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성과는 있나?"
그 사건이 벌어진 지 꽤 오랜 일주일도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블러드에선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쉽지 않군요."
내가 알렉스에게 넘겨줬던 에이미의 한쪽 팔.
현재 템플에선 총력을 가해서 에이미의 한쪽 팔을 분석하고 있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가 나오지는 못했다.
"천천히 해. 지금 당장 블러드에서도 몸을 사리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럴 순 없죠."
알렉스가 고개를 저었다.
"놈들이 언제 어떻게 다시 날뛸지는 모릅니다. 지금이야 세가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제가 지켜봐 오기로 지금 놈들은 잠시 웅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런가."
"예. 그들이 지금껏 어비스에서 생존해 온 방식입니다. 뿌리를 들킬 만하면 쥐새끼처럼 쥐구멍에 숨어들기 일쑤죠. 그렇게 잠시 잊혀질 만하면 다시 모습을 드러내서 어비스를 헤집고 다니고요."
"쥐새끼라. 정확한 표현이군."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쨌든 그동안 아레스와 오디세우스, 제네시스의 길드에서 블러드 녀석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해 냈다.
오디세우스는 레이먼드가 장담했던 대로 블러드를 찾아낼 수 없었다.
고작 해봐야 한두 명 정도가 전부였다.
그 정도로도 레이먼드는 큰 충격에 빠졌었다.
자신이 철저하게 관리를 했음에도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아레스에는 역시 꽤나 많은 녀석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렇겠지. 톰. 그 녀석은 어때?"
"패닉에 빠진 상탭니다. 말할 것도 없죠. 자신이 블러드에게 완전히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요."
"아레스의 위상도 바닥으로 추락했겠군."
"예. 지금은 그렇습니다만… 워낙 저력이 있던 길드인지라 금방 다시 위세를 회복할 겁니다."
나는 알렉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어비스에 진입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나저나 강민씨의 개척률은 언제 봐도 경이롭군요."
"그런 편이긴 하지."
내 개척률은 40%에 이르렀다.
이미 아프리카는 한참 전에 추월했고, 유럽마저도 추월했다.
이제 내 앞에 남아 있는 것은 미대륙뿐.
"이것 참. 저도 미국 출신으로서 혀끝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군요."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거다. 너도 곧 다른 두 대륙과 비슷한 처지가 될 테니까."
"크으…."
말 그대로.
현재 미대륙의 개척률은 41.6% 언저리.
나 한 명과는 고작 2% 내외의 차이를 오가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마저도 이제 며칠이 지나지 않아 따라잡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건 그렇고, 그 박명철이라는 분은 언제쯤 올라오는 겁니까?"
알렉스가 물었다.
그동안 내가 몇 번 언급했더니 알렉스도 박명철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다.
하루 빨리 만나보고 싶다고 벌써 몇 번이나 내게 저런 말을 꺼내 온 참이다.
"흠."
당연하게도 그동안 위드 길드의 소식도 꾸준히 전해 들어왔다.
"나도 쉽게 예측할 수는 없다."
"그렇겠죠. 탑의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라는 건, 강민씨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그런가요."
"그래."
현재 위드 길드는 69층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했었다.
탑의 상황이 많이 안정화되었고, 탑의 외부와 꾸준히 교류하며 플레이어들의 평균적인 수준이 크게 올라가기 시작했고.
이제 위드 역시도 탑의 돌파에 온 힘을 쏟아붓는 중이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들이 돌아와도 저를 버리시지는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뭐?"
내가 피식 웃으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강민씨는 그 박명철이라는 사람에게 꽤 의지하는 것 같거든요."
부정은 할 수 없었다.
내가 마음을 내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이렇게 일을 벌여놓고 강민씨가 저를 버린다면 저라고는 해도 목숨을 부지하긴 힘들 겁니다."
알렉스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내가 오기 전의 어비스와 내가 도착한 후의 어비스는 많이 달라졌다.
블러드와 템플의 관계도 그렇다.
그 전만 하더라도 블러드의 입장에서 템플이란 조금 성가신 존재였을 테지만.
