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효과가 좋군."
괴성을 내지르는 녀석을 향해 내가 한 마디 던져줬다.
놈은 분에 못 이긴 채로 다시금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잘려 나간 녀석의 칼날은 이전처럼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잘려 나간 틈새에서 사념의 기운이 빠르게 새어 나오기만 할 뿐.
"뭐, 뭐… 이게 왜 이래!"
녀석의 당황한 외침이 내 귀를 두드린 그 순간.
탓!
발을 굴렀다.
놈과 순식간에 가까워진 나는 검을 움직였다.
파직!
붉은 오러가 놈의 몸을 가르고 지나간 순간.
콰콰콰콰콰!
놈의 잘려 나간 상처에서 사념이 미친 듯이 뿜어져 나왔다.
몸에 대체 얼마나 많은 사념을 응축하고 있었던 것인지.
하지만 역시나.
처음과 같이 뿜어져 나온 사념이 촉수로 변하는 일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촉수로 변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는 있었지만 결국 촉수로 변하지 못하고 허공에서 사념이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을 뿐.
'역시 렘의 힘 덕분일 거다.'
렘과 만난 사념은 힘도 쓰지 못한 채 무너지기 일쑤였다.
'제대로군.'
확실한 효과가 입증된 순간이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는 없다.
나는 놈을 향해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놈의 몸에 상처가 커져갈수록 놈이 소환한 병사들도 점점 무너져가기 시작했으니.
마지막.
콰직!
검이 놈의 몸을 완전히 가로지른 순간.
"끄…끄으으으으아아악!"
놈이 괴성을 내지르며 몸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풀썩!
무릎을 꿇은 플레이어는 나를 바라봤다.
"너… 너…"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쿵!
이내 놈은 완전히 쓰러졌고, 놈이 만든 병사들도 하나씩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쿠드득! 쿠득!
놈의 몸에서 뻗어 나온 촉수들이 허공에서 나풀댔지만, 그 움직임마저도 머지않아서 사라졌다.
그렇게 놈의 숨통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생각한 그 순간.
[포식할 수 있는 스탯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눈앞에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
이런 메시지는 처음이다.
심지어 그동안 블러드의 플레이어들을 처치했을 때도 스탯을 포식하지 못했던 적은 없었건만.
'역시… 범상치 않은 녀석인 건 분명해.'
아니, 어쩌면 놈이 범상치 않은 게 아닐 수도 있다.
정말 범상치 않은 건.
나는 씨앗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바로 저것.'
저 씨앗에서 뻗어 나온 촉수가 놈의 몸에 사념을 불어 넣었고.
놈의 스탯을 흡수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부딪쳐 보면 알겠지.'
나는 씨앗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휘릭!
씨앗에서부터 촉수가 뻗어 나와 나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
"대, 대단하십니다…!"
몰른과 해츨링이 도착한 곳은 한순간에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한참 블러드 플레이어들의 공격에 골머리를 쌓고 있던 중, 알렉스의 지시로 몰른과 해츨링이 나타나자마자 블러드 플레이어들은 둘의 공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야말로 무차별적인 폭격이 쏟아졌고, 몰른과 해츨링의 공격이 지나간 자리에는 재밖에 남지 않았다.
특히나 해츨링의 화염 마법은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이 감히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듣기로는… 한강민이라는 분과 함께 다닌다고 들었는데…!"
이제 어비스의 플레이어들이라면 강민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
어비스를 들썩이게 만드는 사건에 몇 번이나 연루되었으니까.
그것을 떠나서도 제네시스, 오디에세우드, 템플 등.
어비스에서 날고기는 집단들의 수장들조차 강민 앞에서 쩔쩔맨다는 소식이 어비스 전역으로 전해진 이상.
강민을 한 번이라도 만나고 싶어 하는 플레이어들이 줄을 서고 있을 정도였다.
"헤헤헤…."
몰른은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도 천진난만한 그 표정에 오히려 몰른을 마주하고 있던 플레이어가 흠칫 놀랄 정도였다.
