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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창이 달라졌다-233화 (233/277)

233화

"어때. 마음에 들어?"

설계자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나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괜찮군요. 아니, 좋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요."

내 대답에 설계자들이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나저나 다들 이곳에 모여 있을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설계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껏 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저렇게 가만히 있을 거면 굳이 이 자리에 나올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아, 물론 이유가 있지. 이들도 한가한 친구들은 아니거든."

설계자가 말했고, 그 말을 신호로 삼고 있었다는 듯 다른 설계자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던 중,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설계자 한 명이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구릿빛 피부에 길게 기른 흰색 머리카락이 꽤 매력적인 남자였다.

"한강민."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중후한 목소리에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예."

내가 대답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어비스의 중앙탑을 설계한 설계자요."

"중앙탑…?"

그 말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는 설계자.

하지만 중앙탑이라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그리고 저 설계자는 분명 '이 어비스'의 중앙탑이라고 이야기했다.

지구의 탑이 아닌, 어비스의 중앙 탑!

'그게 무슨 말이지? 이 어비스에도 또 다른 탑이 있다는 말인가?'

잠시 그런 의문을 떠올리고 있던 중.

"이곳 중앙섬 안에 어비스 상부로 올라가기 위한 탑을 설치해 두었소. 다만 그곳은 그 누구도 볼 수 없도록 내가 감추고 있지. 심지어 이 탑의 일부인 그자조차도 그 탑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못하오."

"……!"

어비스 상부로 진입하기 위한 열쇠.

그것에 대한 비밀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그리고 추측하고 있던 대로 중앙섬에 바로 그 열쇠가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중앙섬의 중앙탑을 숨겨 놓았다는 건, 그곳에 접근하기 위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뜻이지 않은가.

"어떻게 해야 그곳으로 갈 수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 씨앗. 그것이 바로 열쇠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씨앗이 열쇠라니?

그게 무슨 말일까.

씨앗을 파괴하면 그곳에서 탑이 솟아난다는 걸까?

아니, 그 전에 그 씨앗은 분명 그 녀석의 심장일 텐데.

아직 그 어떤 것도 이해 할 수 없는 말들의 연속일 뿐.

"이미 당신은 알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 중앙섬은 우리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곳."

"그럴 것이라고 생각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중앙섬에 어비스 상부로 향하기 위한 탑을 설치할 수 있었소. 당신이 살던 곳에는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언이 존재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소?"

설계자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예."

"그자도 분명 우리가 중앙섬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고, 덕분에 중앙탑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을 하고 있지 않는 상태요. 만약 그가 중앙탑의 존재를 알았다면 진즉에 없애 버렸을 테지."

"……."

"하지만 문제는 나 역시도 내가 만들어 놓은 중앙탑을 통제할 수 없고, 다시 개방할 수 없다는 거요. 그 탑을 열기 위해서는 씨앗을 파괴해야 하오. 그 씨앗이 파괴되면 중앙섬에 대한 모든 통제가 사라질 테고, 내가 다시 중앙탑을 어비스에 드러낼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렇군요."

더 복잡한 이야기들이 있을 테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더 물어봐야 내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일 게 분명하다.

어떻게 그 녀석의 눈을 속여 탑을 만들었는지, 어떤 식으로 탑을 숨기고 있는지 등.

사실 지금 내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정보들도 아니고 말이다.

'지금 중요한 건, 역시 그 씨앗을 파괴하는 것이 어비스 상부로 올라가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이지.'

그거면 충분하다.

"그럼, 그 씨앗만 파괴하면 바로 어비스를 오를 수 있는 겁니까?"

"이론상으로는 그렇소."

"이론상?"

"그렇지. 하지만 생각해 보시오. 만약 그 씨앗을 파괴한다면, 그자의 분신이 가만히 있지는 않지 않겠소?"

"……."

맞는 말이다.

그 씨앗을 파괴하고, 중앙탑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녀석이 바로 내가 있는 곳으로 날아올 게 뻔하지.

하지만 한 가지 더 걸리는 게 있다.

"왜 그 녀석은 움직이지 않는 겁니까."

"……?"

내 물음에 고개를 갸웃하는 설계자.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심장을 내가 공격하고 있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왜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느냐는 겁니다."

"흐음…."

짧은 한숨을 내쉬는 설계자.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도 그 이유를 알고 있지 못하는 모양이다.

"……."

나 역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사실이다.

대체 그 녀석은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무슨 꿍꿍이가 있거나, 아니면 놈에게 큰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다.

'무엇이 되었건… 곧 놈과 만날 수 있게 될 거다.'

하지만 나도 알고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라는 것도.

그리고 이번 싸움은 절대 끝이 아닌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것까지.

'쉽지 않겠지만….'

분명히 해야 할 일.

그리고 그동안 나의 모든 삶이 향했던 종착역.

'가 보자. 무엇이 있건, 무슨 일이 생겨나건.'

그렇게 다짐하고 있던 중.

"자, 어서 밥이나 먹자고. 가서 또 힘들게 싸워야 할 텐데. 가기 전에 맛있는 식사 정도는 해 줘도 괜찮지 않겠어?"

설계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 무렵.

'…….'

