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이거….'
어느새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한 렘의 기운은 내 손을 온전히 감싸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검을 꺼내 들었고.
검 위로 렘의 기운을 흘려보냈다.
그 순간.
우우웅!
검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렘의 기운을 감쌌다.
그리고 다시 마력을 흘려보낸 그 순간.
파짓!
렘의 기운은 그새 모습을 감췄다.
'…흠.'
결국 렘과 오러는 공존할 수 없는 속성이라는 말이다.
그래도 성과가 없지는 않다.
어쨌든 고작 100 정도밖에는 안 되는 수치지만, 검을 감쌀 정도로 렘이 증가됐다는 뜻이니까.
다시 검 위로 렘을 뒤덮었다.
오러와는 달리 무형의 기운이 작게 일렁이고 있을 뿐, 집중하지 않는다면 렘이 뒤덮여 있다는 사실도 알아챌 수 없을 정도였다.
'이걸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 거지?'
살상력은 없다.
실제로 내 손을 가져다 대어 봤지만, 상처는커녕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으니까.
'쉽지 않군.'
하나의 실마리를 풀었다고 생각했건만.
'그나저나 정화 속도까지 빨라.'
나는 얼마 전 손에 넣은 창공의 군주의 사념 파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렘의 수치가 100이 넘어가며 어느새 파편의 정화가 1/4가량 이루어졌으니까.
그때였다.
'……!'
머릿속에서 무언가 번쩍, 하고 스파크가 튀었다.
'설마?'
동시에 내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검.
렘을 감싸고 있는 그 검 말이다.
'잠깐만.'
꿀꺽
목구멍 너머로 침이 크게 타고 흘렀다.
'살상은 할 수 없지만… 혹시 이거라면?'
렘과 사념.
사념을 정화해 낼 수 있는 렘.
그렇다면 혹시 렘을 두른 검으로 이 사념을 어떻게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해 보자.'
나는 사념의 파편을 탁자 위로 올렸다.
그리고 검 위로 다시 렘을 뒤덮었다.
"후우…."
천천히 숨을 골랐고.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사념의 파편을 바라봤고.
'가자.'
검을 움직였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아기의 주먹만 한 크기의 사념의 파편을 향해 렘이 일렁이는 검을 움직였고.
사악!
검이 렘과 탁자를 동시에 가르고 지나갔다.
놀랍게도 탁자는 잘리지 않았다.
사념의 파편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검이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탁자와 사념의 파편은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됐다.'
순식간에 3/4가량을 차지하고 있던 붉은 기운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맙소사.'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일격으로 사념의 파편을 모두 정화해 낸 건 아니지만, 한눈에 봐도 남은 사념의 절반 이상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다시 해 보자.'
나는 사념의 파편을 향해 다시 한번 검을 움직였고.
역시나.
'믿을 수 없군.'
남은 사념의 절반 이상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횡재했어.'
사념을 정화해 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방법이 내 손안에 들어온 순간이다.
***
[완전히 정화된 사념의 파편]
>한때 강한 존재가 품고 있던 사념의 파편. 이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양의 기운이 담겨 있다.
결국 사념의 파편 안에 담긴 사념을 모조리 정화해냈다.
고작 10분도 걸리지 않아 만들어 낸 결과였다.
'잘 됐어.'
그렇지 않아도 이제 다른 스탯들이 5000에 도달하면 사념의 파편을 사용해야 했을 테니까.
'레미드. 나중에 만나면 한 번 안아 주든지 해야겠는데.'
만약 그들을 만나지 못했으면.
그래서 내가 이 렘이라는 힘을 손에 넣지 못했으면.
'정말 오랜 시간을 낭비할 뻔했어.'
나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사념의 파편을 인벤토리 한곳에 잘 모셔뒀다.
'그럼 이제….'
연락을 기다릴 시간이다.
템플이건, 오디세우스건.
어디든 좋다.
'템플에게 연락이 온다면 블러드와의 싸움이 시작될 것이고, 오디세우스에게 연락이 온다면 내 장비가 완성됐다는 뜻이겠지.'
미스릴, 아다만티움 그보다 뛰어난 금속으로 만든 새로운 장비.
그것이 도착할 날이 얼마 멀지 않았다.