"주인… 아니…. 강민…씨는 멀리 가 있으세요오오…."
주인님이라는 말을 삼킨 몰른이 말했다.
'주인님이 다른 곳 가서 주인님 소리는 하지 말라고 하셨지이!'
몰른은 강민이 했던 말을 다시금 상기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그렇군요…."
조금은 아쉬운 듯한 플레이어의 반응.
하지만 몰른은 이내 씩씩하게 입을 열었다.
"어비스의 평화는 걱정하지 마세요오오! 저희 주인… 아니! 강민씨가 지켜 주실 겁니다아아!"
몰른의 외침에 플레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강민!
그 이름이 얼마나 든든하게 느껴지던가.
어비스 곳곳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한 블러드 플레이어들의 공격에도 거대 길드의 길드장들은 조금만 버티라고,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플레이어들을 독려했고.
그런 말 뒤에 항상 한강민이라는 이름이 따라 나왔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의 이름이 이렇게나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본인들조차 놀라움을 느끼던 중이다.
그때 몰른이 해츨링을 바라봤다.
"빨리 가자아아! 다른 곳에도 가서 할 일이 많아아!"
"꾸우웅!"
몰른은 천천히 해츨링의 등 뒤에 올라탔고, 그 즉시 해츨링은 마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말했던 대로 그다음 블러드 플레이어들의 공격이 거센 곳으로 가기 위해서다.
고오오오!
해츨링이 마력을 끌어올린 그 순간, 해츨링과 해츨링의 등 위에 올라 있던 몰른이 사라졌다.
해츨링의 텔레포트 덕분이었다.
그렇게 둘이 사라진 자리에 모여 있던 플레이어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한강민… 정말 어떤 사람일까.'
해츨링과 몰른도 저렇게 강한데, 저 둘을 이끌고 있는 한강민이라는 자는 도대체 얼마나 강할지.
그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카카카카캉!
쉴 새 없이 나를 향해 쇄도하는 씨앗의 촉수들을 정신없이 쳐내며 이 상황을 주시했다.
'씨앗이 자아를 가지고 있는 걸까?'
그 정도로 촉수의 움직임은 유동적이었고, 마치 살아 있는 적을 눈앞에 두고 싸우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면 녀석이 직접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지.'
정말로 이 씨앗이 그 녀석의 심장이라면.
그리고 자신의 심장을 먼 곳에 떨어트려 놓을 수 있는 녀석이라면, 심장을 조종하는 일 따위 못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저 씨앗이 뻗어내는 촉수는 내게 큰 위협이 될 수 없었다.
렘과 용의 기운, 그리고 오러가 합쳐진 내 공격력은 특히나 사념으로 똘똘 뭉쳐 있는 저런 촉수 따위는 어렵지 않게 베어낼 수 있었으니까.
파직! 콰직!
검을 휘두를 때마다 촉수가 잘려 나간 채 허공에 튀어 오르기 일쑤였다.
콰콰콰콰!
잘려 나간 촉수 사이에선 역시나 사념이 폭포수같이 쏟아졌지만.
이제는 렘의 기운이 스스로 사념을 쳐내며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념이 짙게 흩뿌려지며 중앙섬을 가득 메우고 있다고 해도, 사념은 조금도 나를 위협할 수 없었다.
문제는 저 씨앗 속에서 뻗어 나오는 촉수는 끝도 없이 불어나고 있다는 것.
아무리 잘라내고, 잘라내도 촉수는 끊임없이 뻗어 나오며 나를 공격했다.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겠군.'
언제까지고 촉수나 잘라내며 시간을 낭비 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비스 곳곳에서는 블러드 플레이어들과의 싸움이 끝없이 벌어지고 있을 텐데 말이다.
'내가 여기에서 시간을 지체할수록 피해는 더 커질 수밖에 없어.'
분명 어비스에서도 내로라하는 플레이어들이 활약하고 있을 테지만, 녀석들에겐 커다란 무기가 있다.
바로 사념.
이 지독한 사념에 일반 플레이어들이 침식당하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끔찍한 대참사가 벌어질지도 모를 일.
