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궁금해 미치겠는데.'
창공의 군주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강민의 뒷모습을 보며 레이먼드는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얼마나 강한 녀석일까.'
아직은 완전한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다.
사실 그런 강민과 접촉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도 길드 내부에서 많은 반발이 일었던 것도 사실이다.
'정체를 모르니까.'
알고 있는 것이라곤, 아시아에서 등장했다는 것과 그리고 블러드라는 집단과 크게 대척하고 있다는 것 정도.
'그것도 사실 큰 부담이지.'
블러드.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
그럼에도 블러드라는 단체가 현재 어비스에서 가장 큰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데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가장 은밀한 곳에서 움직이며 그들의 뜻에 반하는 존재들을 모조리 제거해내는 끔찍하리만치 두려운 이들이 바로 블러드였으니까.
'블러드에 그렇게 대놓고 선전포고를 했다는 건,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것일 테니까.'
레이먼드 그 역시 블러드라는 집단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블러드에 대해서는 언제나 언행을 조심해왔다.
그동안 말실수를 했다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길드가 한둘이 아니다.
'그런 와중에 내가 한강민 저자와 접촉하겠다고 했으니… 길드원들이 반발이 심한 것도 당연한 이야기겠지.'
그럼에도 그의 직감이 이야기했다.
이번 기회를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고.
'우리가 어비스의 상부로 가기 위해선 결국 블러드라는 녀석들과 대항할 수밖에 없어.'
당연한 이야기다.
이미 블러드라는 이들이 탑의 사념을 악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어비스에 올라온 플레이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일.
그들의 수장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이 탑의 본체가 인간의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다느니, 탑의 본체와 계약을 맺은 악마라느니.
진실은 알 수 없지만, 그런 소문이 무성한 데에는 분명히 근거가 있으리라.
'결국 우리의 목적이 탑의 꼭대기에 올라 본체의 머리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결국 블러드와는 언젠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블러드와 적대적인 노선을 확정한 한강민은 결국 우리의 아군이라는 뜻이야.'
비록 한 집단에 속한 건 아니라지만, 같은 적을 두고 있는 이상.
'적의 적은 나의 친구다.'
그게 길드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민과 접촉한 이유였다.
'어쩌면 한강민은 알렉스와 이미 접촉했을지도 몰라.'
템플의 수장인 알렉스.
블러드의 수장만큼이나 비밀에 싸여 있는 인물이다.
블러드에 대적한 모두가 이슬로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건재하게 블러드와 대적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으니까.
'한강민. 저 사람은 이 탑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확실하지.'
꽈악!
레이먼드의 주먹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앙!
드디어 창공의 군주가 벌어진 틈새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말도 안 되게 거대하군.'
건물 하나가 걸어 다니고 있는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크기다.
그뿐인가.
몸을 두르고 있는 갑옷은 그 두께가 상상도 가지 않을 정도였으며.
한 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대검은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산을 쪼갤 것 같은 위용을 뿜어냈다.
'…두렵지도 않은 건가.'
저런 괴물과 마주하고 있는 강민의 기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덩치로만 보면 다윗과 골리앗.
아니, 인간 앞의 개미로 비쳐 보일 지경이건만.
우우우웅!
그 순간에도 강민의 몸에서는 상상할 수 없이 강력한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다. 저것이 정말 나와 같은 플레이어란 말인가? 대체 어떤 싸움을 해 온 거지?'
동시에 레이먼드는 알 수 있었다.
'그저 탑을 오른 것만으로는 절대로 오를 수 없는 경지야.'
아시아의 탑에 난이도에 대한 많은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는 시점이다.
강민의 개척률과 무성한 소문을 근거로 한 추측들.
아시아의 탑에서는 비밀병기를 육성하고 있다.
하나하나가 모두 괴물 같은 이들로 성장했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능히 길드 하나를 파괴할 정도로 강력한 사람들일 것이다.
아시아에서 또 한 사람의 플레이어가 어비스로 넘어오는 순간, 어비스 전체가 크게 흔들릴 것이다.
등등….
레이먼드는 고개를 저었다.