***
[후안 : 한강민씨. 의뢰하신 장비가 완성됐습니다.]
결국 내게 먼저 연락한 건, 오디세우스 쪽이었다.
그동안 알렉스나 다른 템플의 플레이어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도착하지 않았다.
실제로 블러드로 추정되는 이들도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고 말이다.
'차라리 잘된 일인가.'
놈들을 만나기 전, 장비를 바꾸고 만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 메시지를 받은 즉시, 나는 오디세우스의 길드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
"오랜만이야."
"그런가."
"아닌가?"
"…말장난은 그만하지."
"으하하핫!"
레이먼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기대하라고. 물건이 꽤 잘 뽑혔어. 내 장담하는데, 너도 충분히 만족할 거다."
"기대가 되는군."
레이먼드라는 남자는 결코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장비가 잘 뽑혔다는 말은 허세가 아니라 진실일 게 분명했다.
"그건 그렇고 말이지."
레이먼드가 입맛을 다셨다.
"방금 전, 개척률을 확인했다."
"그런가?"
개척률.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내 개척률은 28%에 도달했다.
특히나 내가 머물던 숙소에서 오디세우스의 길드가 있는 이곳까지 오는 길에 개척률은 미친 듯이 치솟았던 것.
"그래도 그 사이에 다른 대륙의 개척률도 꽤 진척됐더군."
실제로 그랬다.
어느새 미대륙은 35%.
유럽은 34%.
아프리카는 33%까지 올라선 것이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레이먼드가 화들짝 놀라며 반문했다.
"지금 너 때문에 난리가 났다고."
"무슨 소리야."
"너 하나가 개척률을 저렇게 미친 듯이 올려대는 바람에 전 길드에 비상이 났다고. 전투인력을 최소화하고 개척률을 올리기 위해 전투 인력을 탐색 인력으로 돌릴 정도라니까."
"그런가?"
"이런 젠장."
레이먼드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렇다고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나는 그냥 웃어넘겼다.
"억울하면 내 인생을 한 번 살아 보던가."
"그래? 그게 가능하다면 꼭 해보고 싶군."
"후회할 거다."
진심이다.
지금이야 웃고 있지만, 전생의 나는 매일을 저주하고, 매일을 나락에서 허우적대는 기분으로 살아왔으니까.
"그래. 그래서 대체 내 장비는 어디 있는 거야?"
내 말에 레이먼드가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다. 저기가 우리 길드의 공방이야."
거대한 공간이 내 눈에 보였다.
해밀턴의 공방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규모의 공방.
과연 어비스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길드라서 그런지 스케일 자체가 대한민국의 탑과는 한참이나 달랐다.
'이게 세계인가.'
어쩔 수 없이 대한민국의 탑은 조그마한 우물 속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 들어와."
레이먼드가 문을 열었고.
까아앙! 까아아앙!
화르르륵!
"이봐! 정신 차리라고!"
"조심해!"
"야, 이 정신 나간 새끼야!"
화끈한 열기와 무두질 소리, 그리고 대장장이들의 거친 외침들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이해해라. 다들 고생하는 친구들이야."
"이해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나 역시 저들의 열정을 존중하니까."
"그래 준다면 고맙고."
그러던 레이먼드는 한 곳을 바라보며 외쳤다.
"하드으으은!"
하든.
그것이 아마 레이먼드가 말했던 대장장이의 이름인 모양이다.
***
"길드장 나리시군."
하든이라는 대장장이의 첫인상은.
'드워프인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만약 그가 플레이어.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이야기를 미리 듣지 않았으면 여지없이 드워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키는 작았지만, 온몸이 근육으로 뒤덮여 있는 몸은 작은 키가 무색하리만큼 그의 덩치를 몇 배로 커 보이게 만들었다.
게다가 민머리와는 대비되는 길게 뻗은 수염 역시 꽤나 인상적이었다.
"하든. 내가 부탁한 건 다 완성됐습니까?"
"물론. 저쪽에 있으니 따라오시오."
하든은 내 얼굴을 흘끔 훑어보더니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성격은 저래도 꽤 정이 많은 사람이다."
레이먼드가 내게 말했다.
혹시 내가 기분이 상했을까 봐 염려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
"성격이 어때서."
