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다들 모여 있군."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레이먼드와 톰, 그리고 조지 세 사람이 모여 앉아 있었다.
각자가 어비스 전체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길드의 수장들.
그들이 한데 모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게 내심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들로서는 난감하겠지.'
나는 사실 불청객이나 다름없다.
이들이 유지하고 있던 어비스라는 세계의 큰 균형을 깨부수는 불청객.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격이겠지.
저들의 계획 속에는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들이 그려 있었을 것이다.
개척률을 진척시키고, 어비스의 상부로 진입하여 가장 먼저 탑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
그 목표치에 가장 가까운 이들이 바로 이 세상들이었을 텐데.
내가 등장한 순간 그것들이 모조리 박살하지 않았던가.
"…믿을 수 없군."
내가 도착한 순간, 아레스의 톰이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너는 괴물이야."
레이먼드가 다시 내게 말했고.
"……."
조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방금 확인했다. 너의 개척률."
"그런가."
나도 조금 전에 확인한 사실이었다.
어느새 내 개척률은 33.5%가 되었고, 지금 막 아프리카 대륙의 개척률을 넘어선 참이었다.
35%에 올라선 유럽과도 이제 1%대로 차이가 좁혀진 상황.
"다들 마음이 급하겠군."
조지와 톰.
두 사람을 향해 말해줬다.
지금 막 아프리카를 넘어섰을 뿐, 미대륙과 유럽도 큰 차이는 벌어지지 않은 상황이니까.
"너무 실망할 필요 없다. 너희가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더 뛰어났을 뿐이니까."
"……."
세 사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지만, 그렇다고 딱히 반박은 하지 못했다.
어쩌겠나. 명백한 사실인 것을.
"이런 이야기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닐 테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 어떻겠나."
"아, 아… 그래."
톰.
그가 복잡한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말을 이었다.
"에이미. 그녀가 사라졌다."
톰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드러냈다.
"뭐, 뭣!"
"에이미…!"
남은 두 사람은 크게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저들 모두 에이미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겠지.
듣기로 에이미라는 여자가 지금의 아레스를 일으키는 데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지금 에이미가 떠났다는 건, 그녀가 블러드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일 테니, 두 사람도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톰도 마찬가지다.
그의 표정도 역시 참혹했다.
물론 나야 이미 알고 있었으니 크게 놀랄 이유는 없었지만.
방금 전 톰의 말과 표정을 통해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그저 이용당했던 것이군.'
"그러면 결정한 건가?"
"……."
톰은 역시나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하지만 나는 그가 이미 마음을 다잡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여기에 나올 이유도, 내게 에이미에 대한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테지.
그리고 결국.
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군."
"그런데 대체 어떤 식으로 색출을 하겠다는 거지? 네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우리 길드의 규모가 워낙 크기도 하고…."
"그건 걱정 안 해도 된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손님을 한 명 초대했거든."
"손님…?"
"아마 너희도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게 무슨…?"
그때.
저벅
발걸음 소리와 함께, 세 사람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소개하지. 블러드 만큼이나 어비스에서 꽤 신출귀몰하게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다."
"…누구…?"
"알렉스. 템플의 수장이다."
내가 소개했다.
저들도 알렉스의 얼굴은 초면인 듯했다.
"맙소사."
"허…!"
거대 길드의 세 길드장이 놀랄 정도로 충격적인 인물의 등장.
"알렉스입니다. 현재 템플을 이끌고 있죠."
"……."
"아니, 이게… 그러니까…."
"당황하신 건 압니다. 하지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었고, 당신들 앞이라면 부하를 보내는 것보단 제가 직접 나오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기도 했죠."
알렉스가 말했다.
그리고.
"앉아도 될까요?"
"무, 물론… 앉으시죠."
톰마저도 공손해지는 태도.
"이, 이렇게 쉽게 얼굴을 드러내도 되는 겁니까? 당신은 이미 모든 블러드의 표적인…."
"찾을 수 있으면 찾으라고 해보시죠."
"……."
알렉스의 자신감 있는 한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저를 못살게 군다면…."
알렉스가 내 얼굴을 바라봤고.
"이분께서 혼쭐을 내주실 거라고 믿고 있거든요."
그렇지 않느냐는 듯 나를 향해 눈짓을 보내는 알렉스.
나는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도록 하지."
"하하.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알렉스가 다시 세 사람을 바라봤다.
"제 걱정은 마시고, 여러분들의 길드를 먼저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으니까요."
표적은 고작 아레스 하나가 아니었다.
현재 어비스의 톱 3.
세 거대 길드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
"우습군."
"정말 재미있지?"
"첫 번째로 우리 중 정체를 밝힌 사람이 여기 앉아 있다니."
"아니지, 아니야. 밝힌 게 아니라 밝혀진 거지."
블러드의 상위 랭커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그들은 한 사람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녀는 에이미다.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이미 그녀의 정체는 그들 사이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알 사람은 모두가 에이미가 아레스를 이탈했다는 정보를 파악한 뒤였고, 블러드의 상위 랭커들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고 있는 블러드의 랭커들 중에서도 이미 그녀의 정체가 까발려진 상황.
"……."
에이미가 입술을 곱씹었다.
분하고, 화가 났지만 할 말이 없었다.
이번 일로 아레스와 제네시스를 움직여 강민과 오디세우스를 처치하고 크게 도약할 생각에 부풀어 있었건만!
"아직… 끝이 아니야."
