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무슨 일이지?'
내 검을 막아낸 손은 씨앗의 손.
그리고 그 손은 명백히 사람의 손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의 손보다는 너무 유연해 보였고, 마치 고무 인간의 손처럼 관절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정도.
그게 끝이 아니었다.
꺄아아아악!
끝없이 쏟아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반대쪽에서는 팔 한 개가 더 뻗어 나왔다.
처음에는 씨앗의 색과 같은 짙은 갈색이었지만, 그 색은 이내 밝은 피부색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쩌저적! 쩌적! 콰콰쾅!
씨앗에서 뻗어 나오기 시작한 촉수들은 점점 다리 모습으로 변했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이런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씨앗의 몸뚱이가 천천히 인간의 형태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무슨….'
그저 심장이 아니었다는 건가.
조금 전 씨앗이 내질렀던 비명이 정말 저 씨앗이 자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
조금은 혼란스러운 마음이 더해지고 있던 중.
"그으으으으…."
인간의 형태로 변한 씨앗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조금 전 들었던 어린아이의 목소리와 같았다.
"으으…으으으으으아아아!"
양손으로 귀를 틀어 막고 괴성을 지르는 씨앗….
아니, 씨앗이었던 인간의 모습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면서 씨앗은 완전한 인간의 형태로 변했다.
흰색의 피부와 함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작은 몸.
하지만 성별을 구별할 만한 어떤 흔적도 없다.
마치 백색의 대리석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은 모양새다.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내가 처치해야 할 적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지체없이 녀석을 향해 발을 굴렀고, 검을 움직였다.
하지만.
타아아앙!
검이 허공에서 가로막혔다.
놈의 주변으로 반투명한 붉은 막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젠장….'
반투명한 막은 사념이 응집된 보호막으로 보였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호막을 공격했지만, 렘의 기운이 크게 응축된 오러에도 불구하고, 사념의 보호막은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
'젠장.'
첩첩산중이다.
도대체 나를 얼마나 귀찮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려는 것인지.
'본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가 있었군.'
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는 것이겠지.
아니, 어쩌면 나타날 수 없는 상황일지도 모르고.
사실 이런 예측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벌써부터 이 정도라면 앞으로 정말 쉽지 않겠어.'
본체가 아닌 일종의 분신이 가진 사념의 힘이 이 정도일진대.
정말 녀석의 본체와 마주하게 된다면 얼마나 골치가 아파질지.
지금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다.
'심지어 이 어비스에 있는 녀석은 본체가 아닐 것이다.'
녀석의 본체는, 분명 이 어비스의 꼭대기에 놓여 있을 테니까.
'그때까지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한다는 말이냐.'
아니, 내가 더 강해질 수 있기는 할까?
무엇을 통해 어떻게 강해져야 할지.
그리고 나에게 앞으로 더 강해질 여력이 남아 있기는 한 것일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정말 골치가 아프군.'
하지만 포기할 순 없다.
어떻게 해서든 저 방어막을 뚫어낼 방법을 찾아내는 수밖에.
이 상황을 지켜보자니 지금 저 녀석은 나를 공격할 의지는 없어 보인다.
사념으로 보호막을 만든 채 저 안에 숨어서 귀를 틀어 막고 괴성만을 내지르고 있을 뿐.
'하지만 언제까지 저렇게 가만히 있으리라고 확신할 순 없다.'
녀석이 제대로 움직이기 전, 내가 먼저 놈을 공격해야 한다.
'내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할 테지만….'
지금 당장 내가 가진 능력 중, 녀석을 공략할 만한 뾰족한 수가 생각나는 무기는 없다.
우선은 저 벽을 무너트리기 위해 공격에 공격을 거듭할 뿐!
있는 힘을 다해서,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오러와 렘, 용의 기운을 동원해서 말이다.
콰콰콰콰콰!
남아 있는 모든 기운을 끌어 올릴 순간 나를 중심으로 거센 파동이 몰아치며 놈의 보호막과 충돌했다.
그 사이에서 거센 소용돌이가 피어오르며 보호막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뿐.
저 보호막을 뚫어내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고.
나는 단숨에 다시 보호막을 향해 치달리며 검을 움직였다.
콰콰콰쾅!
검이 닿은 부분에서 거센 폭발이 일어났다.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위력으로 놈의 보호막을 내리쳤지만, 보호막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단단하게 응축되어 있기에 이 정도의 위력으로도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인지.
'답도 없군, 정말.'
새로운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벽을 넘고 산을 넘어 여기까지 왔지만, 이 순간에 내 눈앞에 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그렇게 몇 번이고 보호막을 두드리고 있던 중.
파아아아앗!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 몸에서도 아니고, 아직도 귀를 틀어막은 채 괴성을 내지르는 녀석에게서도 아니다.
나와 놈의 사이.
그 한 가운데에서 맹렬한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며 나의 시야를 완전히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
"오랜만이야."
내 눈앞에 드러난 풍경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전에도 한 번 와본 적 있는 곳.
그리고 나를 향해 오랜만이야, 라고 담담히 말하는 목소리 역시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다.
"……."
이게 또 무슨 갑작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라는 말인가.
내 눈앞에 서 있는 건, 탑의 설계자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설계자'들.'