이제는 그런 수준을 넘어서서 블러드라는 집단의 존립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물론 나라는 인간의 지분이 크기는 하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나도 놈들의 뿌리를 뽑기 전까지는 충분히 너를 이용해 줄 거거든."
"하하. 이용이라… 나쁘지 않죠."
"너도 나를 이용해라."
"그러고 있습니다."
알렉스가 피식, 웃었다.
"그럼 당분간 어쩌실 생각입니까? 블러드 녀석들도 잠잠하게 기다리고 있는데요."
"할 일이 꽤 많아."
"아…."
알렉스는 내 옆에서 초롱초롱한 눈빛을 뿜어내고 있는 몰른과 해츨링을 바라보며 탄성을 쏟아냈다.
"에이미와의 싸움에서 꽤 큰 도움이 되기도 했으니 당분간은 이 녀석들을 조금 키워 볼 생각이다."
"확실히… 대단했죠. 저도 놀랐을 정돕니다."
"그래. 조금만 더 지켜 놓으면 확실히 큰 도움이 되겠어. 그러면 나는 가 보지. 무슨 일이 있거든 연락해라."
"예."
나는 곧 몰른과 해츨링을 이끌고 장소를 이동했다.
***
"오늘은 이걸로 할 테니 한 번 최선을 다해 봐."
나는 길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에에이이이!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요오오!"
몰른이 소리쳤다.
"무시라니. 어제만 해도 손가락이었던 거 잊었나?"
"으으으…!"
말 그대로다.
이것 역시도 이 둘의 실력이 꽤 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어제만 해도 나는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은 채 이 둘을 상대했으니까.
"이 나뭇가지 하나를 들었다는 게 너희의 실력이 크게 상승했다는 걸 증명하는 거다."
몰른과 해츨링은 분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억울하면 더 빨리 강해져라. 어제는 꽤 괜찮았어. 둘의 합이 꽤 완성되어 가는 것 같거든."
지금 내가 저 둘에게 연습시키는 건, 에이미와 싸웠을 때의 그 합공이다.
몰른은 활을 쏘아 내는 연사력에 집중했고, 해츨링은 마나를 움직이며 마법을 더해 화살의 폭발력을 더하는 데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합공을 할 필요는 없다. 너희들이 판단하기에 나를 정확히 노릴 수 있을 것 같다면 독자적으로 공격해도 상관없어."
수많은 변수가 벌어지는 전투 상황에서 한 가지 패턴만을 고수하는 건 좋지 않다.
합공을 하는 듯하다가도 변칙적으로 빈틈을 노려 공격하는 연습 또한 필요하다는 뜻.
"자, 그럼 시작해 보지."
나는 순식간에 두 사람과 거리를 벌렸다.
진짜 싸움이었으면 이미 저들은 내 손에 죽었을 테지만, 일부러 거리를 벌려 준 것이다.
나를 향해 마음껏 공격해 보라는 뜻으로.
그리고 동시에.
콰콰콰콰콰!
저 앞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바람의 기운이 스며 있는 화살이다.
해츨링은 화염 속성이 아닌 다른 속성의 마법도 꽤 능숙하게 다루게 되었다.
물론 그 위력 자체는 화염 마력에 비해 한참이나 부족한 것도 사실이지만.
카아아아앙!
나는 재빨리 나뭇가지에 오러를 불어 넣은 채 화살을 쳐냈다.
오러가 한참이나 진동했다.
바람의 마법이 더해진 몰른의 화살의 위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많이 발전했어.'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쿠쿠쿠쿠쿠!
화살이 맹렬한 기세로 날아들었다.
하나하나가 다양한 경로로 뻗어 나오는 화살들.
해츨링이 바람의 마법을 통해 화살의 진로를 조정한 덕에 몰른의 공격은 더욱더 위협적인 방향에서 나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화살 위를 휘감고 있는 마법들은 그 속성도 다양해졌다.
바람, 물, 불, 전기 등.
다양한 속성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해츨링의 솜씨와 몰른의 활 솜씨가 절묘하게 뒤섞여 있었으니.
