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익숙한 장면이다.
에이미의 주검은 살아 움직이고 있었고, 이제 그녀의 모습은 생전의 에이미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의 흉물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동안과 다른 점 한 가지는.
[기회를 주었음에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것은, 용기인가, 만용인가.]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나와 대화를 해 줄 용의가 생긴 건가."
내가 물었다.
나는 이제 어느 정도 나와 대화하고 있는 저 존재가 이 탑의 본체와 큰 연관이 있다고 확신하는 중이었다.
추측뿐이지만, 심증은 넘쳐난다.
이 블러드라는 집단이 활동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탑의 본체의 음모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너는 완전히 잠들어 있는 게 아니었나?"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그가 말했다.
씨알도 먹히지 않는 거짓말.
'설계자들은 이 존재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나?'
아니, 그럴 수가 없다.
그들이 블러드라는 존재를 모를 수가 없었을 테고, 블러드의 숨겨진 정체에 대해서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다.
'폭주하는 놈을 가둬놓기 위한 일종의 감옥인가.'
탑과는 단절된 공간.
하지만 탑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짙은 사념이 떠돌아다니는 공간.
설계자도 이미 시인한 부분이다.
녀석의 남은 머리는 자신들의 손으로 처리할 수 없다고.
'역시 어비스라는 공간은 선별을 위한 곳.'
1차적으로 각각의 탑에서 플레이어를 선별한 뒤, 다시 어비스에서 플레이어들을 선별해 낸다.
'어쩌면 개척률이라는 건, 일종의 테스트 점수.'
하나씩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에이미였던 것을 바라보며 천천히 검을 움직였다.
"아마 곧 보게 되겠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면, 믿어라. 그 무엇도 네 뜻대로는 되지 않을 테니까."
[재미있군.]
그 순간, 대지가 요동쳤다.
콰콰콰콰콰!
에이미의 마법들을 몇 배로 강해진 위력으로 땅을 뒤흔들었다.
콰직! 콰콰콰쾅!
땅 아래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얼음 기둥이 솟구쳤다.
어느새 쓰러져 있는 알렉스를 몰른과 해츨링이 다급히 데리고 먼 곳으로 벗어난 상태였다.
"그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그저 우스운 발악일 뿐.
타앙! 터엉! 투타타탕!
놈의 마법은 나를 어찌할 수 없었다.
오히려 피해 반사 때문에 자신이 더 괴로워하고 있을 뿐이다.
"네가 무슨 발악을 하든지 나에겐 어떤 피해도 입힐 수 없다."
그리고.
파직!
검을 휘둘렀다.
렘이 뒤섞인 공격이 놈을 가로질렀고.
콰아아아!
그 안에서 다량의 사념이 뿜어져 나왔다.
공기를 축축하게 만들 정도로 걸죽하고 응축된 사념들.
"크아아아아아!"
포효했다.
이것은 놈이 아닌, 에이미의 포효였다.
그리고 다시.
쐐애애액!
에이미의 한쪽 팔이 기괴하게 뻗어 나오며 나를 향해 찔러 들어왔다.
카아아앙!
나는 어렵지 않게 그 공격을 쳐냈다.
"무슨 속셈이지? 너라면 충분히 알 수 있을 텐데? 이딴 것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말이다."
"키에에에에!"
하지만 들려오는 건, 오직 이어지는 에이미의 포효뿐.
"……."
끝인가.
더 이상 놈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에이미조차 이제는 의지가 남아 있지 않은 껍데기일 뿐.
'끝내야겠군.'
어차피 에이미의 파편은 아직 남아 있다.
저 파편만 손에 넣는다면.
그 순간.
파사삭!
에이미의 파편이 사라졌다.
그리고, 에이미의 몸도 마찬가지다.
'…젠장.'
늦었다.
분명 놈이 자신의 위치를 숨기기 위해 에이미의 몸을 없애 버린 게 분명했다.
그렇게 에이미의 온몸이 완전히 사라진 채,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하지만 성과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놈'과 대화를 할 수 있었으니까.
'존재를 모르는 것과, 알게 된 것에는 큰 차이가 있어.'
적어도 앞으로는 목적 없이 움직일 일은 없다는 것.
이 어비스 어딘가에 이 '탑'의 분신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
이 정도만으로도 분명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몸을 돌리기 위해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응?'
바닥에 떨어져 있는 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에이미의 한쪽 팔.
내가 베어냈던 그 한쪽 팔이다.
'이게 왜…?'
에이미의 모든 게 사라졌음에도 저 팔 한쪽은 사라지지 않았다.
'설마.'
내가 렘을 통해 팔을 베어냈기 때문에?
나는 다급히 에이미의 잘린 팔을 바라봤다.
잘려 나간 절단 부위가 타들어 간 것처럼 검게 그을려 있었고.
그 순간에도 잘려 나간 팔의 일부는 재생되고 있었다.
'…이건 또 새로운 발견이군.'
나는 에이미의 팔을 들어 올린 채 한 곳을 바라봤다.
거기엔 해츨링의 등 뒤에 업힌 채 간신히 숨을 고르고 있는 알렉스가 보였다.
'꽤나 고생했군.'
에이미의 괴팍한 마법을 피해 달리느라 알렉스도 많은 기력을 소모한 게 분명했다.
'원래 같았으면 진즉에 빠져나갔을 테지만.'
나의 부탁 때문에 에이미의 범위 내에서 그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그의 능력을 활용했으니까.
'그래도 선물을 하나 줄 수 있겠군.'
