래. 그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결국 네가 그런 괴물을 길러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하지만 만약 한강민 그자가 아니었다면 너의 모든 계획도 물거품이 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한 설계자의 반박.
하지만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는 지지 않고 입을 열었다.
"모든 건 결과가 증명하는 거야. 뭐… 나도 인정은 해. 도박이었지, 도박이었어. 그래도 결과적으론… 우리 마지막 희망이 한강민 그 사람인 건 맞잖아."
"그래. 사실 더 이상 의미 없는 논쟁이지. 우리의 승자는 너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끝난 게 아니지."
"응."
설계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제 다시 자신들만의 싸움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강민이 성장할 때까지.
더 강해져서 정말 이 마지막 싸움을 준비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때까지 그들은 그들만의 싸움을 이어가야 할 테니까.
"가자."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몸 좀 풀어야겠네."
지금 그들은 저 생명체의 회복을 억누르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간단해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괴물과 이미 한 차례 싸우고 탑을 만든 뒤 큰 힘을 잃게 된 설계자들이 자신들의 남은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어차피 그들은 이제 저 괴물을 완전히 없앨 순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남은 모든 여력을 다해 억제하고 또 억제하는 것뿐.
'어서 올라와라, 한강민.'
설계자들은 합심해서 강민을 응원하며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
"……!"
헤르야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헤르야의 말은 너무도 축소되어 있었다.
'용의 기운이 지켜주고 있다면 버틸 수 있을 거라고?'
거짓말이었다.
용의 기운은 저 존재를 만난 순간 날뛰기 시작했고, 오히려 폭주하기 시작한 용의 기운을 억누르느라 진땀을 빼야만 했다.
문제는 지금 저 존재가 나를 향해 적개심을 보이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
그저 가만히 평온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인데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팔다리가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 느꼈던 평온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거대한 존재를 마주하고 있다는 공포감, 그리고 압도적인 무게감에 짓눌리고 있는 중이다.
'어처구니가 없구나.'
이런 경험은 전에도 몇번 해 본 적이 있다.
나보다 강한 누군가를 만났을 때, 기가 눌리는 경험들.
하지만 이 순간은 그 차원이 조금 달랐다.
'저자가 바로 에인션트 드래곤….'
헤르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저기 가만히 앉아 있는 노인이 바로 에인션트 드래곤이라는 것을.
용의 기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기뻐서 춤을 추던 용의 기운은 이제 미쳐서 폭주를 하기 시작했고, 어서 저 존재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라며 나를 다그치고 있었으니까.
'하하….'
내가 정말 드래곤이라도 된 것일까.
내 다리가 스스로 굽어지기 시작했고, 에인션트 드래곤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내 의지가 아니다.
내 몸이, 내 몸에서 날뛰고 있는 용의 기운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이마를 타고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려갔다.
한참이나 나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로 가만히 있었다.
내 몸의 모든 세포들이 멋대로 몸을 움직여선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순간.
"으음…."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사아아앗!
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던 무거운 공기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허억…."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토해냈다.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던 모양.
그리고.
"일어나시게."
헤르야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고개를 들어 헤르야를 바라봤다.
헤르야 역시 무릎을 꿇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그 순간 미세하게 헤르야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 한 방울을 발견했다.
'…내가 나름 잘 버텼던 것일지도 모르겠어.'
헤르야도 땀을 흘릴 정도면, 내가 혼절하지 않고 버텨낸 게 대견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다시 저 앞에 앉아 있는 노인을 바라봤다.
인자한 눈빛.
하지만 그 무게감은 여전히 쉽사리 생각할 수 없었으니.
"허허…."
그의 입에서 너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인간이로구나. 하지만 인간임에도 우리와 같은 기운을 지니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노인은 헤르야를 바라봤다.
헤르야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이며 긍정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하더냐. 그래. 너의 뜻이 그랬다면 그 결정은 결코 잘못되지 않았을 테지."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헤르야를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하는 저 노인은 과연 이 용인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이가 틀림없으리라.
그리고 다시.
"어르신."
헤르야가 노인을 불렀다.
노인의 하얀 눈썹이 움직이며 헤르야를 바라봤고.
"이자에게 어르신의 검을 느끼게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헤르야가 그렇게 말했다.
그 순간, 나는 환호성을 내지를 뻔했지만 간신히 입을 억눌렀다.
그렇지 않은가.
이 정도의 무게를 지닌 존재로부터 검술을 배울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 평생을 다 바칠 만한 중요하고도 엄청난 기회일지도 모를 일인데!
꿀꺽
나는 노인이 어떤 말을 하게 될지 기대하며 긴장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노인은 침묵을 지키며 잠시 고민에 잠긴 표정으로 눈을 감았고.
나는 흘끗 헤르야를 바라봤다.
나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헤르야가 나를 바라봤고.
헤르야는 그저 미소를 짓고 있을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해 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지.'
물론 그저 나의 희망사항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희망이 틀리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나는 노인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때, 노인이 눈을 떴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저자를 내 앞으로 데려온 것이겠지, 헤르야."
헤르야에게 건넨 물음과.
"예."
헤르야의 짧은 대답.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속으로 됐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쩌어어어어엉!
귓속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떤.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굉음.
'이게 무슨…?'
나는 화들짝 놀라 노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거기엔 노인이 없었다.
아니, 없는 건 노인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 내가 서 있던 그 숲이.
구구구구구-!
'마, 말도 안 되는….'
그 숲이 반 토막이 난 채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이 순간에 감히 추측조차 하지 못한 채 모든 사고 회로가 멈추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