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마침 잘 왔군."
레이먼드에게 말했다.
"벌레 한 마리 찾았다."
"뭐?"
"못 들었나? 벌레 한 마리를 찾아냈다고."
레이먼드가 눈매를 좁혔다.
"그 벌레라는 게… 설마 블러드를 말하는 건가? 아니겠지?"
"정확히 알고 있군."
"아니, 대체 어떻게…?"
"그런 방법이 있다. 그보다 너는 해줘야 할 게 있어."
"해줘야 할 일?"
"그래. 시간을 끌어 줘라."
"그게 무슨 소리야. 다짜고짜 시간을 끌라니."
"벌레잡을 시간을 벌어 달라는 뜻이다.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괜히 번거로운 일은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그 와중에도 레이먼드는 영 의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싸움판이 벌어졌는데 대체 어떻게 시간을 끌라는 말이야?'
레이먼드가 말했다.
그 순간.
[알렉스 : 총 세 명. 이곳에 총 세 명의 블러드가 숨어 있습니다. 블러드 내에서 최소 100위권 내에 랭크된 플레이어일 겁니다.]
알렉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세 명이라는 말이지.'
내가 발견한 건 고작 하나.
그 외에도 두 마리의 벌레가 더 숨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놈들이 왜 여기에서 숨어 있는 거지? 무슨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내가 물었다.
그렇지 않은가.
놈들은 가만히 앉아서 강 건너 불구경만 할 수 있는 일일 텐데도.
굳이 이 싸움에 참가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알렉스 : 당신을 노리기 위해서겠죠. 당신은 이미 블러드의 적입니다. 블러드를 공격한 이상, 그들의 표적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요.]
[여기에서 한 번에 끝내 버리겠다는 거군. 오디세우스건, 나건. 깔끔하게 말이야.]
[알렉스 : 그럴 겁니다.]
[알겠다. 마침 벌레 한 마리를 찾아냈으니, 남은 두 마리도 금세 찾아낼 수 있을 거다.]
[알렉스 : 찾아냈다니요?]
역시 레이먼드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알렉스.
[방법이 있다. 어쨌든 고맙군. 두 마리가 더 있다는 정보를 줬으니 나도 한결 편해졌어.]
알렉스와 대화를 마친 뒤, 나는 레이먼드를 바라봤다.
"잠시 시선만 돌려주면 된다. 10분. 10분이면 충분해."
내가 정확히 블러드의 플레이어를 쓰러트리면, 곧바로 반응이 올 것이다.
놈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하겠지.
하지만 그 전에 놈이 블러드라는 사실만 밝혀낸다면, 남은 두 마리의 벌레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놈이 숨겨 둔 파편을 꺼내면 된다.'
그것이 내 계획.
그리고.
"움직여 줘."
"…알겠다."
레이먼드는 천천히 적진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
'뭐였지, 분명 무언가 있었는데.'
요한이라는 남자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분명히 느꼈다.
자신의 사념과 충돌하는 알 수 없는 기운을 말이다.
'그것보다… 한강민이라는 자의 기척이 눈에 띄게 옅어졌다.'
지금 요한이 크게 당황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처음 강민이 어비스에 도착한 순간, 사념을 가슴에 품고 있는 모든 블러드의 플레이어들은 강민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강민의 기척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으니.
'그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어.'
비단 그에게만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현재 블러드의 수뇌부에서도 강민의 기척이 옅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은연중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괴물 같은 녀석이 신출귀몰하게 움직이기까지 한다면, 골치 아플 수밖에 없어.'
그러니 이번 싸움에서 반드시 강민을 쓰러트려야 한다.
지금 저 먼 곳에서 자신들을 내려보고 있는 강민.
'이번에 저 녀석만 쓰러트린다면, 나는 더 많은 사념을 주입받을 수 있게 될 거다.'
그는 한 곳을 바라봤다.
아레스 내부에 잠입해 있는 또 다른 블러드의 플레이어들.
