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나무?'
조금은 허탈한 웃음이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녀석의 심장이 씨앗의 모양을 하고 있었던 건 그저 우연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내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이 현상에 대해서 냉철히 파악하고 분석하고, 그리고 인지하는 것.
"으흐흐… 으흐흐하하하!"
나무 안에서는 반복적으로 괴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저 나무 속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
조금 전의 씨앗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보자면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법하다.
씨앗의 주체가 바뀌었거나, 아니면 씨앗이 성체가 되었거나.
아니,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씨앗의 주체가 블러드의 수장으로 바뀌며 동시에 씨앗이 성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상황 말이다.
분명 조금 전 만났던 설계자 중 한 명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저 씨앗을 공격하고 있는데 그 녀석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고 말이다.
'그래. 그쪽의 가능성이 가장 유력해.'
참다 못한 녀석이 지금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으리라는 방향으로 추측의 가능성들이 쏠리기 시작했고.
"으흐흐흐…으흐흐흐하하!"
다시 한번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왠지 모르게 놈의 상태가 불안정하게 느껴진다는 것.
저 웃음소리에서 왠지 모를 혼란이 느껴졌다.
'혹시... 녀석도 큰 리스크를 감당하며 씨앗과 하나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런 내 추측이 정확하다면, 나에게 있어서는 좋은 소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
'놈의 이성이 완전한 상태에서 본래의 힘을 끌어 올린 것이라면 나로서도 굉장히 힘든 싸움이 될 게 분명하지만….'
조금이라도 불안정한 상태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충분히 나에게 승산이 있을 것이다.
내 추측이 정확하기만을 바라며 나는 다시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움직였다.
놈이 완전히 깨어나기 전 조금이라도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다.
붉은 오러가 맹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뻗어 나오는 나무 기둥을 향해 검을 움직였고.
푸각!
검이 거대한 나무의 줄기를 가로질렀다.
역시나 처음 씨앗에서 피가 튀어나왔던 그대로, 나무의 기둥에서도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
지금 놈의 피는 붉은 색에 검은 기운이 짙게 어려 있었다.
타다닷!
오러와 충돌하며 스파크를 일으키는 강인한 사념의 기운.
그 기운은 내 몸을 타고 흐를 정도로 짜릿했지만, 나는 다시 움직였다.
길게 뻗은 오러가 나무를 크게 가로질렀고, 나무가 완전히 반으로 잘렸다.
검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솟구치며 내 몸을 완전히 뒤덮었고.
놈의 피와 맞닿은 나의 살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당황스럽지 않다.
그저 렘을 끌어 올리며 사념을 중화시키고, 피를 털어내고 다시 나무를 향해 움직였다.
나무의 잘려 나간 부분에서는 무수한 촉수들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뿜어져 나온 촉수들은 다시 나무의 형태를 만들며 위로, 더 위로 치솟았다.
그런 과정이 끝난 뒤.
쩌저적!
나무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흐흐…흐흐흐하하하하!"
익숙한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녀석인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탑의 분신.
그리고 블러드의 수장.
그리고 내가 반드시 쓰러트려야 할 최후의 적이 될지도 모르는 녀석.
"흐흐…흐하하하하하하!"
놈은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웃음을 터트리고 있을 뿐이었다.
***
그 무렵, 어비스의 정상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거대한.
아니, 거대하다라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하지만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도마뱀의 머리처럼 생겼지만, 남아 있는 것은 머리뿐.
잘려 나간 흔적 뒤로는 몸통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몸통이 없이 머리만 남아 있는.
얼핏 본다면 당연히 죽어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것의 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커다란 눈동자는 주변을 살피고 있는 듯 외전하며 동공이 팽창되고 수축되기를 반복했고, 거대한 아가리가 꿈틀댔다.
하지만 거기까지.
아무리 움직이기 시작했다고는 해도 그것이 보일 수 있는 움직임은 눈동자를 움직이거나 입을 조금 꿈틀대는 게 전부였다.
크릉- 그르릉-
작은 신음을 흘려 보낸 거대한 머리는 입 사이로 혀를 날름거렸다.
혀 끝으로 붉은 액체가 타고 흘렀고, 바닥으로 흘러내린 붉은 액체는 땅을 적셨다.
치지지직!
붉은 액체가 땅에 닿자마자 땅은 녹아내리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만약 누군가가 그곳에 있었으면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속에 담긴 지독한 독기에 그 즉시 숨이 끊어졌으리라.
하지만 정작 거대한 머리는 개의치 않은 채 더 많은 액체를 흘려보내고, 또 흘려보내고 있었다.
어느새 바닥에는 커다란 구멍이 파였고, 그 구멍 속으로 붉은 액체가 가득 찬 채 넘실거리고 있었다.
한동안 액체를 응시하던 거대한 머리.
잠시 후 녀석은 액체 속으로 혀를 넣었고 휘젓기 시작했다.
잠시 후, 붉은 액체가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액체는 놈의 머리 속으로 스며들며 놈의 잘려 나간 부분을 조금씩 다시 원래 상태로 회복시켰다.
그륵- 그르륵-
놈은 계속해서 거친 숨을 토해내며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
'확실하다. 놈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야.'
