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확실히 성장했군."
나는 해츨링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해츨링이 나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드래곤 하트에 잠겨 있는 마력의 양이 상상 이상으로 커졌어.'
해츨링에게서 느껴졌던 거대한 존재감의 원인이 바로 저 드래곤 하트 덕분이었던 것이다.
그 말은 즉, 앞으로 해츨링이 사용하게 될 마법의 위력이 이전에 비해서 월등하게 강해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고맙다. 헤르야."
나는 헤르야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헤르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고맙다는 말은 필요하지 않네. 그대가 약속한 것을 지켜준다면, 그것이 그 무엇보다 훌륭한 감사의 표가 될 테지."
"걱정하지 말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킬 거니까."
"그렇군."
헤르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야의 표정에서는 나를 향한 의심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럼 이제 슬슬 다음 일을 준비해야겠지.'
잠시 원한의 숲에 들르긴 했지만, 애당초 내 목적은 중앙섬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곳에 뭐가 있을지 미리 파악해 보고 혹시라도 어비스의 상층에 대한 흔적들이라도 찾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잘 됐군. 이 정도라면 중앙섬에 뭐가 있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거야.'
그렇지 않은가.
나날이 발전하는 몰른과 한층 더 강력해진 해츨링까지.
게다가 지금은 나는 모든 플레이어를 통틀어서도 내 털끝 하나 건드릴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강해진 상태였으니까.
'이대로 곧바로 중앙성으로 움직이면 되겠어.'
나는 결정을 마쳤다.
그리고 다시 헤르야를 바라봤다.
그는 내 눈을 보자마자 내 뜻을 읽어냈는지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 먼저 그가 말했다.
"너는 이 어비스의 심장부로 가려는 것이겠지?"
"그래. 맞아."
"잘 됐어. 그렇지 않아도 네 뒤에 꼬리가 붙어 있다는 걸 우리의 수색요원들이 발견한 참이다."
"뭐?"
"말 그대로. 누군가 네 뒤를 쫓았고 지금 우리의 숲이 놓인 바깥쪽에서 그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더군."
"그런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들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이미 초감각이 원한의 숲과 어비스를 막아서고 있는 막을 뚫어내지 못한다는 걸 파악한 상태였으니까.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어차피 저들은 이곳에 대해서 알아낼 수도, 들어 올 수도 없으니까. 그리고 저들이 모르게 중앙섬으로 향할 수 있는 통로도 존재한다."
헤르야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지."
"음? 그게 무슨 말인가."
"내게 달린 꼬리를 그냥 두고 가면 너희에게 폐를 끼치는 꼴이 되지 않겠나."
"어차피 저들은 우리가 있는 곳을…."
"아니야. 그래서는 내 마음이 편칠 않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해츨링과 몰른을 바라봤다.
"어때. 너희가 한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새로 태어난 해츨링과 몰른의 콤비네이션.
그렇지 않아도 나도 한 번 구경해 보고 싶었다.
"꾸우웅!"
"좋아요오오오!"
몰른과 해츨링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리고 나는 헤르야를 바라봤다.
"그렇다는군."
***
"이봐. 아직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건가?"
"예, 예. 그렇습니다."
"젠장. 대체 저 안에서 뭘 하는 거야? 저곳에서 눌러앉으려는 속셈인가?"
"하하하…."
그럴 리가 없다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한강민이 누구인가.
어비스에 등장한 순간부터 어비스 전체의 판도를 뒤바꾼 괴물이다.
그런 인간이 동굴 속에 숨어서 눌러앉는다니.
지나가던 개가 코웃음을 칠 일이다.
"혹시라도 기척이 느껴지거든 바로 알려야 한다. 절대로 직접 붙어서는 안 돼. 우리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녀석의 자취를…"
"자, 잠시만요!"
그때 블러드의 플레이어가 다급히 외쳤다.
"나타났나?"
"그, 그렇습니다!"
"되었다. 지금 당장 연락을…."
하지만 더 이상 그의 입에서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읍! 읍읍읍!"
입은 벌어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으읍… 으으읍…!"
그 혼자에게만 벌어진 현상은 아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플레이어들은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소리만을 흘려보내고 있을 뿐.
그때였다.
파지지짓!
그들의 몸 위로 무언가 스쳐 지나가는가 싶더니, 이내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더 이상 읍읍, 하는 소리조차 낼 수 없었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코로 숨을 들이쉬고, 눈알을 굴리는 게 전부였다.
그 순간에도 기척을 탐지하던 플레이어의 시선은 동굴로 향했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또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저 동굴 안에서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괴물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느껴지는 기척만으로 보자면 저 동굴의 크기가 너무도 작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동굴보다 훨씬 커다란 존재가 저 안에서 걸어오고 있다니!
물리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렇게 큰 존재가 동굴 안에 있다면 당연히 동굴이 무너져야 정상일 텐데.
그리고 그 순간.
'허… 허어어억…!'
기척이 가까워지고 나서야 그는 거대한 존재감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드, 드래…드래곤…!'
분명히 드래곤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거대한 드래곤.
꼬리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산 하나를 통째로 박살 낼 수 있을 것처럼 거대한 드래곤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 말… 말해야 해…!'
