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괜찮은 쥐방울을 하나 붙이고 왔는데.'
조지의 옆에서 느껴지는 블러드 플레이어의 기운은 범상치 않았다.
대충 봐도 확실히 에이미 이상.
그렇다는 건, 블러드에서도 상위의 랭커가 움직였다는 뜻이지 않은가.
'잘된 일이지.'
에이미에 이어서 두 번째 블러드의 최상위 랭커를 쓰러트리고, 제네시스를 통한 일벌백계까지.
일타이피의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될 게 분명하다.
'아쉽긴 하군. 몰른과 해츨링이 있었다면 일이 더 쉬워졌을 텐데.'
그렇다고 해서 내 계획이 흐트러지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조금 귀찮아질 것이고,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이다.
다행히도 내가 그리 늦지는 않은 모양이다.
제네시스의 플레이어들은 아레스의 플레이어들과 대치중이었고, 곳곳에서 소규모 신경전이 터져 나오고 있을 뿐이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잠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톰에게도 지금 당장 내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알리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그동안의 추세로 봤을 때, 블러드의 플레이어들은 더 이상 나의 기척을 느끼지 못해.'
느끼더라도 아주 미약한 수준으로밖에 느끼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렘 덕분일지도 모르지.'
아니, 렘 덕분일 것이다.
어느새 나의 렘 수치는 빠르게 증가하여 벌써 200을 훌쩍 넘어섰고, 벌써 300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으니까.
'잘된 일이지.'
놈들이 나의 기척을 느낄 수 없다면 텔레포트와 만리경을 더욱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제는 만리경을 공격에도 활용할 수 있을 만큼 렘이 성장했어.'
일전의 싸움에서 사용했던 그 방식 말이다.
만리경을 통해 렘을 조금 흘려보내고, 블러드 녀석들을 색출했던 그 방법.
거기에서 조금 더 나아간다면 렘을 이용해 블러드 녀석들의 사념을 크게 건드릴 수 있다.
'어차피 렘으로는 블러드가 아닌 이들을 공격할 수 없어.'
오로지 블러드 녀석들에게만 통용될 수 있는, 블러드 전용 공격기인 셈이다.
'자, 그럼.'
나는 만리경을 사용했다.
당연히 목적지는 조지와 블러드의 플레이어가 기다리고 있는 그곳이었고.
파짓!
마력이 움직이며 만리경의 분신이 제네시스의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응축되기 시작했다.
***
"또 이러는군."
"뭐가 말이지?"
"한강민. 그자가 분명 여기에 나타난 게 분명 없다. 하지만 놈의 기척을 느끼는 게 쉽지 않아."
블러드의 플레이어가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제 막 사념의 힘을 받아들인 조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우리는 처음 한강민이 어비스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놈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뭐…?"
"말 그대로.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추측건대 놈이 이 탑의 본체를 자신의 장비로 만들고 있는 게 분명했어."
"그, 그게 가능한 일인가?"
"불가능할 것도 없지. 아시아 전체의 추세로 보건대, 아시아의 설계자는 한강민이라는 한 인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몰빵했을 테니까."
"허…!"
"어쨌든, 그 덕에 우리는 놈의 위치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의 기척은 이제 판별할 수 없을 정도로 옅어졌어. 그나마 반경 수십미터 안에 들어왔을 때 미약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였건만… 이제는 그마저도 쉽지 않군."
블러드의 플레이어가 미간을 좁혔다.
그가 신경을 집중하여 강민의 위치를 포착하려 해도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기척마저도 매 순간 점점 옅어지고 있었던 것.
"차라리 잘된 거 아닌가? 놈이 이곳에 왔다는 건 우리 손으로 놈을 지워 버릴 수 있다는 뜻…."
"안 될 소리다."
"……?"
"그가 에이미에게도 절대 한강민을 건드려선 안 된다고 했어. 하지만 에이미는 경거망동한 채로 한강민에게 도전했고. 그 결과가 어땠는지는… 너도 알겠지?"
"…그렇군."
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강민은 없애야 할 존재지만 자신 혼자의 힘으로는 감히 어쩔 수 없는 괴물이라는 것을.
"오늘은 오디세우스의 최후를 목도하는 것으로 만족해 둬라. 에이미, 그 여자는 정말로 괴물이 되었으니까. 물론…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테지만. 너도 그 꼴이 나고 싶지 않다면 그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할 거야."
"명심하지."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켰다.
이 선택이 맞았던 건지, 아니면 그대로 강민의 말을 따라야 했을 건지.
'아니다.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아니, 틀렸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상황을 반전시키고 도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리스크를 감당해야 했을 것이고.
원래의 흐름에 편승한다면 치솟는 강민 아래를 받쳐주는 발판의 역할밖에는 할 수 없게 되었을 게 분명하니까.
'기다려라, 한강민. 언젠간 내 너를 반드시 짓밟고 올라설….'
그 순간.
빠직!
가슴 언저리에서 무언가 깨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꺼, 꺼허억…!"
조지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뭐냐. 왜 그러는 거야?"
블러드의 플레이어가 조지를 바라봤고.
"모, 모르… 모르겠… 구아아악!"
조지의 입에서 토사물이 쏟아져 나왔다.
혈토다.
피가 섞인 토사물이 조지의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며 조지가 결국 바닥에 자빠졌다.
그의 몸이 크게 경련을 일으키며 눈이 돌아간 채로 게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뭐지? 이게 대체 무…."
그 순간.
"커허억!"
블러드의 플레이어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도 갑작스레 가슴팍 언저리가 타오르는 것만 같은 통증에 휘감겼으니.
"크아아아악!"
결국 그의 입에서도 끔찍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
'재미있군.'
내 추측은 정확했다.
놈들은 더 이상 내 기척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게 확실해졌다는 말이다.
