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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창이 달라졌다-229화 (229/277)

229화

"……."

설명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굳이 나타나 나를 막아선다는 건, 저 녀석이 블러드의 플레이어라는 걸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역시. 내 생각이 정확했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게 너희에게 있어서 꽤 중요한 물건인가 보군. 그렇지 않은가?"

내 말에 남자 역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한 말을 되묻는 걸 보면 시답잖은 대화를 선호하는 편인가?"

"그럴 리가."

그렇게 대답하는 즉시 나는 움직였다.

대화 따위는 필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부우웅!

붉은빛이 어른거리는 오러가 맹렬한 기세로 놈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 순간.

쿠우웅!

내 앞을 다시 한번 막아선 거대한 병사.

이번에 녀석은 자신이 들고 있는 커다란 검을 움직였다.

부웅!

공기를 가르며 나를 향해 날아드는 대검.

나는 피하지 않고 검을 움직여 녀석의 공격을 막아냈다.

콰앙!

거센 파공음과 함께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깨지지 않았어.'

처음에는 단 일격으로 소환된 병사의 몸통을 잘라 버렸음에도, 이번에 녀석은 내 검을 막아냈다.

놈의 검에는 작은 흠집이 나 있는 정도로 멈췄을 뿐, 더 이상의 피해는 입지 않았다.

구구구!

나와 검을 맞대고 있는 상태로 놈은 반대쪽에 들고 있는 커다란 방패를 움직였다.

방패가 엄청난 기세로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검을 떼어낸 채로 바닥을 굴렀다.

쿠웅!

놈의 무거운 검이 바닥을 내리찍었고, 내가 피했던 자리를 향해 녀석의 방패가 쏟아져 내렸다.

콰콰쾅!

방패가 바닥을 내리친 순간 굉음과 함께 섬 전체가 크게 출렁였다.

그때였다.

패애애앵!

나를 향해 쏟아지는 또 하나의 파공성.

나는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시선을 급히 돌렸다.

'헛!'

어느새 나도 모르게 모습을 드러낸 또 하나의 병사.

이번엔 창을 들고 있었다.

검을 들고 있는 병사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다란 병사는 웬만한 성인의 몸통보다 두꺼운 창을 가볍게 움직이며 나를 공략해 들어왔다.

카카카캉!

놈의 창을 검으로 받아냈다.

덩치에 비해서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놈의 진짜 무서운 점은 힘이 아니라 속도였다.

파바바박!

저토록 거대한 창을 수수깡 휘두르듯 내지르는 병사와, 그 옆에서 검과 방패를 움직이며 나를 위협하는 병사까지.

양쪽에서 동시에 쏟아져 들어오는 공격에 잠시 혼란이 일기도 했지만.

이내 블러드 플레이어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얄팍한 놈.'

정작 본인은 저 먼 곳에서 떨어져서 마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이게 저 녀석의 능력인 건가.'

소환능력.

지금까지 놈이 보여준 행동으로 봤을 때 그쪽이 가장 유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이 중앙섬에 직접 나를 막으러 왔다는 건, 분명 블러드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강자라는 게 확실할 테니까.

'고작 이 정도의 능력으로 나를 막으러 왔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잠시 쏟아지는 공격에 혼란이 일긴 했다지만, 녀석들은 결코 내 상대가 될 수 없다.

그 순간.

키리리릭!

크르르릉!

저주받은 홉 고블린의 외침과 지배자의 권능을 사용했고, 스무 마리의 소환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환에는 소환으로 응하겠다는 나의 생각이었고, 스무 마리의 소환테는 순식간에 두 기의 병사들의 몸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아아아!

그으으어어!

두 기의 병사는 자신들의 몸을 올라타고 갑옷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소환체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고, 허공에 수많은 핏물들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한시름 놓은 나는 숨을 돌리며 블러드의 플레이어를 바라봤다.

'…끔찍한 놈이로군.'

용의 기운을 통해서 바라본 플레이어는 끔찍한 괴물이었다.

인간의 탈을 쓴 악마가 저럴까.

인간적인 감정이란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존재.

저 남자에게 있어서 모든 인간이란 자신의 먹잇감이나 장난감 정도로밖에는 비치지 않았다.

'내가 할 말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모든 감정들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존재였다.

공허한 눈빛과 창백한 안색이 그 사실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쿵! 쿠우웅!

그때 두 기의 병사가 모두 고꾸라졌고, 내 옆으로 스무 마리의 소환체들이 다가와 섰다.

"뭘 그런 눈으로 바라보나."

남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차피 너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인 것 같은데."

"……."

아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녀석이 저런 말을 꺼냈다.

"너나 나나 인간을 도구로 바라보는 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단 말이야."

그러면서 입꼬리를 흉물스럽게 들어 올리는 남자.

"…그럴지도 모르지."

"아쉬워. 정말 아쉽단 말이야."

나를 중심으로 천천히 원을 그리며 걷기 시작한 남자가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왜 내가 너와 싸워야 하는지 나는 이해 할 수 없어. 나와 이렇게 비슷한 인간은 정말 오랜만이라는 말이지."

"……."

나는 그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남자의 모든 행동을 주시했다.

"그렇지 않나? 너와 내게 손을 잡는다면 얼마나 달콤할지… 생각해 보라는 말이야."

"글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조금만 더 들어 볼 생각이다.

지금 저 녀석은 나를 향한 살기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내가 저 녀석에게 호기심을 느꼈던 것처럼 분명 저 녀석도 나에게서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아니, 내가 느끼고 있는 것 이상으로.

어쩌면 저것이 저 녀석의 호감 표현 방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왜 너 같은 녀석이 굳이 벌레들과 어울리는 거지? 정의의 사도 놀이라도 해 보고 싶은 건가?"