달아나야 한다고.
지금 자신들을 향해 끔찍한 괴물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몸도 못 움직이고, 입도 뻥긋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묶여있는 그들을 향해서 무언가 날아들었다.
조그마한 화살이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화살 하나가 일개 화살로 비쳐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들을 씹어 삼키기 위해 아가리를 쩌억 벌린 채 날아드는 괴물처럼 보였으니.
콰아아아앙!
거센 폭발이 일어났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건 그 누구도 없었다.
***
"어떤가."
내가 헤르야에게 물었다.
헤르야는 고개를 저었다.
"깔끔하긴 하군."
나와 헤르야는 동굴 속에 숨어서 몰른과 해츨링의 활약상을 지켜보고 있던 참이었다.
물론 헤르야가 나와 자신의 기척은 완전히 감췄다.
이미 저쪽에서 기척을 탐지하는 능력을 지닌 플레이어가 있다는 건 파악해 놓은 상황이었고.
헤르야에게 있어서 일개 플레이어의 기척 탐지 능력을 왜곡시키는 것 따위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조금 허무했군."
내 감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해츨링이 시작도 전에 플레이어들에게 속박과 침묵 마법을 걸어 버렸기에 저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만약 저 사이에 꽤 강한 녀석이 하나라도 끼어 있었으면 저항이라도 했을 테지만.
저 중에서 해츨링의 저주에 저항할 정도로 강한 녀석이 하나도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사실 해츨링의 저주가 아니었어도 몰른의 화살 몇 방이었으면 모두 재가 되어 버렸겠지.'
어쨌든 꽤 만족스러운 결과다.
나는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음에도 해츨링과 몰른은 자의적으로 판단을 내렸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어쨌든 꼬리도 잘라냈겠다 우리는 슬슬 떠나야겠어."
내가 헤르야를 돌아보며 말했고, 헤르야는 손을 내밀었다.
"자네를 만난 것은… 어쩌면 내게 있어서는 큰 행운이었을지도 모르겠군."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헤르야의 손을 맞잡았다.
"아, 그리고 말이지. 아까 전에 중앙섬으로 빠르게 갈 수 있는 통로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렇다. 원한다면 언제든 길을 열어 줄 수 있어."
"좋군."
헤르야는 나를 이끌고 다시 원한의 숲 안으로 걷기 시작했다.
***
"이곳이네."
헤르야가 나를 이끌고 도착한 곳은 원한의 숲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샘물이었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평범한 샘물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지."
헤르야의 설명이 이어졌다.
"일종의 포탈일세.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서 내가 준비해 놓은 포탈이야. 그런데 이렇게 빠르게 이 포탈을 사용할 수 있을 때가 오게 되었을 줄이야."
그러면서 헤르야는 샘물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기다려 보게. 곧 포탈을 열어 줄 테니. 이 포탈을 통한다면 금세 중앙 섬으로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헤르야의 마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헤르야의 마력을 느낀 샘물은 천천히 회전했다.
회전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으니 오래지 않아 마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듯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물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러기를 몇 분.
하늘 위로 솟구치던 샘물은 허공에서 다시금 원을 그리며 빠르게 회전했고, 샘물이 만들어낸 원 한가운데에서는 숲이 아닌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중앙섬으로 향할 수 있을 걸세."
헤르야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고, 나는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에 작은 감탄사를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군."
"잘 부탁하네."
"물론이다."
그렇게 나와 헤르야는 다시 짧은 인사를 나눈 채 포탈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내 뒤를 따라 해츨링과 몰른이 포탈 속으로 몸을 들였다.
***
"여긴가."
포탈을 타고 도착한 장소는 용암지대였다.
사방이 어두웠고, 이 섬은 화산으로 만들어진 섬인 듯 검은 바위와 함께 군데군데에는 용암이 고여 있는 웅덩이가 눈에 띄었다.
'중앙섬.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곳인 것 같군.'
막연하게 생각했기로는 휴양지와 같이 아름다운 섬의 모습을 그렸었는데, 그런 내 헛된 상상을 무참히 박살 낼 만큼 척박한 공간이었다.
'그래. 차라리 이 정도는 되어 줘야 뭐라도 해 볼 맛이 나겠지.'
나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어쨌거나 중앙섬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어비스 상부에 대한 일말의 근거라도 찾아내는 것.
'분명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야.'
어비스 상부.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이 탑과 길고 지겨운 싸움을 끝낼 수 있는 열쇠가 있을 게 분명하다.
'블러드. 그 녀석들의 실체에 대해서도 알게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이미 알고 있다.
이 모든 싸움을 완벽하게 정리하기 위해서는 블러드라는 거머리들을 완전히 박멸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기다려라. 어떻게 해서든 네놈들을 뿌리 뽑아 줄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중앙성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미 내게는 초감각과 만리경이라는 훌륭한 능력이 주어져 있으니까.
'자, 볼까.'
곧바로 초감각을 사용했고, 한순간에 중앙섬 전체의 모든 게 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 참...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꽤 많이 다른 곳이군.'
중앙섬에서 이 탑의 비밀을 밝혀내겠다던 나의 계획에 조금 차질이 생긴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