역시 모두가 요한과 같은 표정이다.
무언가 꺼림칙하다는 듯한 표정 말이다.
'에이미의 말만 믿고 오긴 했다만.'
에이미.
현재 블러드에서 10위권 내에 위치한 고위 랭커.
사실상 아레스라는 거대 길드를 좌지우지하는 '거인'이었다.
'아니야. 에이미의 감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으니까. 이런 기회를 내게 줬다는 사실에 감사해야겠지.'
요한은 싸움이 벌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민의 기색이 옅어지긴 했지만, 거리가 가까워진 덕에 그의 위치를 추적하는 덴 무리가 없었으니.
'시작과 동시에 다른 두 녀석과 함께 놈을 포위하고, 죽인다.'
이미 사전에 합을 맞춰 놓았다.
그들의 계획은 싸움이 시작됨과 동시에 10초 이내로 강민을 '암살'하는 것.
시간이 지체된다면 승산이 떨어지리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숨돌릴 틈도 줘서는 안 돼.'
그렇게 요한이 싸움이 시작되길 기다리며 숨을 고르고 있던 중.
'…뭐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레스의 길드장 레이먼드가 그들의 진영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멈춰! 레이먼드!"
아레스의 길드장, 톰이 외쳤고.
"잠시만. 잠시만 대화를 나누고 싶다."
레이먼드가 말했다.
"대화라니! 이제 와서 꼬리를 내리겠다는 거야?"
"그게 아니다. 다만…."
레이먼드가 바쁘게 머리를 굴리고 있던 중.
"……?"
요한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 순간.
"어…?!"
요한의 시야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크아아아아아아!]
그의 뇌리에서 끔찍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뭐지…?'
그 순간에도 요한은 이 상황에 대해서 짐작조차 할 수 없었고.
풀썩
요한의 몸이 고꾸라졌다.
그 순간.
"요, 요한… 요한이 죽었다!"
"기습이다! 기습이야아아아!"
아레스의 플레이어들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
텔레포트로 요한이라는 자가 있는 곳에 도착했고, 그 순간 놈의 몸을 베어냈다.
하지만 내가 그를 베어내는 데 사용한 건, 오러가 아니었다.
'렘.'
이전에도 확인했듯, 렘을 이용해 검을 뒤덮었고.
그 상태로 요한을 베어냈다.
하지만, 이전에 경험했던 것과는 결과가 사뭇 달랐다.
'베어버렸어.'
내 예상대로라면, 그저 놈의 사념이 모습을 드러내거나 힘이 약해졌어야 했건만.
검을 휘두른 순간, 놈의 몸이 그대로 토막이 나 버린 것이다.
'사념이 몸을 완전히 잠식했기 때문인가?'
그럴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렘을 뒤덮으면 탁자조차도 베어지지 않는다는 걸 내 두 눈으로 확인했다.
내 손으로도 직접 테스트 해 봤고 말이다.
'지독하군.'
어쨌든.
"기습이다아아아아!"
"요한, 요한이 죽었다아아아!"
요한이라는 자가 쓰러짐과 동시에 아레스의 플레이어들이 나를 향해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레이먼드 이 개자시이이이익!"
아레스 길드의 길드장이 레이먼드를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콰콰콰쾅!
파직! 콰직! 파득!
나를 향해서 각종 공격들이 터져 나왔지만, 내게 타격은 전혀 없다.
저들이 어떤 공격을 하건 지금 나에게 해를 입힐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까득! 까드득!
조금 전 쓰러졌던 요한의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는 것.
'그 현상이다.'
블러드 녀석들을 처치했을 때 나타나던 그 현상 말이다.
죽은 시체가 다시 살아 움직이며 괴상한 형태로 변신하고.
'나타났다.'
파편.
놈의 가슴 한복판에서 파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으헉! 흐아아아악!"
"저, 저게, 저게 뭐야!"
"요, 요한이… 요한이…!"
그제야 그 모습을 발견해 낸 아레스의 플레이어들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냐고!"
