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저쪽은 이미 끝났고.'
알렉스는 방금 전 길드원을 통해 강민이 휩쓸고 지나간 제네시스와 아레스 쪽의 상황을 보고받은 참이었다.
'잘됐어. 이걸로 놈들에게 크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블러드의 조무래기들을 사로잡는 게 고작이었건만.
강민이 등장한 순간부터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에이미로 시작해서 매튜라는 거물까지 사로잡게 되었으니까.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지.'
알렉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지휘를 받으며 에이미가 이끌고 온 '괴물'들을 상대하고 있는 몰른과 해츨링은.
'말도 안 되는군.'
웬만한 플레이어는 감히 따라 올 수도 없을 만큼 훌륭한 전투력을 보여주고 있는 둘이었다.
'믿을 수 없어.'
강했다.
너무 강하다.
그냥 강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구구구구! 콰콰콰쾅!
마치 전투기가 하늘에서 폭탄을 투하하고 있는 것만 같은 장면이었다.
몰른의 화살이 대지를 두드릴 때마다 에이미가 이끌고 온 괴물들은 재로 화했고.
해츨링의 마법은 지축을 뒤틀며 에이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보다 저 에이미는….'
역시 아무리 봐도 살아 있다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끔찍한 흉물이었다.
자신의 의지가 없이 완전히 사념에 사로잡힌 괴물.
그리고 무엇보다 강했다.
이미 오디세우스의 플레이어들은 상대 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그들에게는 에이미가 이끌고 온 괴물조차도 버거울 정도였고.
'그나마 버티는 건 레이먼드 정도인가.'
만약 레이먼드도 아니었으면, 싸움은 더욱 힘들어졌을 거다.
그나마 레이먼드가 앞에서 받쳐주는 덕에 해츨링과 몰른이 먼 곳에서 괴물들을 빠른 속도로 지워낼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대로는 오래 지속할 순 없어.'
강한 건 맞지만, 알렉스가 느끼기에도 해츨링과 몰른에겐 분명 한계가 존재했다.
'우선 상황 판단이 꽤 늦어. 게다가 아직 체력도 뛰어나다곤 할 수 없어.'
힘 조절이 미숙하다.
굳이 온 힘을 쏟지 않아도 될만한 공격에도 매 순간 전력을 다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체력과 마력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이미를 쓰러트리기엔 아직 해츨링과 몰른의 힘이 부족하다는 것.
'강민씨가 어서 도착해 줘야….'
그 순간.
쿠우우우웅!
굉음이 울리고, 괴물들이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알렉스가 미소 지었다.
'역시.'
마침 강민이 필요하던 그때, 그가 나타났다.
***
내가 도착한 이곳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결국 그냥 꺼내들기로 한 셈인가.'
에이미와 에이미 주변을 두르고 있는 괴물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블러드에서도 더 이상 자신들이 은밀하게 숨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냥 자신들이 가진 모든 걸 꺼내들기로 마음 먹은 게 분명했다.
'하긴. 에이미와의 싸움에서 놈이 직접 나에게 말을 걸었던 것만을 생각해 봐도….'
선을 넘었다느니 뭐라고 떠들어 댔던 그때 말이다.
'잘된 일인가.'
이제 그들과의 전면전으로 돌입했다는 뜻이다.
놈들은 더욱더 적극적으로 공격해 올 것이며.
놈들이 가지고 있던 힘을 꺼내서 나와 템플을 위협하기 시작할 거다.
'상관은 없겠지.'
그저 모두 쓸어버리면 그만이니까.
나는 검 위로 렘을 감쌌다.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렘이 감싼 검이 괴물을 가로지르는 순간.
캬아아아악!
키에에엑!
놈들은 몸을 격렬하게 뒤틀며 찢어지고,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나의 일격도 채 버티지 못하는 괴물들을 보며 그제야 오디세우스의 플레이어들은 한숨 돌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하, 한강민!"
저쪽에서 에이미와 맞서고 있던 레이먼드가 다급히 내 이름을 불렀다.