'재미있군.'
나는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콰콰콰콰쾅!
내가 조금 전 서 있던 곳을 향해 폭탄이 투하되듯 쏟아지는 화살들과 함께.
쐐애애액!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가 착지한 곳을 향해 몰른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오호.'
마법이 뒤덮고 있지 않는 순수한 몰른의 화살이었다.
'이런 것까지 할 줄 안다는 말이야?'
재미있었다.
내가 강해지는 것 이외에도 몰른과 해츨링을 키우는 데에 슬슬 재미가 붙기 시작한 찰나.
카아아아앙!
나는 나뭇가지로 몰른의 화살을 쳐냈다.
몰른의 화살의 궤도가 꺾인 채 먼 곳에 날아가 처박혔다.
역시나 폭탄이 폭발한 것처럼 굉음과 거센 연기가 피어올랐고.
다시 한번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져 내렸다.
벼락이다.
'호!'
재미있다.
너무 재미있다.
몰른이 빈틈을 노리는가 싶더니, 이번엔 해츨링이다.
'조금 전 내가 했던 그 말을 벌써 응용하기 시작했나.'
스펀지처럼 빠르게 가르침을 습득하니 가르치는 맛이 더 좋다.
홱!
다시 몸을 날렸고.
벼락이 바닥을 내리쳤다.
그 자리로 이번엔 몰른와 해츨링의 합공이 쏟아졌다.
콰콰콰콰!
당연히 나를 맞출 수는 없었지만, 훨씬 더 날카롭고, 매섭고, 강해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대로만 자라 준다면 머지않아 블러드 따위는 저 둘이서도 씹어 먹을 만큼 강해질 수 있으리라.
콰콰콰쾅!
몇 번이나 굉음이 터지고, 폭발의 잔해들이 허공을 비산하고 있을 무렵.
[박명철 : 69층, 돌파했습니다.]
순간 박명철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헛!"
그 메시지에 가려져 나를 향해 날아드는 몰른과 해츨링의 합공이 가려졌다.
'이크!'
나는 다급히 몸을 굴렸다.
내가 공격을 당해서는 안 된다.
내 체면이 말이 아니지 않나.
어차피 저 둘은 펫이라 사망하지는 않겠지만, 저들도 고통을 못 느끼는 건 아니다.
죽지 않을 정도까지의 빈사상태에 빠지게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콰아아아앙!
나는 가까스로 둘의 공격을 피해냈고, 또 한 번 폭발이 일어났다.
'이제 슬슬 끝내야겠어.'
박명철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다.
팟!
나는 발을 굴렀다.
둘이 나를 노리며 움직이고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도약했고.
"흐, 흐어어억!"
"꾸아아앙!"
해츨링과 몰른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봤다.
허공에 떠 있는 나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지만.
타앗! 탓!
허공에서 마나의 벽을 만들어 도약하며 어렵지 않게 둘의 공격을 피해낸 나는.
그 둘의 뒤로 착지한 뒤 둘의 머리를 나뭇가지로 두드렸다.
타악! 탁!
"내가 이겼다."
"꾸우우웅…."
"말도 안 돼애애애…."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
내 위로는 위로가 되지 않은 모양이다.
저 둘은 많아 나아졌다는 내 말에도 아쉽다는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그 마음 잊지 마. 그게 너희들의 성장의 동력이 되어 줄 거니까."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다음번부터는 너희도 움직여 가면서 해도 괜찮겠어. 한 곳에 서 있다가는 언제 당할지 모르니까 말이야."
"아, 알겠어요오오!"
"꾸웅!"
새로운 과제가 내려왔다는 사실에 둘은 크게 기뻐했다.
"잠시 쉬고 있어라. 나는 대화를 좀 나누고 올 테니."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여기에서 당신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박명철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나도 알렉스와 박명철 두 사람의 만남이 기대되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그리고 다시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그런데 그건, 박명철의 답장이 아니었다.
[레이먼드 : 크, 큰일! 큰일이다!]
[톰 : 이, 이게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