'좋군.'
그 말은 즉, 앞으로 내 움직임이 더욱더 과감해져도 문제없다는 뜻이니까.
'놈들은 그 이유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니.'
나에게 있어서는 더욱더 좋은 소식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놈들에게 렘의 기운을 뻗쳐 보였다.
그와 함께 두 녀석은 발작을 일으키며 피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조금 더 해 볼까.'
주변에 숨어 있을지 모를 쥐새끼들을 색출하기 위해 만리경을 통해 더 많은 렘을 흩뿌렸다.
만리경을 이루고 있는 마력과 렘이 충돌하며 스파크를 일으켰지만, 어차피 놈들은 그런 사실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에 빠져 있었으니.
나도 크게 개의치 않은 채로 과감히 렘을 흩뿌릴 수 있었다.
파짓! 파지짓!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스파크와 함께.
[커허어억!]
[크하아아아악!]
[사, 살려… 살려줘어어어!]
조지와 정체 모를 플레이어 두 사람이 몸을 뒤틀었고, 그 주변에 있던 플레이어들도 몇몇이 렘의 기운을 느끼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왜, 왜 그러는 거야, 갑자기!]
그 주변에서 멀쩡히 서 있던 플레이어들이 피를 쏟아내자.
사념을 받아들이지 않은 플레이어들은 화들짝 놀라며 쓰러진 이들을 바라봤다.
나는 렘을 움직여 놈들의 사념을 조금 더 건드렸다.
그 순간.
"……!"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노오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조지와는 달리, 그 옆에 있던 블러드 녀석은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정확히 내가 있는 곳을 노려보고 있는 그의 눈빛은 조금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초점만큼은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만리경의 정체를 눈치 챈 건가.'
[어리석…은…녀석…!]
놈이 다시 말했다.
확실하다.
나를 향해 하는 말이다.
지금 당장 움직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들어보기 위해 만리경을 유지했고.
[같은…방식으로… 몇 번이나… 우리를… 공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느냐…!]
그렇군.
놈은 이미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는 걸 예측하고 있었던 모양.
'역시 머저리들은 아니라는 거지.'
그와 함께 놈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의 목록도 살펴볼 수 있었다.
아직 하나 남아 있는 포식 슬롯 덕분이다.
'딱히 욕심나는 건 없다는 게 문제군.'
놈이 가진 능력 중 가장 쓸만하다고 할 수 있는 건 고작 해봐야 사념 증폭이라는 능력.
하지만 내가 블러드의 플레이어가 아닌 이상 사념을 증폭해서 좋을 일은 없으니, 포식할 생각은 없다.
'당분간 그냥 열어 둔 채로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적어도 상대방의 능력을 읽을 수 있다는 건 내가 큰 우위에 있다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이야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놈은 내게 있어서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다.
놈의 능력창을 쭈욱 흝어 보고 난 뒤 내린 결론이다.
어정쩡한 능력을 포식하고 이런 기회를 놓치는 것보단.
확실히 당분간 포식 슬롯을 열어두는 편이 이득일 것이다.
그 순간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대체 어쩌겠다는 거지?'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무언가 준비를 해 온 것 같다만.
놈의 꼴을 보면 지금 당장 나를 공격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은 아니다.
그런데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하게 떠들고 있는 것인지.
그때였다.
[받아라. 네놈이 했던 그것을… 그대로… 돌려주마.]
놈이 말했다.
그와 함께.
파지지직!
놈의 손을 타고 붉은 기운이 만리경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만리경을 구성하고 있는 마력과 놈의 사념이 충돌한 순간.
파지지지직!
거센 스파크가 타고 오르기 시작했고.
붉은 기운을 띠는 스파크가 순식간에 나를 향해 치달렸다.
그리고.
사념의 에너지가 나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뭐지?'
그렇다고 해서 이 사념이 나를 어찌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게 아니다.
그저 조금 불쾌한 감촉이 느껴지는 정도가 고작이었으니.
[멍청한 놈!]
만리경 너머에서 보이는 녀석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걸려들었구나! 너는 이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어가게 될 것이다. 사념이 너의 마력을 잠식한 이상, 네놈은 곧 네가 그동안 보아 왔던 좀비와 같이 변하게 될 테지. 물론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다음번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으흐흐… 으흐흐하하하!"
입에서 피를 쏟아내면서도 열심히 설명을 들어놓는 블러드의 플레이어.
덕분에 나는 놈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사념을 이런 식으로도 이용할 수 있는 것이군.'
파편으로 만들어서 힘을 증폭시킬 수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때였다.
[……?]
만리경 너머의 플레이어가 눈을 부릅떴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잘 알 수 있었다.
[렘의 기운이 마력을 보호합니다!]
[렘의 기운이 마력에 침투하는 사념을 정화합니다!]
[렘의 기운이 마력에 침투한 마력을 신체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합니다!]
지금 내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만리경을 바라봤다.
"내 이야기가 들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 것 같군."
저 녀석의 예상보다 나는 너무 강했다.
'렘. 정말 어떻게 되어 먹은 힘인지.'
나조차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레미드. 만약 그들이 조금만 더 호전적인 이들이었으면, 블러드가 어비스에서 사라지는 건 시간 문제였을 텐데.'
아쉽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그들이 내게 이런 힘을 건네줬으니 나는 그들의 힘을 이용해서 그들을 못살게 군 저 녀석들에게 징벌의 회초리를 내려 주는 수밖에.
그리고 나는, 움직였다.
'텔레포트.'
바닥에 나뒹군 채 눈알을 굴리고 있는 플레이어가 있는 곳을 향해서.
파앗!
내가 녀석의 앞에 도착한 그 순간.
"허, 허어어어억!"
놈이 기함을 내질렀다.
"반갑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