"다들 물러서!"
내가 소리쳤다.
"이, 이…!"
아레스의 플레이어들은 내 말을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머뭇대고 있었고.
"물러서라, 다들! 당장 물러서!"
톰이 외쳤다.
그는 어느새 레이먼드를 향한 검을 치운 상태로 자신의 길드원들을 뒤로 물리기 시작했고.
'자, 다음은 어디냐.'
나는 급히 시선을 움직였다.
역시 초감각이 바쁘게 작동하고 있기는 했지만, 블러드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낼 순 없었다.
'다만.'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플레이어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모두가 비슷한 패턴으로 움직이고 있는 와중, 유독 남들과는 다르게 바쁘게 어디론가 향하려는 플레이어 두 명이 초감각의 감지 범위에 포착되었으니.
'잡았다, 벌레 두 놈.'
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파앗!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으, 으아아아악!"
플레이어가 기겁하며 괴성을 내질렀다.
"너였구나, 다른 벌레가."
그는 동양인 남자였다.
"무, 무슨… 무슨 말이야!"
"걱정 마라. 잠깐 확인만 할 거니까."
그리고 나는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역시나 렘이 감싸고 있는 검이었고.
휘익!
검이 놈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 순간.
"꺼어어억…!"
남자의 몸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시나.
빠드득! 까드득!
잘라진 몸이 이어 붙고, 갈라지기를 반복하며 부풀어 올랐으니.
'두 번째 벌레도, 컷.'
"으아아아악!"
"조, 존이…! 존이!"
남자의 이름은 존이었던 모양이다.
주변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존의 몸이 괴상하게 변하는 것을 보며 나자빠지기 시작했다.
홱!
"잘 지키고 있어라. 이 녀석이 폭주하기 전에."
그리고 나는 다시 한 곳을 바라봤다.
어디론가 다급히 달려가고 있는 플레이어 한 명.
'마지막 벌레다.'
놈은 그러는 중에도 뒤를 힐끔 바라봤고.
놈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으아아아아악!"
괴성을 내질렀다.
거리가 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여기까지 고함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커다란 비명이었으니.
파앗!
나는 다시 놈이 있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콰직!
놈의 목을 붙잡았다.
"꺼… 꺼어억…!"
내 손에 붙들린 플레이어가 온몸을 경련하듯이 떨어대며 신음을 쏟아냈다.
"어딜 도망가려고."
"으억… 어어억…!"
내 손에 목이 붙들린 블러드의 플레이어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입에서는 침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잠시나마 좋은 꿈을 꿨겠군."
"으어억… 꺼어억… 살, 살려…."
"살려 달라니, 우습다고 생각되지 않나?'
"으억… 흐어억…."
놈은 그 와중에도 팔다리를 부르르 떨며 나를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나를 떨쳐내기엔 너무도 약했으니.
"잘 가라."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때.
[알렉스 : 그 녀석, 넘기실 수 있겠습니까.]
어디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알렉스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알렉스 : 놈을 통해서 알아내고 싶은 게 있습니다.]
'…….'
풀썩
나는 놈을 바닥에 내던졌다.
"꺼어억… 허어억…."
놈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여기에 그냥 놔두면 되나?]
[알렉스 : 예. 움직이지만 못하게 놔두십시오. 저희 쪽에서 알아서 수거해가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하며 나는 저쪽을 바라봤다.
한바탕 쑥대밭이 되어 있는 세 진영 사이로 세 사람이 마주한 채 서 있었다.
각 길드의 길드장들.
전쟁을 하겠다고 나섰던 이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나 역시 그 한 가운데로 걸어 움직였다.
그리고 내가 그들 사이로 도착한 그 순간.
"……."
"어떻게… 알아챈 거지?"
"후…."
세 사람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대답 대신 아레스의 길드장을 바라봤다.
"네놈이군. 지상최강의 머저리가 말이야."
"뭐, 뭐…!"
그가 입을 뻥긋댔지만, 딱히 반박은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