선물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놈들의 근원에 다가갈 수 있는 단서를 하나 손에 넣은 셈이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알렉스가 물었고.
휙!
나는 에이미의 팔을 던졌다.
그가 팔을 받아들었다.
"이건…?"
"에이미의 팔이다."
"……!"
"무언가 알아낼 수 있겠나?"
알렉스가 히죽 웃었다.
"충분하죠."
듬직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
"에이미가 죽었다."
"머저리 같은 것."
"결국 일을 냈군, 큰소리치더니 말이야."
한 남자의 말에 여덟 명의 플레이어들이 인상을 구겼다.
열 명이 앉아 있던 그곳에는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 자리는 말할 필요도 없이 에이미의 자리였다.
"어쩔 테지? 이렇게 된 거 확 박아 버리는 게 어때?"
"그래. 에이미 한 명으로는 안 됐다지만, 우리가 같이 움직이면 그 녀석이 어떻게 할 수 있겠어?"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하지만."
남자의 말에 모두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래 참아왔다.
그들은 블러드라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각자 어비스 전역에 흩어져서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점원으로, 누군가는 말단 길드원으로, 또 누군가는 떠돌이 용병으로.
손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그건 조심해야 한다."
남자가 말했고.
플레이어들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어렸다.
"뭐가 문제야. 어차피 에이미 그 여자는 우리 중에서 최약체였잖아."
"그래. 그 말이 맞아. 고작 에이미가 당했다고 해서 우리가 위축될 필요가 있어? 벌써부터 어비스 전체에 우리는 비웃는 소리들이 퍼져 나오고 있다고!"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들 조용히 해. 내가 직접 확인했다."
"……."
그의 무거운 목소리에 모두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여기에서 저 남자의 말을 거슬러서 좋을 게 없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암묵적인 서열 정도야 이미 서로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남자는 마지막 강민의 얼굴을 떠올렸다.
명백하게도 자신을 무시하고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건방진 놈.'
입술을 곱씹었다.
'에이미를 통해서 진짜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건만.'
강민의 실력은 자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
웬만한 준비로는 감히 털끝조차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참이었다.
'괴물을 길러냈군.'
그는 한 여자를 떠올렸다.
탑의 설계자.
언젠가 자신에게 맞섰던 그 여자다.
그때의 생각만 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곤 했다.
'나의 안락한 유희를 그토록 망가트리다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모든 것을 처부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답답할 따름이다.
아직도 저곳 어딘가에 자신의 힘의 대부분이 잠들어 있었으니까.
'그 힘을 조금만 더 끌어 올 수 있으면… 네놈 따위는 손가락 하나로도 짓눌러 죽일 수 있을 것인데.'
지금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할 때다.
그것을 위해 블러드라는 집단을 만들었고.
플레이어들을 모아서 이런 소꿉놀이를 어울려 주고 있을 뿐이었다.
'역겹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플레이어들.
그들의 표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토악질이 터져 나왔다.
인간.
'…….'
그 순간에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무수한 인간들의 군상이 흘러갔다.
수백만, 수천만, 혹은 수억 개도 넘는 세계의 인간들의 행동 양식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가 집어 삼킨 세계.
그리고 그 세계를 살아가던 수많은 이들의 기억과 정보들이다.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방대한 양의 데이터들이 쏟아져 나왔으니.
'그런 인간은 확실히 까다로운 게 분명해.'
그곳 세상에서도 강민과 같은 성격을 지닌 이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확신과, 결정이 난 순간 고민 따위는 없이 실행으로 옮기는 행동력.
'많다.'
분명 그런 인간들은 많다.
하지만 강민은 달랐다.
그들이 패기와 객기로 움직였다면 강민에게는 명백한 근거가 존재한다.
'자신의 힘.'
바로 그것이다.
모든 추측과 모든 근거를 현실로 뒤바꿔내는 가장 강력한 동력.
그것은 스스로가 일궈낸 '힘'이었으니.
'확실히 까다로운 녀석이야.'
그렇지만 답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봐야 한낱 인간일 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난다면, 한낱 인간 따위는 자신의 밥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다시 그가 주변을 둘러봤다.
역시나 역겨운 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차분하고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언제나 대비책을 가지고 있으니까."
모두의 얼굴이 미약하게나마 밝아졌고.
"들어와라."
남자의 말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누구지?"
"처음 보는 녀석인데."
남자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모여 있는 이들을 향해 말했다.
"나다."
"……?"
그게 무슨 소리일까.
나라니?
"뭐, 뭐라고?"
"잘못 들은 건가?"
플레이어들의 반문.
하지만 남자는 다시금 낮은 목소리로, 정확한 발음으로 다시 읊었다.
"말 그대로. 저건, 또 다른 나다."
모두가 경악에 빠졌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가 걸치고 있던 후드를 벗어냈다.
"허, 허억!"
"이, 이게… 이게 뭐야…!"
그들이 경악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지근 저기에 서 있는 자의 얼굴은 그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에, 에이… 에이미…."
그렇다.
남자가 자신이라고 소개한 건, 다름이 아닌 에이미였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파, 팔이 왜 없는 거지?"
한쪽 팔이 잘려 나갔다는 것뿐.
"잃어버렸다. 놈이 귀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거든."
덤덤한 남자의 말과는 달리 플레이어들의 표정은 복잡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뇌리에 무언가 좋지 않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불길한 예감들.
하지만 그들의 머리는 남자의 한 마디에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모두 생각을 멈춰라. 너희는 내 말대로 움직이면 돼. 아, 그리고 소개할 사람이 하나 더 있다."
그 말과 함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남자는 역시나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는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