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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창이 달라졌다-222화 (222/277)

222화

"용의 아이로구나."

헤르야.

그가 해츨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이 번쩍였다.

순간 그의 눈에서 자신의 비늘 색과 같은 붉은 기운이 일렁였고, 해츨링은 헤르야와 눈을 마주친 순간 작은 날개를 펄럭였다.

경계심 따위가 아니었다.

마치 자신 앞에 있는 헤르야를 향한 경외감을 보이는 듯한 제스처.

"잘 자라나고 있구나. 네 어미의 영혼은 편안한 곳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거라."

헤르야의 말에.

"꾸우웅…."

해츨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개를 퍼덕이며 헤르야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고, 헤르야는 그런 해츨링이 사랑스럽다는 듯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동시에 헤르야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렇군. 그대는 포악하나 사악한 자라고는 볼 수 없겠어."

"묘한 말이로군."

내가 답하자 헤르야가 미소 지었다.

"수많은 이들을 베어냈겠지. 그대의 몸에서는 진한 피냄새가 흘러나와. 그러니 포악하다고밖에는 할 수 없을 테지만, 적어도 이 탑을 피해 이곳에 숨어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대는 이 탑을 파괴하려는 자. 그러니 적어도 내 눈에 사악한 자로는 보이지 않는구나."

말은 복잡했지만.

결국은 이 말이다.

나와 헤르야의 적이 같다는 것.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듯일 거다.

"말을 꽤 복잡하게 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은데."

"꽤 오랜 세월을 살아가다 보면 이렇게 되기 마련이지. 나의 삶은 그대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길었다네."

"어쨌든 내 목적이 너희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나를 향해 은은한 살기를 뿜어내는 원한의 숲의 거주민들을 말이다.

"그대에게 결례를 범했군. 이해하시게.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두려움에 떨어 왔고, 이제는 외부인의 방문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느낄 만큼 우리 공동체에 안락함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그러면서 헤르야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약속이나 했다는 듯 나를 향했던 미약한 살기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째재잭!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원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저 아이를 잘 부탁하네."

헤르야가 해츨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생각이다."

용은 용이라는 건지.

해츨링에 대한 염려가 꽤 큰 모양이다.

"우리 용들은 강하지만 유약한 존재지."

"유악하다고 생각되진 않는데."

"오랜 세월을 살아가야만 해. 그것이 정해진 운명이지. 한날에 먼지같이 흩어지는 수많은 종족들의 탄생과 죽음을 셀 수 없이 목격해야만 해."

"……."

"너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설교가 시작된 걸까.

"태어나는 순간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된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일이지."

헤르야의 안색이 잠시 어두워졌다.

"네가 죽는 날을 알고 있다는 건가?"

"물론이지. 죽는 날뿐만이 아니라 그때 내가 어떻게 죽게 될지도 이미 알고 있다네. 그 고통을 그대는 이해할 수 있을까?"

"……."

불가능한 일이다.

죽음이 언젠가 다가오리라는 것은 알지만, 그게 언제인지, 어떤 방식일지 알고 있는 인간은 없으니까.

"그렇기에 우리 용들은 강하지만 유약하다는 걸세.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는 이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고. 피하고 싶었으니까. 내가 알고 있는 죽음과 조금이라도 멀어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말일세."

설교는 아니었다.

그의 말버릇처럼 돌고 돌았지만, 결국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다.

이 공간을 자신이 만들었고.

왜 이 공간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그것은 두려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언젠가 다가와 자신을 집어삼키게 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회피.

"그래서. 무언가 바뀌었나?"

내가 물었다.

이 공간을 만들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죽음이 달라졌는지 물은 것이었지만.

헤르야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렇군."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더 자세한 건 묻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그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 하고 있다는 게 충분히 느껴졌으니 더 건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헤르야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지금 무언가 꿈틀대고 있다네."

그 말에 내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아직 달라진 건 없지만, 무언가,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조금씩… 꿈틀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네."

그의 안광이 일렁였다.

"따라오게."

헤르야가 몸을 돌렸다.

그와 함께 모여들었던 인파가 홍해와 같이 갈라졌다.

모두가 헤르야 앞에 무릎을 꿇었고 그가 가는 길 위로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그대들은 여기에서 기다려주겠는가."

헤르야는 몰른과 해츨링에게 말했다.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헤르야가 나를 이끌고 도착한 곳은 원한의 숲 깊은 곳에 놓여 있는 거대한 석상 앞이었다.

"이건?"

"이 원한의 숲을 지탱하고 있는 석상이지. 나의 반쪽이기도 하며 어쩌면 나의 모든 것이기도 할 걸세."

아직까진 헤르야가 나를 왜 이곳으로 이끌고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석상을 바라봤다.

석상은 드래곤의 모습이었고, 커다란 드래곤의 품 안에는 작은 아이들 몇 명이 안겨 있었다.

"저 석상 속의 아이들은 바로 우리 용인들이지. 우리 용인들과 드래곤의 뿌리는 같아."

헤르야가 설명했다.