에이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놈을 반드시 내 손으로 끝낼 거야."
"풉. 그게 정말 가능하겠나? 이미 정체도 까발려진 판에? 에이미씨?"
"그만!"
에이미가 소리쳤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한 사람만 빼고.
"그래. 다들 너무 조롱하지는 말도록 해. 한강민 그자가 범상치 않다는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
중후한 목소리의 남성.
그가 입을 연 순간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저 녀석….'
'사실상 우리의 중심이지.'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사실상 여기 있는 열 명을 모아낸 남자다.
그러니 자연스레 이 무리의 중심이 될 수 있었고, 현재 블러드의 최상층에 서 있는 남자다.
'저자의 정체가 뭘까.'
블러드의 랭커들조차 알지 못하는 남자의 정체.
"에이미."
남자가 에이미의 이름을 불렀다.
"……."
"네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마."
얼핏 다정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투지만, 그 말을 듣고 있는 에이미는 내심 소름이 돋는 것을 억눌러야만 했다.
"자. 오늘의 모임은 이만 하도록 하지."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에이미를 바라봤다.
"에이미. 너는 잠시 남아라."
"……."
모두가 모습을 감추고, 그 자리엔 남자와 에이미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너를 탓하지 않는다. 네가 아니라 다른 누가 너의 입장이었어도 같은 일이 벌어졌을 거야."
"…미안…."
"아니야. 미안할 것 없지. 하지만 너도 알아야 할 게 있어."
"……?"
"너의 실수로 인해서 우리 블러드에 피해를 끼쳤다는 것이지. 너의 실수가 아니더라도,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렇지?"
"마, 맞아…."
에이미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팩트다.
"이미 세 거대 길드에서 대대적인 블러드 색출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하더군."
"……."
"하지만 오히려 이게 기회도 될 수 있지 않겠어?"
"뭐라고…?"
"그렇잖아. 이번 블러드 색출 작업에서 선두에 서 있는 건, 템플이다. 그 템플. 너도 알고 있겠지?"
"마, 맞아…."
"네 손으로 그들의 수장을 사로잡아 오도록 해."
"뭐, 뭐?!"
"만약 네가 템플의 수장을 사로잡아 온다면, 네가 끼친 모든 피해를 복구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너의 위상은 더욱더 올라가겠지."
"하, 하지만… 어떻게… 그 사람은…."
그 순간, 에이미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침착하고 다정한 말투와는 너무도 다른 그의 눈빛.
여기에서 한 마디라도 더 했다가는 에이미 자신의 목숨이 무사하지 않으리라는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내가 네게 힘을 주지."
"힘…?"
"그래. 어차피 너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테니, 차라리 잘된 일이지. 마음껏 날뛰고, 그를 사로잡아 와라. 한강민, 그자는 건들지 않도록 해. 지금의 너로서는 결코 그자를 어찌할 수 없을 테니까."
"아, 알겠… 알겠어."
"자, 내게 가까이 와라."
에이미가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파아아앗!
남자의 손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에이미의 가슴에 박혀 있던 파편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에이미의 전신에서 핏줄이 도드라지게 튀어나왔다.
"꺼, 꺼어억…!"
에이미가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가슴 한복판을 바라봤고.
"아프겠지만, 참아라. 너는 더 강해질 것이다."
파아아앗!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에이미의 눈동자 역시 빛과 함께 빨갛게 물들어갔다.
***
우우웅!
'음?'
가슴팍에 넣어 뒀던 파편.
에이미의 사념을 추적할 수 있다던 그 파편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파편을 바라봤다.
이 파편은 정화하지 않은 채 놔뒀기에 아직도 붉은 기운이 강렬하게 맴돌고 있었다.
그 순간.
"헛."
붉은 파편 한가운데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뭐지?"
그동안 여러 개의 파편을 보면서도 이런 현상은 처음 마주하는 현상이었다.
가운데에서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한 검은 기운은 어느새 차차 굳어지기 시작했다.
붉은 파편 한가운데에서 완전히 굳어진 검은색의 기운.
'강해졌다.'
분명히 느껴졌다.
검은 기운이 피어 나오기 시작한 순간, 사념의 파편이 품고 있는 기운이 처음에 비해서 몇 배로 증폭된 것이다.
'이거 어쩌면….'
정말로 심상치 않은 실마리가 내 손에 들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내 예상대로라면 누군가 에이미라는 여자에게 더 많은 기운을 쏟아 준 것 같은데 말이지.'
그게 누구인지 아직까진 알 수 없을 테지만, 적어도 에이미보다는 블러드의 중심에 가까운 이라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재밌게 되었군.'
어쨌든 에이미의 힘이 더해진 이상, 이제 곧 에이미가 움직이라는 건 예정된 일일 테고.
'템플의 기술을 통해 이 검은 기운마저 역추적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다시 한 걸음 블러드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이 탑의 비밀에 크게 한 걸음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에이미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냐는 것.
'나? 아니면 거대 길드?'
아직은 예측할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거대 길드를 모조리 박살 내려고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을 테고.
아니면, 다시 한번 나를 노리려 다가올 수도 있을 테니까.
잠시 궁리에 빠져 있던 중.
'혹시.'
뇌리에서 무언가 번뜩였다.
'알렉스?'
어쩌면, 에이미는 알렉스를 노릴 속셈일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어쩌면 절호의 기회일 테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장 알렉스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알렉스가 있는 곳에서 분명 무슨 일인가 벌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