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그곳에는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분명히 던전 내부였음에도 던전 내부라고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세계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로서는 아직 영문을 알 수 없는 현상이다.
분명히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초감각으로는 새로운 공간이 그저 아무것도 없는 동굴 내부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분리된 차원 같은 건가?'
지금으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슬쩍 손을 내밀었다.
터어엉-
하지만 내 손은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막이다.'
무언가 두 개의 공간을 완전히 분리해 놓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마력을 조금 끌어올려 투명한 막으로 흘려보냈지만.
파지짓!
마력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다시 렘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역시나.
파지짓!
렘으로도 막을 관통하는 건 불가능했다.
'흐음….'
욕심 같아서는 저 너머로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지만, 도무지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손을 내밀어 봤지만 내 손은 결코 투명한 막을 관통하지 못했다.
오러 블레이드도 마찬가지였고, 내가 가진 어떤 능력을 동원해도 벽을 넘어서는 건 불가능했다.
'저 너머에 무언가 있을 게 분명한데.'
내 촉이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동안 지옥 같은 탑을 오를 수 있게 만들었던 그 촉이 말이다.
'이대로 돌아가긴 너무 아쉽다.'
나를 넘어가게 하지 못하는 걸 보고 있자니 오기가 발동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저 너머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굴뚝같아졌다.
그렇게 한참이나 투명한 막을 두고 머리를 싸매고 있을 무렵.
저벅- 저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몰른과 해츨링이었다.
"뭐하세요오오오?"
몰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어느새 식사를 마치고 온 모양인지 해츨링의 입가에 음식물들이 잔뜩 묻어 있었다.
"별것 아니다."
내가 그렇게 대꾸했다.
그런데 그때.
"어어어엇!"
몰른이 막 너머를 보고 소리쳤다.
"예, 예쁘다아아!"
저 너머에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보며 소리치는 몰른.
그와 함께 몰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꽃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조심…."
내가 조심하라고 말하기도 전.
우웅!
몰른은 막을 넘어섰다.
"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내가 무슨 수를 써서도 해내지 못했던 것을, 몰른은 너무도 가뿐하게 통과해 버렸으니.
몰른은 꽃을 꺾어 올린 채 나를 향해 손짓했다.
"주인니이이임! 이리 오세요, 여기 정말 예뻐요오오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나도 가고 당장에라도 가고 싶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투우웅!
내 손은 여지없이 투명한 막을 통과하지 못한 채 튕겨 나올 뿐이었다.
"꾸우우웅?"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겨났으니.
해츨링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막을 통과해 버린 것이다.
"이게 뭔…."
머리가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대체 왜 나만 이 벽을 통과하지 못하는 걸까?
벽 너머에서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몰른과 해츨링을 보며 입술을 깨물고 있을 때.
홱!
몰른의 손이 막을 뚫고 내 손목을 붙들었고.
"빨리 오라니까요오오오!"
몰른이 내 몸을 잡아당겼다.
"몰른 조, 조심…."
하지만.
우우웅!
"어…?"
몰른이 내 손을 붙들고 끌어당기자 내 손이 막을 넘어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내 몸이 막을 완전히 통과해 버렸고.
그와 함께.
[원한의 숲에 입장했습니다.]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는 한참이나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원한의 숲이라니?'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동굴 속에 이런 세상에 펼쳐져 있을 줄이야.
그리고 하나 더.
'원한의 숲이란….'
[뒤섞인 차원에서 죽어간 원주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입니다.]
'…….'
말 그대로.
원한의 숲이란 탑의 근원인 괴수에게 잡아 먹힌 채 고향을 잃고 죽어간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였다.
'내가 들어오지 못했던 건, 지구의 인간이기 때문인가.'
그럴 가능성이 크다.
해츨링과 몰른은 어쨌든 탑에게 잡아 먹힌 세계의 존재들.
'그래서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던 거고?'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렇게 추측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면 이곳에는 이계의 원령들이 살아가고 있는 건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초감각의 범위 내로 포착되는 인간은 없었으니….
저벅
'…….'
젠장.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저쪽 한 방향에서 한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 초감각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이들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반인반수의 이종족들.
'겉으로 보기에 영혼처럼 보이지는 않아.'
저들은 분명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조금 떨어져서 우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딱히 싸우겠다는 의지는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낯선 존재들을 경계하는 정도의 경계심을 드러내 보일 뿐이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를 경계하는 건 멈추지 않았지만 해츨링과 몰른에 대한 경계심은 완전히 감춘 채로 말을 걸어왔다.
"당신들은 이계의 존재들이군. 우리와 같은 처치야."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은 해츨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케로독이라는 종족이오. 우리가 살던 세계는 이미 오래전에 멸망했지."
"몰른입니다아아…."
몰른은 손을 내밀고 케로독 종족이라고 소개한 자와 악수했다.
"내 이름은 카독. 그대는?"
"모, 몰른이에요오…."
"몰른. 반갑소. 우리는 이 원한의 숲을 정찰하고 침략자를 벌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
"그, 그런가요오오…."
몰른은 잔뜩 긴장한 채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더니 나를 바라봤다.
"이리 와라."