'모두 잘못된 추측들이다.'
지금 눈으로 강민을 보고 있는 자신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를 보기 전까진… 나도 그들의 추측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진실은 이곳에 있다.
'아시아의 플레이어가 강한 게 아니라, 저 한강민이라는 남자가 선을 넘어 버린 거야.'
선을 넘을 정도의 강함.
그 누구도 감히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
'저 남자는… 그야말로 존재 자체로 아시아를 대표할 만한 인간이다.'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 아시아의 설계자의 의도가 번뜩, 하고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군. 과연 그런 거였나.'
꿀꺽
레이먼드가 침을 삼켰다.
'올인이군.'
올인.
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올인하겠다는 설계자의 계략(?)을 레이먼드는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재앙이지 않은가.'
수천, 수만의 플레이어들의 모든 것을 한 사람에게로 압축해서 만들어낸 최종병기.
지금 그 최종병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
강민의 검 위로 백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치솟은 순간.
그 자리에 서 있는 모두의 몸이 얼어붙었다.
감히 숨조차 허락받지 않고는 쉬어서 안 될 것만 같은 위압감 때문이었다.
'빈대처럼… 꼭 붙어야 있어야겠어. 모든 걸 퍼주더라도 말이야.'
그 순간 레이먼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
그으으윽-
창공의 군주가 나를 바라봤다.
장난이 아니다.
놈은 어쩌면 내가 상대했던 그 드래곤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놈의 온몸에서 지독하리만치 풍겨 나오는 저 '사념'을 보고 있자면.
'과연 어비스라는 건가.'
그동안 어비스에서 상대했던 모든 몬스터들에게 느껴지던 사념은, 창공의 군주에 비하자면 어린애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이것 참, 난감하군.'
창공의 궁전에서 새롭게 흡수한 사념의 양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인데.
이 녀석을 처치하고 흡수하게 될 사념을 생각하면, 그 사념들을 언제 또 다 정화해낼 수 있을지 숨이 턱, 막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놔둘 수는 없지.'
이미 완전히 정화된 파편은 오디세우스의 대장장이에게 맡겨 장비의 재료로 사용할 생각이다.
'시간 조금 걸려도 저 정도의 사념을 놓칠 수는 없지.'
그리고 그 순간.
부아아아앙!
창군의 군주가 들고 있는 대검을 움직였다.
공간이 크게 일렁이며 거대한 파공을 일으켰고.
파앗!
나는 몸을 날렸다.
콰아아아앙!
대검이 강하게 바닥을 두드렸고.
출렁!
그 순간 공간 자체가 뒤틀리며 굉장한 압력이 내 전신을 짓눌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크아아아아악!"
피해 반사로 인해 오히려 제 놈이 더 괴로워하며 몸을 뒤틀었으니.
'간을 한 번 볼까.'
나는 놈을 향해 검기의 파동을 쏘아 보냈다.
초승달 모양으로 펼쳐진 검기의 파동이 그 크기를 불리며 창공의 군주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콰쾅!
검기의 파동이 놈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놈의 가슴팍을 보호하고 있던 갑옷이 크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겨우 갑옷을 조금 일그러트린 검기의 파동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 정도로는 아직 부족하다는 건가.'
지금 내 스탯으로 펼쳐내는 검기의 파동이라면 70층에서 상대했던 드래곤도 쉽사리 버텨낼 수는 없었을 텐데.
고작 피 조금 튀어 오르는 정도로 그쳤다는 건, 놈이 그만큼 강하다는 말이겠지.
'해츨링이 그렇게 겁먹은 것도 이해가 가.'
해츨링은 아직 성체가 아니다.
어쩌면 드래곤의 성체보다도 더 강할지 모르는 저 창공의 군주에게 겁을 먹는 게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그으으으!
창공의 군주가 눈을 번뜩이며 날개를 펼쳐냈다.
놈은 몸을 도약하며 엄청난 속도로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덩치가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다.
그와 동시에 놈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지긋지긋한 놈이군.'
나는 급하게 발을 구르며 움직였다.