반쯤 미쳐 있는 상태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나무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뒤에도 아직 단 한 번도 나에게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을 건넨 적이 없었으니.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
'차라리 잘된 일일 거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뤄보자면, 상대를 가장 손쉽게 처치할 수 있을 때는 당연히 상대가 이성을 잃었을 때.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지 않는 상태라면 반드시 빈틈이 나타나게 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 순간.
번쩍!
놈의 손바닥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나로서도 도무지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찰나의 순간 뻗어 나온 빛줄기는.
콰콰콰콰쾅!
대지를 뒤엎으며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고, 광선이 지나간 자리에는 거대한 협곡이 만들어졌다.
'미친...!'
그 장면을 본 나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
만약 저 광선이 정확히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면 나는 저 광선을 피할 수 있었을까?
아니, 힘들었을 것이다.
조금 전에 분명히 느꼈다.
번쩍이는 그 순간만을 눈으로 포착했을 뿐, 그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으니까.
'...어처구니가 없군.'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놈의 이성이 온전했고, 나를 향해 정확히 조준했더라면 정말로 큰 화를 면치 못했으리라.
'아니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나는 놈을 주시했다.
언제 어떤 공격을 해 올지 모르니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아니, 아니다.'
놈이 공격해 오길 기다려서는 승산은 없다.
그 전에 내가 먼저 놈을….
콰콰콰콰쾅!
'……!'
미처 움직이기도 전, 바로 내 옆으로 광선이 뿜어져 나오며 조금 전과 같은 폭발이 일어났다.
'이걸 어떻게….'
집중을 안 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처음보다 더 신경을 집중하며 놈의 빈틈을 노리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놈의 몸에서 빛이 번뜩이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참….'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이게 정말 녀석의 진짜 힘이라는 건가?
아니다.
이건 놈이 가진 힘의 지극한 일부일 뿐일 텐데.
'그 괴물은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뜻이지?'
감조차 잡히질 않는다.
'젠장. 어쩔 수 없군.'
이렇게 되면 나도 피해를 감수하는 수밖에.
저 광선이 강력한 것은 맞지만 설마 내가 몇 번 공격 당한다고 해서 죽으리라고는 생각되질 않는다.
나 역시 치명상을 피하기는 쉽지 않을 테지만,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놈을 공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
타앗!
발을 굴렀다.
대응, 회피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놈의 공격이 나를 빗겨나가길 바라면서.
아니, 설사 나를 정확히 적중한다고 해도 내 몸이 멀쩡히 움직여 주길 바라면서 놈을 향해 움직였다.
그 순간.
번쩍!
빛이 번쩍였다.
내 시야를 완전히 감쌌다.
역시나 내가 인지하지 못 할 정도로 짧은 찰나였으나 적어도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 녀석의 공격이 내 온몸을 감쌌다는 것을.
그렇게 아주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간 나의 의식의 흐름이 끝이 난 뒤.
콰콰콰콰쾅!
괴성이 울려 퍼졌다.
내가 서 있던 곳을 중심으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내가 걸어왔고 또 걸어가야 할 길이 뒤엎이고 그 사이에서 흙과 모래, 바위 조각들이 허공으로 비산하며 날아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거… 꽤 아프군.'
아팠다.
온몸이 터져 나갈 듯이 괴롭다며 비명을 내지르는 것 같았고, 내 전신에 순식간에 피가 범벅이 된 채로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내가 입고 있던 장비들도 마찬가지다.
찢겨지고 파괴된 갑옷들이 쪼개진 채 바닥에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고, 하늘 위에 부유하고 있는 녀석은 흐릿한 초점으로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놈의 손이 움직였다.
'젠장.'
불행하게도, 놈의 손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은 정확히 내가 있는 방향이었다.
놈의 의식이 완전히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니,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다.
우연이건 필연이건, 결과는 한 곳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놈의 공격은 두 번이나 연속해서 정확히 나를 향해 뻗어 나오리라는 것.
그리고 두 번 연속으로 저 공격을 받게 된다면 내 몸이 온전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
그 순간.
번쩍!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발을 움직였다.
한 번만 더 내 몸이 버텨주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그때.
"……?"
멈췄다.
놈의 손에서 뻗어 나오던 빛이 허공에서 멈춰 버린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멈춘 건, 빛과 놈뿐이 아니다.
나의 의식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나 역시 몸 하나 꿈쩍할 수 없었다.
조금 전 느끼고 있던 모든 고통도 사라졌으니.
지금 내가 이 상황에 대해서 추측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떠오른 메시지는.
[설계자의 축복 효과의 숨겨진 힘이 발휘했습니다.]
[앞으로 5초간 시간이 멈춥니다.]
[설계자들의 당신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04:99
04:03
0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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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흘러가는 시간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내가 가진 능력들을 하나씩 되짚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 능력을 가지고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었다니.'
내가 가진 능력인 텔레포트.
그 능력만 있으면, 이 시간이 멈춘 찰나를 이용해서 놈의 등 뒤에 검을 박아 넣을 수 있을 텐데!
01:00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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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
5초의 시간이 지나간 그 순간.
팟!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조금 전 내가 서 있던 곳에서 몇 번이나 목격했던 어마무시한 폭발이 일어났고.
지금 나는.
푸각!
놈의 등에 검을 박아 넣었다.
타오르는 붉은 오러가 놈의 등을 뚫고 반대편으로 솟구쳤고.
"꺼…억…?"
놈의 고개가 내 쪽으로 움직이며 충혈된 놈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