내가 말하자 몰른은 서둘러 내 옆으로 다가왔고, 해츨링도 뒤뚱대며 몰른의 뒤를 따랐다.
"당신은 우리와는 조금 다른 존재로군."
카독이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답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물음이라. 네가 과연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자격이 있는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지울 수가 없군."
것 참 꽤 깐깐한 녀석이다.
그렇다고 나도 그냥 물러설 마음은 없다.
이곳이라면 이 어비스에 대한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너희는 이 탑의 본체에 대해서 알고 있나?"
저 녀석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 나는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와 함께 카독이 흠칫 놀라며 나를 노려봤다.
"그래. 나는 어쩌면 너희와 다른 존재일지도 모르지. 너는 이 탑의 본체에게 잡아먹힌 세계의 존재들. 하지만 나는 그런 너희와 이 세계를 이용해서 강해지는 존재다."
"……!"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말에 케로독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무언가 중얼대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대략 십여 분.
"우리가 이 숲을 조성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카독이 말했다.
왠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았다.
"모른다. 이곳은 낯선 곳이야. 어떻게 만들어진 곳인지, 왜 이런 장소가 동굴 속에 숨어 있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내 말에 카독이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꽤 긴 이야기인 모양이다.
***
"그렇게 된 거다."
카독의 설명이 끝났다.
"결국 원한의 숲은 너희들의 마지막 안식처다, 라는 거군."
"정확히 이해했다."
그 말대로 이곳은 그들이 조성해 놓은 완벽한 방공호나 다름없었다.
사념의 힘을 가진 존재는 나를 가로막았던 벽을 결코 통과할 수 없었고.
사념의 힘뿐만이 아니라 나와 같은 플레이어들조차 넘을 수 없도록 설계해 놓은 공간이라고 했다.
"네가 넘어 온 건… 어쩌면 저들과 네가 가진 오묘한 힘 덕분일지도 모르겠어."
카독이 말을 이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자면 아무리 탑에게 잡아먹힌 세계의 존재의 도움이 있더라도 나와 같은 플레이어는 벽을 넘을 수 없다고 했었다.
그럼에도 내가 몰른의 도움으로 벽을 넘었던 건, 내가 가진 렘의 힘 덕분이라는 게 그의 추측.
'대단한 힘이야.'
벌써 얼마나 렘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래. 어쨌든 나는 너와는 다른 존재지만 목적은 같다. 그거 하나면 되지 않을까."
내 말에 카독도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너에 대한 경계를 풀 수는 없지만, 조금은 믿음이 가는군. 그런 기운을 품고 있다면 적어도 이 탑에게 위협적인 존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테니."
나보다는 내가 가진 렘의 힘을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너희와 같은 모험가들은 우리로서는 경계할 수밖에 없다. 벌써 수많은 우리의 동족들이 모험가라는 족속들에게 죽임을 당했으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네가 먼저 나의 뒤통수를 치지만 않는다면."
"흠…."
카독이 다시 시선을 돌렸고, 내 옆에 있던 몰른과 해츨링을 바라봤다.
"저들이 너를 이토록 신뢰하고 있다면…. 우선 나를 따라와라."
카독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주변으로 다른 케로독들이 모여들었고, 카독이 움직이자 케로독들도 카독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가자."
나도 몸을 일으켜 몰른과 해츨링을 이끌고 카독이 걸어가는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
카독이 나를 이끌고 도착한 곳은, 마을이었다.
하지만 그 규모가 꽤 컸고, 주목할 만한 건 케로독이라는 종족 이외에도 꽤 많은 종족들이 뒤엉켜 있었다는 것이다.
수인족을 포함해서 용인족으로 보이는 종족도 있었다.
인외종 말고도 인간도 함께 뒤엉켜서 큰 위화감 없이 부대끼고 있는 모습이 꽤 새롭게 보였다.
그들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눈에 보더라도 원한의 숲이라는 이름과 다르게 이들은 자신의 삶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는 거겠지.
그렇게 내가 마을 안으로 걸음을 내디딘 순간.
"……!"
"!!"
그곳에 있던 모두의 시선에 나에게로 향했다.
마치 약속이나 했다는 듯이 살기를 내뿜으며 지독한 경계심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를 향해서 공격을 할 것처럼 무기에 손을 가져다 대는 녀석들도 있었다.
하지만.
"다들 진정하시오. 이 자는 내가 이끌고 온 자니까."
카독이 말했다.
그 말에 모두가 경계를 완전히 풀지는 않았지만, 나를 향한 살기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어서 헤르야님을 모셔다 주시오."
헤르야.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이곳에 있는 이들의 리더라는 사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나와 해츨링, 그리고 몰른은 마을 입구에 멍하니 서서 모두의 경계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만 했고.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지나갔을 무렵.
저벅-
저쪽에서 한 사람….
아니, 역시나 인외종이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용인족 같았다.
머리에는 뿔이 나있고, 온몸은 붉은 비늘로 덮여 있었으며 상체는 용이었지만, 두 발로 걸었으며, 뒤로는 긴 꼬리가 나 있었다.
그의 꼬리가 움직이며 공기를 가를 때마다 신비로운 기운이 이 공간 전체를 흔들 정도로 강렬한 에너지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해츨링과 시선을 마주쳤고.
헤르야라는 자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