"고생하고 있었군."
"어서 도와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여유로운 나와는 별개로 레이먼드는 죽어가기 직전이다.
정말로 죽어간다는 건 아니지만, 몰골이 그 정도로 말이 아니었다.
사실 한 눈에 봐도 에이미가 만만치 않다는 건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나라고 해도 결코 쉽지는 않을 정도로.'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기지 못할 건 아니지만, 나는 여기에서 블러드의 수장이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경고겠지.'
경고.
말 그대로다.
그자 역시 내가 에이미에게 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을 테지만.
일종의 표본을 보내어 맛을 보라는 뜻일 거다.
'자신이 가진 무기의 일부분이 얼마나 강한지 직접 맛보라는 것이겠지.'
그래.
잘 받아주마.
씹어먹어주고, 다시 뱉어주마.
"나와라."
내가 레이먼드에게 말했고.
레이먼드는 다급히 멀리 떨어졌다.
그리고 에이미를 바라봤다.
완전히 검게 물든 눈동자.
더 이상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흉측해진 몰골과.
온몸이 검게 물든 채 가슴 한가운데 박혀 있는 사념의 파편 조각.
'끔찍하군.'
정말 끔찍한 모양새였다.
다른 녀석들도 저 모습을 알고 있을 텐데.
저렇게까지 해서 블러드라는 집단에 남아 있다는 게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일면으로는 공감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은 힘이지.'
힘.
나 역시 원했던 것.
그리도 간절하게 바라마지않던 것들.
'나 역시도 전쟁에 그런 실수를 저질렀었지.'
나를 죽게 만들었던 명가와의 협동 말이다.
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강해지고 싶었기에, 한 걸음 떨어져서 생각해 본다면 말도 안 될 법한 일을 저지르는 것.
'조지, 그 녀석도 마찬가지지.'
결국 내 손에 죽어버린 조지는 마지막 순간 어떤 생각을 했을까.
괜히 웃음이 나온다.
안 봐도 뻔하지.
이미 나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나는 마지막에 그렇게 생각했었다.
후회했고, 분노를 다짐하며 복수하겠노라….
나는 금세 발을 구르며 에이미를 향해 도약했다.
에이미가 손을 뻗었다.
괴물들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파직! 콰콰콰쾅!
렘을 흩뿌리고 스킬 몇 개를 사용하는 것으로 놈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에이미는 다시 자신의 사념을 움직였다.
콰릉! 콰콰쾅!
하늘에서 검붉은 빛의 낙뢰가 내리꽂혔다.
검으로 쳐내고, 몸으로 받아내며 쉬지 않고 달렸다.
"캬아아아아악!"
에이미가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녀는 계속, 계속해서 나를 향해 자신이 가진 모든 공격을 토해냈다.
하지만 나를 막을 순 없었다.
어느새 에이미의 앞에 도착한 나는 어느새 진해진 렘을 두른 검을 움직였고.
콰직!
그녀의 사념의 파편 조각을 꿰뚫었다.
하지만.
터어어엉!
격한 반발감을 느끼며 내 검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쉽게 내주지는 않겠다는 것이군.'
어차피 저 사념의 파편을 손에 넣는 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쉽게 내 손에 넘겨줄 만큼 블러드의 수장이 멍청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내 검이 튀어 오르기가 무섭게.
콰르륵!
에이미의 사념 조각으로부터 붉은 손아귀가 뻗어 나왔다.
내 몸을 감싸려는 듯 솟구치는 손아귀들을 향해 검을 움직였고.
카카카캉!
마지 금속을 쳐내는 것과 같은 감촉이 전해졌다.
심지어 렘으로도 잘리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응축된 사념의 기운들.
'허세는 아니었다는 거지.'
바라던 바다.
고작 일격으로 사념의 조각이 파괴되고 에이미가 쓰러졌다면, 나도 김이 조금 샜을 것 같거든.
동시에 땅 아래에서 붉은 기운이 솟구쳤고.