녀석이 멈춰 섰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본다.

공허했던 눈빛에 어느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자,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건 어떻겠나. 우리의 손을 잡고 벌레들을 짓밟는 거다. 달콤하지 않나? 짜릿할 것 같지 않나?"

킁킁

놈이 코를 킁킁댄다.

그리고 눈을 감고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피냄새가 나. 지독한 피냄새가. 네가 무슨 생각으로 벌레들의 편에 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부정할 수 없는 괴물이야."

번쩍!

다시 눈을 뜨고 양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자… 생각해 봐라. 너는 더 강해질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너는 힘을 갈구하고 있어. 더 강한 힘을 갈구하고 있는 괴물 중의 괴물이야. 나는 알 수 있어! 네가 말하지 않아도… 네가 부정하려 해도… 나를 속일 수는 없단 말이야!"

기어코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크… 크흐흐…."

웃기 시작했다.

"크흐하하! 어때! 내게 와라! 내 손을 잡아라! 그리고 그를 만나러 가자! 너는 더 강해질 수 있다! 더 강해지고 더 강해져서 수많은 벌레들을 짓밟으며 군림할 수…"

콰직!

내 주먹이 놈의 면상을 짓이겼다.

"커…억…?!"

더 이상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쿠우웅!

놈의 몸이 바닥에 처박혔고.

부우웅- 콰직!

내 주먹은 다시 한번 놈의 면상을 짓이겼다.

놈의 안면이 크게 일그러졌고.

"커흑!"

놈이 피를 쏟아냈다.

그리고 나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너도 좋… 잖아…? 그렇잖아…? 아니야…? 흐흐… 흐흐흐흐하하하!"

확실히 제정신은 아닌 녀석이다.

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부끄러운 거구나, 그렇지! 괜찮다! 부끄러워 할 필요가 어디 있어! 흐흐흐흐…!"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나는 저 녀석이 저렇게까지 인간의 모든 감정을 지워버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외로웠던 것이군.'

자신과 같은 종류의 인간을 태어나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 절망감과 외로움.

수많은 이들에게서 태어난 수간부터 배척받아 온 좌절감.

그 모든 과정들이 얽히고 얽혀 지금의 괴물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만난 순간, 놈은 어쩌면 어두운 세상에서 한 줄기 빛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내가 빛이라고 하기엔… 내 스스로의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 녀석에겐 어쩌면 내가 빛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자신과 비슷한, 어쩌면 똑같을지도 모르는 부류의 인종을 만난 순간의 환희.

그리고 나는 놈을 바라봤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 그래… 그렇지… 그렇다고… 으흐흐하하하!"

"하지만…."

팟!

나는 몸을 날리고 검을 꺼내 들었다.

놈의 눈이 커졌다.

"나는 너와 다르다."

"부정하지 마아아아!"

놈의 괴성과 함께.

쿠쿠쿠쿠쿵!

순식간에 십여 기도 넘는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양한 무기를 들고 있는 병사들의 크기는 이전의 병사들보다 1.5배는 더 거대해졌다.

마치 거대한 건물이 눈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지만.

부우우웅!

검을 한 번 크게 휘두른 순간.

콰콰콰콰쾅!

병사들이 모두 일격에 고꾸라졌다.

무수한 스탯 포식 메시지가 눈앞을 가렸다.

하지만 놈은 다시 더 많은 병사들을 소환했다.

콰콰콰쾅!

지휘관의 외침을 사용한 순간 병사들의 몸이 허물어졌고, 놈들의 몸을 타고 스무 마리의 소환체들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르지 않아! 너는 나와 같아! 너는 나와 같다고오오오오!"

순간 놈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놈의 몸치 크게 부풀어 오르며 놈의 피부가 금속처럼 단단해졌고, 놈의 한 손에서 부풀어 오른 곳에서 거대한 송곳니가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놈의 송곳과 내 검이 충돌한 순간 다시 한번 중앙섬이 크게 출렁였다.

"다르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더욱더 많은 오러를 검을 통해 쏟아 넣었다.

붉은빛이 맹렬하게 솟구치며 놈의 송곳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뭐가… 뭐가 달라! 너와 내가 뭐가 다르냐는 말이야아아아!"

놈이 악에 받쳐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의 생떼를 보는 것만 같았다.

"적어도 나는…."

꽈아아악!

놈의 송곳을 강하게 내리 눌렀다.

놈의 무릎이 천천히 굽어지기 시작했다.

"인간이다."

그 말과 함께 더욱더 힘을 줘 검을 내리 찍은 순간.

콰아아아앙!

놈의 무릎이 땅에 처박혔다.

"적어도 인간으로 남기 위해 노력하지."

부우웅!

검이 다시 하늘로 솟구쳤고, 다시 놈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앙!

놈의 송곳을 강타했고, 그 순간 송곳은 반으로 조각났다.

잘려 나간 부분에서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개소리하지 마아아아아!"

놈의 이어진 괴성과 잘려 나간 송곳에서 여러 개의 칼날이 솟구쳤다.

솟구친 칼날 위로는 다시 붉은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블러드 녀석들의 사념이었다.

"너와 나의 차이는 그 한 부분이었다. 인간이길 포기한 너와, 적어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나."

물론 나에겐 행운이 찾아온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나도 저 녀석처럼 인간이 아닌 채 망가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전에 이미 나는 한 번 죽었었지.

하지만 내게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모든 게 무너져 버렸던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한 번의 기회.

그리고 어쨌든 나의 옆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

그게 바로 저 녀석과 나의 결정적인 차이였으니.

"그뿐이다."

푸각!

검이 놈의 가슴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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