"조금 갑작스러웠나?"
설계자는 태연하게 말했다.
"많이… 갑작스러웠습니다만."
"하핫, 미안!"
저 대책없는 천진난만함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시선을 천천히 돌렸다.
설계자의 뒤에 서 있는 다른 존재들.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저들이 다른 탑의 설계자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가.
설계자와 함께 나타난 존재들이 다른 탑의 설계자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반갑네."
"반가워요."
"……."
나를 보며 한 마디씩 건네는 설계자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엔 너무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 자. 다들 이리 와서 식사나 잠깐 하시지요?"
그때 설계자가 말했다.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 말이다.
이 와중에 식사라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걱정 마. 네 쪽의 시간은 잠시 멈춰 있을 테니까."
"……?"
시간을 멈추다니?
그런 게 가능한 일이라는 말인가?
"어쨌든… 저 어비스는 우리가 만든 공간이니까. 잠시 정도라면 괜찮아. 너도 힘들 텐데 밥이나 한 끼 하라고. 한국인은 밥심 아니겠어?"
"……."
항상 내 말문을 막히게 하는 여자다.
밥심이라니, 정말.
그래도 어쨌거나 시간을 멈춰놨다는 저 말이 거짓말일 리는 없을 테고.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많이 지쳐있던 상황이었으니.
핑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천천히 식탁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끼익-
의자를 꺼내 자리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꽤 화려한 음식들이 차려 있었고.
먹음직스러운 향기에 잠시 입에 침이 고일 정도였다.
이렇게 훌륭한 음식을 먹어 본 게 얼마 만인지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이다.
"뭐 해? 어서 먹어. 너를 위해 준비한 거거든."
어느새 식탁 주변에 둘러앉은 설계자들과, 내 맞은편에 앉아서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
나는 말없이 음식 한 점을 입 안에 넣었다.
그 순간.
'아….'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음식의 맛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맛봤던 그 어떤 음식보다도 훌륭했다.
사실 그동안 내가 먹어봤던 음식이라고 해 봐야 딱히 고급스러운 음식이 없었기도 했겠지만.
'그건 그렇고.'
음식을 한 입 씹어 삼키자마자 내 몸에 누적되어 있던 모든 피로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곳곳에 나 있는 상처와 흐르던 피 역시도 씻겨 나갔다.
마치 고급 포션을 복용한 것만 같았다.
"어때. 괜찮아? 우리가 꽤 열심히 준비한 건데."
설계자의 말에 그 옆에 앉아 있는 다른 설계자들도 어깨를 으쓱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를 향한 시선들이 제법 따뜻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좋습니다. 맛도 그렇고…."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래. 평범한 음식은 아니니까."
역시나.
내 속을 읽고 있다는 듯한 저런 말들.
'그건 그렇고… 용의 기운으로도 저들의 역사는 읽어낼 수가 없어.'
저들로부터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완전한 무(無).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인지 내가 읽을 수 없는 것인지까지는 나도 알 수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건.
"단지 식사를 하라고 여기에 부른 건 아닐 텐데요."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름 중요한 상황 앞에서 갑자기 나를 이곳에 불렀다는 건, 분명 중요한 일이 있다는 말일 터.
심지어 모든 설계자들이 다 모여서 나를 기다렸다면 말할 것도 없을 테지.
하지만.
"응? 밥 먹으라고 부른 건데?"
설계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김을 빠지게 만들었다.
정말 저 여자는….
"먹어, 먹어. 마음 편하게 먹으라니까. 제발!"
설계자가 말했다.
그리고 자신도 앞에 있는 음식을 떠서 입에 넣었고, 다른 설계자들도 마찬가지다.
"……."
그래.
원래 저런 사람… 아니 설계자였지.
우선은 하라고 하는 대로 하는 게 맞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다 보면 무언가 답이 나올 테니까.
나는 설계자의 말대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고기와 샐러드, 그리고 와인과 각종 음식들.
음식들을 하나둘씩 떠먹고 있으니, 남아 있던 모든 피로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더 먹었다.
맛있었고, 몸의 피로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짐과 피로들마저도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가벼워졌다.
몸과 마음 모든 게 가벼워지고 새로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내가 짊어졌던 모든 짐들이 가벼워졌고, 압박감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뭘 그렇게 악착같이 버텨왔었는지.
그때였다.
[설계자의 축복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능력 '설계자의 축복'을 획득했습니다.]
[설계자의 축복]
>탑을 설계한 설계자들의 축복
>이 탑의 저주가 깃든 모든 존재에게 100% 추가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뭐…?'
갑작스레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능력이 갑자기….'
그저 음식을 먹고 있었을 뿐인데 능력이 생기다니.
그리고 그 능력은….
'이 탑의 저주가 깃든 이들에게 추가 피해…?'
탑의 저주라고 함은, 분명 사념을 이야기하는 것일 테고.
그 말은, 블러드 플레이어를 비롯하여 사념을 가지고 있는 모든 존재를 상대할 때 2배가 더 강해진다는 뜻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 보호막도….'
분명 사념으로 이루어진 보호막이었다.
어쩌면 이 능력으로 보호막을 찢어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든 순간, 웃고 있는 설계자의 얼굴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