쓰러져 있던 괴물들이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데드.
딱 언데드를 보고 있는 그런 느낌이다.
'귀찮게 하는군.'
물론 나도 저런 잡몹들을 대응할 방법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콰아아앙!
지휘관의 외침으로 한 번 괴물들을 쓸어준 뒤.
키르르륵! 케르르륵!
저주받은 홉고블린의 외침과 지배자의 권능을 사용했다.
총 스무 마리의 소환체가 모습을 드러낸 뒤, 나를 향해 달려드는 괴물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소환체들은 어렵지 않게 괴물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어비스에 있는 플레이어들 몇 명을 데리고 와도 저 고블린 한 마리를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 분명할 정도로 강력해진 녀석들.
주변에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된 순간 나는 다시 검을 움직였다.
에이미의 팔과 교차된 나의 검은.
카아아앙!
에이미의 팔에 커다란 흠집을 냈다.
부러지진 않았지만, 에이미도 큰 데미지를 입은 게 분명하다.
그리고 다시.
콰아아앙!
검이 충돌했다.
일격에 거센 바람과 함께 파동이 대지를 휩쓸었다.
결국.
콰직!
에이미의 한쪽 팔이 잘려나갔고.
"키에에에엑!"
괴성을 내지르는 에이미.
그녀의 입에서 붉은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별걸 다 하는 군.'
나는 어렵지 않게 피해냈다.
붉은 광선이 훑고 지나간 대지가 녹아내렸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위력.
하지만 방금의 동작으로 에이미에게 빈틈이 생겨났고.
키레레렉!
순식간에 저주받은 고블린 다섯이 에이미의 몸에 달라붙었다.
"키에에엑! 키아아악!"
에이미가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고블린들은 떨어지지 않았다.
죽음도 불사할 정도의 투지를 가지고 손톱과 손에 든 단검으로 에이미의 몸을 내리찍어대는 고블린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
검 위로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렘이 아닌 오러 블레이드.
오랜만에 꺼내드는 오러 블레이드다.
그동안은 블러드의 플레이어들을 사용하기 위해 렘을 주로 사용했지만.
에이미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렘보단 오러 블레이드가 낫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고.
정확히 먹혀 들어갔다.
콰직!
오러 블레이드가 에이미의 몸통을 가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사념의 파편만은 견고했다.
정말이지 지독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에이미는 괴성을 내지르며 공격을 퍼부었다.
사념이 남아 있으면 몸이 어떻게 되건 절대 쓰러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야말로 본체는 저 사념의 조각이라는 뜻.
오러 블레이드를 이용해서 사념을 공격했고.
그러면서 렘을 흘려 파편의 균열을 벌려냈다.
콰아아앙! 콰쾅!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대지가 일렁일 정도의 파동이 몇 차례 스쳐지나가기를 몇 번.
빠직!
파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내리친 그 순간.
빠드드득! 콰득!
드디어 에이미의 가슴에 박혀 있던 사념이 반으로 갈라진 것이었다.
그때였다.
[기다리고 있어라. 어리석은 인간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녀석의 목소리인 게 분명하다.
[내가 이렇게 경고를 했음에도 이런 짓을 벌였다는 건… 그 의미는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알고 있다마다.
나는 그저 피식 웃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뭐라고 더 떠드는지 들어 보자는 마음으로.
[곧 알게 될 것이다. 네놈은 고작 인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미약하고 벌레같은 존재인지를.]
뻔한 말들.
개의치 않는다.
[설계자… 그들이 전한 권능도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
그 말을 끝으로, 에이미는 사라졌다.
역시 내 예상대로 파편의 조각도 남기지 않은 채 완전한 먼지가 되어 흩어진 것이다.
'흠.'
그래도 마지막 말은 꽤 의미심장했다.
'설마하니 설계자까지 거들먹거릴 줄이야.'
어쨌든, 저 녀석은 이 '탑'의 일부라는 사실은 확실해졌으니.
'놈을 처치한다면 분명 이 탑의 비밀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