'정면 돌파해야 한다.'
이 순간에도 나를 향해 쏟아지는 촉수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족히 어림잡아도 20개는 훌쩍 넘어갈 만큼 많은 숫자의 촉수들이 전방위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 방법은 하나다.'
나는 다시 발을 굴렀다.
그리고 순식간에 씨앗을 향해 도약했다.
그 사이로 촉수들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촉수의 위력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렘의 기운과 워낙 단단한 내 방어력 덕분에 최대한으로 충격을 완화할 수 있었고.
씨앗의 코앞까지 도착한 나는 다시 재빠르게 검을 움직였다.
콰가가가각!
검이 씨앗을 가르고 지나간 자리에서 붉은 액체가 튀어 올랐다.
'피.'
액체는 분명히 피였다.
씨앗에서 피가 튀어 오른다니.
만약 내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면 이 기괴한 장면에 충격을 받았을 테지만, 놀랄 이유는 없다.
'단지 저게 단순한 씨앗이 아니라는 확신만 더해줄 뿐이지.'
구구구구!
피가 튀어 오름과 동시에 씨앗은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만 같았고, 진동하는 중에도 고동이 울려 퍼지며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
끼에에에엑!
어린아이의 비명 소리 같은 외침이 귀를 두드리며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저 씨앗이 풍겨내는 사념보다도, 저 씨앗이 내지르는 비명에 더 고통스러울 정도로.
나는 이를 악물고서 다시 씨앗을 향해 공격했다.
검이 움직일 때마다 씨앗의 곳곳에서 상처가 생겨났고, 그 사이에서 피가 무수히 뿜어져 나왔다.
퍼더덕!
씨앗의 피가 얼굴에 닿았다.
치지직!
씨앗의 피 속에 담겨 있는 짙은 사념의 기운이 피부를 녹여내는 것만 같았지만, 렘의 기운으로 인해서 사념의 기운은 금세 중화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졌고.
나는 다시 씨앗을 향해 검을 움직였다.
내가 소환했던 소환체들도 어느새 씨앗으로 달려들어 엉겨 붙은 채 자신의 몸이 타들어 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서 끝없이 씨앗을 공격했고.
씨앗 역시도 이전보다 열 배는 더 많은 촉수들을 뿜어내며 소환체를 떼어내고, 나를 묶어내기 위해 갖은 힘을 쓰고 있었으니.
'더, 더 많은 힘이 필요해.'
나는 렘과 오러, 그리고 용의 기운을 있는 대로 꺼내 들었다.
검이 더 붉은빛으로 물들었고, 그와 동시에 오러의 길이는 더욱더 길어졌다.
길어진 오러 블레이드의 길이는 씨앗을 단번에 베어 버릴 정도로 뻗어 나갔고.
부웅!
나는 오러 블레이드를 하늘 위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파직!
씨앗을 향해 크게 내려찍었다.
오러 블레이드가 단숨에 씨앗의 중심을 관통했고, 거대한 씨앗 전체를 이등분해 버렸으니.
콰콰콰콰콰!
씨앗 내부에 응축되어 있던 짙은 사념과 함께 씨앗의 피가 부수처럼 치솟기 시작했다.
끔찍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마나 거대한지, 소환체들은 비명소리를 버티지 못하고 온몸이 터져나가기 시작했고.
나 역시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은 통증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은 찢겨진 채 피가 흐르는지 혀끝에서 비릿한 향취가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참고, 버티며 나는 다시 검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좌에서 우로.
씨앗을 갈라버리기 위해 검을 움직이려던 그 순간.
카아아아앙!
무언가 검을 막아섰다.
그건, 손이었다.
하지만….
'이게 대체 무슨….'
검을 막아낸 건, 다른 누군가의 손이 아니라.
'씨앗의 손…?'
말 그대로다.
다짜고짜 씨앗에서부터 뻗어 나온 손 한 개가 내 검을 막아낸 것이었다.
그것도 맨손으로 오러를 붙들고 있는 손.
'어처구니가 없구나,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