뇌전검의 속도가 더해져 내 움직임은 믿을 수 없이 빨라졌지만, 그 순간에도 창공의 군주의 시선은 나를 정확하게 따라왔다.
창공의 군주의 날개에서 뻗어 나온 무형의 기운들이 나를 추적하기 시작했으니.
나는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콰콰콰쾅!
허공에서 놈이 만들어낸 기운과 오러가 충돌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그 사이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팟!
나는 도약했다.
연기를 뚫고 순식간에 놈과 가까워졌다.
놈의 발아래에 도달한 나는 놈의 발등에 올라섰으니.
콰직!
놈의 발등을 향해 오러 블레이드를 내리찍었다.
푸하악!
백색 액체가 튀어 올랐다.
나는 바로 검을 뽑지 않았다.
놈의 몸이 격하게 흔들리며 자칫 균형을 잃을 뻔했지만.
'충격파.'
우우우웅!
검이 맹렬하게 진동했다.
충격파의 파동이 갑옷 안으로 파고들며 놈의 발등을 파고 전신을 타고 흘렀다.
콰콰콰쾅!
놈의 갑옷 내에서 폭발이 일었다.
"크아아아아!"
창공의 군주가 괴성을 크게 내질렀고.
타앗!
나는 곧바로 놈의 갑옷을 파고 오르기 시작했다.
파각! 콰아앙! 콰직!
그렇게 타고 오르며 계속해서 놈의 관절, 관절을 향해 검을 내리찍었고, 갑옷을 파괴하며 틈틈이 마력을 쏟아 넣었다.
쩌어어엉!
순간 놈의 몸에서 강렬한 기운과 함께 내 몸이 놈의 몸에서 튕겨 나왔다.
내 몸이 한동안 허공에서 부유하며 허공에 떠 있었다.
잠시 균형을 잃은 나를 향해 창공의 군주의 대검이 움직였다.
'젠장.'
이대로 있다가는 허공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놈의 공격에 당하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지.'
나는 허공에 떠 있는 상태로 오우거의 신체를 사용했다.
오우거의 신체가 사용되며, 내 힘이 증폭됐고.
콰콰콰!
오러 블레이드의 기세가 더 강하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놈의 대검을 받아쳤다.
"크으윽!"
내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오우거의 신체가 더해졌음에도, 워낙 거대한 몸집이라 내 몸을 짓누르는 무게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저 녀석도 무사하진 않았다.
"커어어어…?!"
창공의 군주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온 그 순간.
콰아아아앙!
내 몸은 땅에 내리꽂혔고.
창공의 군주의 몸이 뒤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저놈도 저놈이지만, 나도 괴물은 괴물이야.'
허공에서 받아진 정도로 저 거대한 놈의 균형을 잃게 만드는 괴력이라니.
"끄읍!"
나는 한 번 신음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켰고.
콰아아앙!
궁신탄영을 이용해 기울어지고 있는 놈을 향해 다시 크게 도약했다.
워낙 커다란 몸체라 그런지 기울어지는 데도 한세월이 꼬박 걸릴 지경이다.
콰콰콰콰!
몸을 회전시키며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내는 나는 순식간에 놈의 코앞에 도착했다.
"갈아주마."
그렇게 말하며.
콰콰콰콰콱!
맹렬히 회전하는 오러 블레이드가 놈의 면상을 사정없이 갈아내기 시작했다.
불똥이 튀어 올랐고, 파괴된 안면 보호구의 파편이 허공으로 무수히 튀어 올랐다.
파직! 콰직!
튀어나온 파편들이 내 몸을 스쳐 지나가고, 내 몸 곳곳에 박히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출 수는 없었다.
드디어 놈의 방어구를 뚫고 나온 맨살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흉측하게도 생겼군.'
그렇게 생각하며.
부우우웅!
놈의 면상을 향해 오러 블레이드를 내리꽂았다.
푸하악!
놈의 안면을 깊숙이 파고들어간 오러 블레이드와.
파지지지직!
아직 남아 있는 뇌전검의 전류가 놈의 전신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
창공의 군주가 다시금 괴성을 내지르며 온몸을 격렬하게 뒤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