한 남자가 인상을 미간을 좁힌 채 앉아 있었다.

'일이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다.'

그는 바로 탑의 분신.

남자의 눈동자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놈이 정말 내 심장을 파괴해 버린다면….'

그때는 정말 심각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의 심장은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았다.

계획대로라면 중앙섬에서 꾸준히 사념을 흡수하며 더욱더 성장하고 심장이 완전히 성장했을 때 자신의 일부와 합쳐져야 했을 것인데.

'지금 벌써 심장이 깨어났다면… 지금 심장은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일 것인데…!'

문제는 지금 당장 자신이 나서 봐야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심장과 본체의 극이 일부일 뿐인 자신이 힘을 합친다고 해봐야 강민을 완전하게 막아서리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

'젠장…!'

남자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모든 계획들이 뒤틀려 가고 있다.

그 심장만 완전히 자랐다면, 못 해도 본체의 힘의 절반 정도는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된 이상….'

남자는 마지막 남은 수를 떠올렸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심장과 자신을 합치는 것.

그때는 어떤 결과가 일어나게 될지 자신도 확신할 수 없다.

'극도로 불안정한 심장을, 불안정한 상태의 내가 흡수했다가는 그때는 정말 내가 폭주해 버릴지도 모른다.'

폭주.

어쩌면 스스로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를지도 모른다는 말.

'….'

하지만 방법은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강민을 통제하지 않고 가만히 뒀다가는 심장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이 어비스에 뿜어져 나오고 있는 모든 사념들이 흩어질 테고, 자신의 본체에도 큰 타격이 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래. 상황을 이렇게까지 망가트린 네 놈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 순간, 남자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

콰콰콰콰쾅!

다시 돌아온 중앙섬.

이곳은 내가 떠나가기 전의 풍경과 그대로였다.

정말 시간을 멈췄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귀를 틀어막은 채 괴성을 내지르고 있는 씨앗… 이었던 인간의 고함과 함께 사방에서 거센 폭발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네 놈이 바로 열쇠라고 했다.'

나는 씨앗을 바라봤다.

그리고 검을 움직였다.

[설계자의 축복 효과가 적용됩니다.]

[모든 탑의 저주를 지닌 존재들에 대한 공격력이 크게 증가합니다!]

콰콰콰콰!

그런 메시지와 함께 허공에 흩날리는 사념의 기운들이 내 오러와 충돌하며 광풍을 일으켰고, 나는 나와 놈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보호막을 향해 검을 움직였다.

그 순간.

콰지지직!

거센 스파크가 허공에 튀어 올랐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 펼쳐졌다.

보호막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오던 이전과는 달리, 이 순간 내 오러가 보호막을 파고들기 시작한 것!

콰뜨드득!

보호막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고, 기어코 검이 보호막을 파고들었다.

콰콰콰쾅!

보호막 속으로 파고든 검이 만들어낸 틈 사이로 다시 한번 거센 사념이 폭풍처럼 쏟아져 나왔다.

허공에 퍼져 있는 사념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짙은 사념들!

그리고 그 순간.

파앗!

놈이 눈을 떴다.

귀를 틀어막은 채로 나를 응시하는 녀석의 눈동자는 섬찟할 정도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고.

'……!'

울음을 멈췄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뒤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겁에 질린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몸은 어린아이지만 마치 다른 사람이 들어와 있는 듯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복잡한 것들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나는 다시 검을 움직였다.

쾅! 콰콰쾅! 콰콰아앙!

몇 번이고 보호막을 두드렸고, 보호막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군데군데에서 일어난 균열과 보호막의 파편이 땅으로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파편들은 증발하듯 허공으로 흩어졌으니.

'됐다.'

보호막을 파괴하고, 놈의 몸이 드러났다.

나는 지체없이 놈을 향해 몸을 날렸고, 검을 움직이며 놈을 공격했다.

콰직!

놈의 팔을 잘라냈다.

하지만 놈은 요동하지 않았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듯 가만히 서서 그저 나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그 순간.

"…아프…잖아…."

놈이 말했다.

나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고, 놈의 잘려 나간 팔에서 다시 촉수가 뻗어나오며 팔의 모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너는… 선을 넘었어… 너무 많은 선을 넘어 버렸어…."

놈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

나를 더 놀라게 만든 건, 놈의 목소리가 조금 전 들었던 아이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아니다.

지금은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다시 검을 움직였다.

놈을 베어내기 위해서.

단 일격으로 놈을 완전히 반 토막 내고, 숨겨져 있는 중앙탑을 찾아내기 위해서.

부우웅!

검이 놈을 향해 날아들었고.

콰직!

놈의 몸을 두 동강 냈다.

놈의 몸은 반으로 쪼개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끝인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끼야아아아악-!

어디선가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쿠구구구궁!

중앙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했지만, 간신히 검으로 바닥을 짚으며 쓰러지지 않았다.

나는 바쁘게 주변을 살폈다.

무언가.

거대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니다.

거대한 무언가는 이미 와 있었다.

"으…으흐흐흐…으으으아하하하하!"

내 앞에.

두 동강 난 채 쓰러져 있는 저 씨앗의 틈새에서 거대한 나무가 솟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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