"그렇군. 그래서 나를 여기로 이끌고 온 이유가 뭐지?"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네. 이 어비스라는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이 어비스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지 말이야."

"……."

헤르야가 그렇게 말하며 석상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고.

"조심하게."

그 순간 석상에서부터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이게 어디지?"

"뱃속이다."

"뭐?"

"뱃속. 네가 알고 있는 그 탑이라는 녀석의 뱃속 말이야."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흑암이다.

그야말로 무(無)라는 게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허무하고 공허한 궁창에 서 있었다.

"이게 무슨..."

"혼란스러운가?"

"조금은."

"우리는 이런 공간에서 오랜 시간 떠돌았다. 나의 세계가 이 탑이라는 괴물에게 집어 삼켜지고 셀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을 이 '무'의 공간에서 헤매었지."

"맙소사. 대체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뎌낸 거지?"

"견뎌내지 않았다. 견디게 되었지. 사실 이 공간에서 떠돌았던 시간 나 뿐만이 아닌 그 모두의 시간은 완전히 정지했다. 아마 대부분은 이 시간이 존재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테지."

"……."

할 말이 없었다.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 이야기.

"그런데 너는 어떻게 아는 거지? 시간이 정지했다고 하지 않았나?"

"시간은 정지했으나 나는 멈춰있지 않았으니까. 어느 정도의 영혼의 격을 지닌 존재들은 이 무의 공간 손에서도 멈추지 않고 의식이 작동했었지."

"……."

"물론 나와 같은 존재는 그리 많지 않았을 거야."

그러면서 헤르야가 나를 바라봤다.

"어쩌면 네게 그 힘을 넘겨준 존재 역시 그 억겁의 세월을 견뎌냈을지도 모르겠군."

"허…."

레미드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내게 렘의 힘을 건네줬던 그 사슴.

그리고 레미드라면 충분히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가 느꼈을 감정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겠나."

"전혀."

"끔찍했지. 모든 것이 정지해 버린 그 순간에 나의 의식은 홀로 깨어서 아무것도 없는 궁창을 배회하고 또 배회하였다네."

헤르야가 나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조금 지쳐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멈춰있던 그 세상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어. 땅이 솟아올랐고, 바다와 강이 흐르기 시작했네. 하늘이 나타났고 결국에는 내가 알지 못하던 세상이 나를 품어내기 시작했지."

어비스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 어비스를 만든 존재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내가 물었다.

어비스의, 그리고 탑의 원주민들이 설계자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렴풋이."

"……."

"그들은 신비로운 존재들이었지."

헤르야가 말했다.

내가 보기에 충분히 헤르야도 신비로운 존재인데, 그런 헤르야가 신비롭다는 말을 하니 꽤 낯선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는 적어도 내 앞에서 그리 신비로운 모양새는 아니었던 것 같았으니까.

"대화를 나눠 봤나?"

"그건 아닐세. 그들과 나 사이에서 만남이 이루어진 적은 없어. 다만 나는 그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을 뿐."

"그런가."

"그래. 그래서 나는 너무도 두려웠네. 다시 그때의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토록 두려웠던 죽음마저도 그 순간에는 완전히 정지해 버렸네. 너무도 끔찍했지.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그래서 이 공간을 만들었다는 말이겠군,"

"그래. 그 말이 정확해. 나의 나음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어비스에서, 그리고 탑이라는 괴물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이 공간을 만들었네.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이 공간은 완전하지."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헤르야가 만들어 낸 세계의 유일한 약점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 말은... 네가 죽으면."

"그래. 이 공간 역시 무너지고 말 걸세."

"다른 이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나?"

"아니."

"…그렇군."

이제야 헤르야가 나를 이곳에 데리고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이 공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것도.

"기다리고 있었겠군. 나와 같은 플레이어를."

"정답일세."

헤르야가 내 눈을 마주쳤다.

"나한테 바라는 것이 있겠군."

"맞네."

나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나한테 줄 것도 있겠고."

당연하다.

모든 것은 기브 앤 테이크.

내 말에 헤르야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이지."

"나쁘지 않군. 이제 우리는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어."

내가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꽤 긴 대화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헤르야 역시도 내 앞에 마주 앉았다.

"이 공간은 내가 죽지 않는다면 영원토록 지속될 수 있을 테지만, 문제는 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세."

"얼마나?"

"길어야 1, 2년."

"그런가."

1, 2년.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헤르야가 살아왔던 시간에 비하자면 1, 2년이라는 숫자는 정말 눈 한 번 껌뻑이는 시간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내게 바라는 건?"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한다네. 가장 쉬운 것은 이 공간에 살고 있는 이들을 지켜주는 것이지. 자네가 말이야. 자네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우선 패스. 가장 어려운 문제군."

"……."

누군가를 지켜준다는 약속.

심지어 다수를 한곳에 모아 놓고?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다음으로는... 내 수명이 다하기 전, 이 탑이라는 괴물을 없애는 것이지. 하지만 이건 현실적으로…."

"그게 좋겠어."

"뭐…?"

"첫 번째보다는 두 번째가 훨씬 쉬울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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