하지만 나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내가 아는 어떤 대장장이에 비하면 하든의 저런 성격은 친절하다고 생각될 정도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내가 아는 대장장이를 소개시켜주고 싶군."
"오, 실력이 뛰어난가?"
"물론이다."
레이먼드의 눈이 번뜩였다.
"그만큼 인성도 훌륭하지."
"오오…."
레이먼드가 탄성을 흘려보냈다.
"깜짝 놀랄 거다."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레이먼드와 대화를 나누며 이동하던 중.
"이거요. 확인해 보시오. 확실히 탁월한 금속이더군. 쇠를 두드리면서도 당신의 안목에 크게 감탄했소.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나에게 이런 기회를 준 것에 대해서 감사를 전하고 싶군."
"별말씀을."
하든.
이 남자는 신사 중의 신사다.
감히 해밀턴의 인성에 비할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확인해 봐도 되겠지?"
"물론이오."
벽에 걸려 있는 장비를 바라봤다.
하의와 장갑, 부츠였다.
[창공의 금속 하의]
>방어력 : 226
>민첩성 +190, 마력 + 100
>특수 옵션 : 착용자의 몸을 가볍게 만들어 줄 것 같다. 이동 속도 + 10%
마력에 대한 저항력 + 10%
>잠재 옵션 : 민첩성 + 100
[창공의 금속 신발]
>방어력 : 197
>추가 스탯 : 민첩성 + 130 마력 + 99
>특수 옵션 : 착용자의 몸을 가볍게 만들어 줄 것 같다. 이동 속도 + 10%
마력에 대한 저항력 + 20%
>잠재 옵션 : 마력 + 100
[창공의 금속 장갑]
>방어력 : 180
>추가 스탯 : 힘 + 190 마력 + 99
>특수 옵션 : 착용자의 몸을 가볍게 만들어 줄 것 같다. 공격 속도 + 30%
마력에 대한 저항력 + 20%
>잠재 옵션 : 힘 + 110
'훌륭하군.'
지금 내가 끼고 있는 미스릴 장비의 방어력이 고작 100 언저리다.
하지만 창공의 금속으로 만든 장비들은 그의 두 배에 달하는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뿐인가.
보유한 추가 스탯의 총합만 따져도 미스릴 장비의 몇 배에는 해당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잠재 옵션까지 포함하면….'
감히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수치다.
민첩성이 420.
마력이 398.
힘이 300.
체력에 대한 옵션은 하나도 없지만, 사실 지금 내게 체력은 그리 중요한 옵션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쉬운 건, 대성공 장비가 없다는 거야.'
아마 해밀턴이었으면 저 중에 못 해도 하나라도 '대성공' 옵션이 붙어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
해밀턴이 너무 뛰어날 뿐, 하든이라는 대장장이가 못난 게 아니었다.
확실히 내 기대 이상으로 뛰어난 장비를 만들어 줬다.
그렇게 내가 장비를 착용한 순간.
[민첩성 스탯이 5000을 돌파했습니다.]
[마력 스탯이 5000을 돌파했습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체력을 제외한 나머지 두 개의 스탯이 5000을 돌파해낸 것이다.
그리고.
[민첩성의 초월 스탯 2차 돌파가 가능합니다.]
[필요 민첩성 스탯 1000]
[마력의 초월 스탯 2차 돌파가 가능합니다.]
[필요 마력 스탯 1000]
이번에도 역시나 초월 스탯 2차 돌파에 대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두 개 역시 힘 스탯과 마찬가지로 각각 1000의 스탯을 필요로 했다.
[민첩성 2차 초월 – 치명타 확률 70%]
[마력 2차 초월 – 마법 보호막 물리/마법 피해 75% 흡수]
[두 개의 초월 스탯 2차 돌파를 시도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인벤토리 안에서 완전히 정화된 사념의 파편을 꺼내들었다.
[완전히 정화된 사념의 파편으로 민첩성 1000/마력1000을 대체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정화된 사념의 파편을 스탯으로 대체하시겠습니까?]
고민할 이유도 없다.
'물론.'
[민첩성 2차 초월 돌파에 성공했습니다.]
[마력 2차 초월 돌파에 성공했습니다.]
놀라운 건, 아직도 사념의 파편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