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상태창이 달라졌다-201화 (201/277)

201화

이제 67층을 돌파했으면, 내 예상보다는 조금 빠른 속도다.

그래도 남은 세 개의 층이 만만하지는 않을 거고.

세 개 층 밖에 남았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세 개라고 해도 꽤 시간이 걸릴 테지.'

그럼에도 잘해주고 있는 위드 길드에 내심 감사를 전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고작 탑 등반 하나만이 아닐 테니까.

'어서 위드 길드에서 올라와 주면 개척률도 더 빠르게 오를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위드 길드가 공략하고, 탑의 다른 플레이어들도 슬슬 어비스로 진입하게 되면, 어비스 전체의 판도는 급격하게 뒤바뀔 테지.

천천히.

그리고 착실히 하나씩 태엽이 움직이고 있다.

***

"오디세우스의 길드장인 레이먼드다."

나를 찾아온 건, 후안과 레이먼드라는 남자였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블러드인지 아닌지 파악했지만.

그는 블러드가 아니었다.

"후안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어."

"재밌었다면 다행이군."

내 말에 레이먼드의 안색이 잠시 어두워졌지만, 그는 이내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 놀라운 사내로군. 그 며칠 새에 벌써 개척률이 진척됐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지?"

레이먼드가 물었다.

"보시다시피. 너와 대화도 나누고 산책도 즐기면서 나름 풍요로운 삶을 즐기는 중이다."

내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달했지만.

"놀랍기도 하지만… 대책도 없는 사내로군."

레이먼드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개척률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설득까지 해가며 납득시킬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 그건 둘째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더 이야기할 게 남았나? 내 제안을 수락한 것으로 이해했는데?"

나는 품안에서 편지를 꺼내 흔들며 말했다.

본론이라니.

아직 더 할 이야기가 남은 건가?

그저 만나서 레이드의 일정만 전해줄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다.

"물론이다. 우리는 너의 조건을 수락할 생각이야. 다만 내가 너를 찾아온 건, 너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내가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지."

"자세가 되어 있군. 응당 한 집단의 리더라면 이런 중대 사안은 스스로 확인하고 결단을 내리는 게 맞지."

레이먼드는 미간을 좁히며 나를 바라봤다.

관심법 같은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지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그래. 어떤가. 네 눈에 보이는 나는 어떤 사람이지?"

"건방지고, 오만하다."

내 물음에 레이먼드가 답했다.

"보는 눈이 있군. 오디세우스의 길드장다워."

"직설적이면서 예의라는 걸 모르는 인간이야."

"부정할 수 없군. 아무래도 사회성이 많이 떨어지다 보니까."

그런 내 말에 레이먼드는 불쾌한 내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흥미롭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드는군."

"……."

옆에서 나와 레이먼드의 대화를 듣고 있는 후안의 표정은 종잡을 수 없이 구겨져 있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데.

"너와 같은 부류의 인간은 재수가 없긴 하지만, 믿을 만한 인간이지. 적어도 뒤통수 칠 일은 없으니까. 내가 먼저 너의 뒤통수를 치지 않는 이상은."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인다.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평가에 대해서 점수를 매겨달라는 것 같았다.

"너는 과연 어비스에서 둘째가는 길드의 수장에 오를 만한 남자군. 이게 내 대답이다."

"으하하하하!"

내 대답에 레이먼드가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좋다. 함께 레이드에 가자. 너라면 나도 즐거운 마음으로 레이드에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요구했던 조건을 전적으로 수락하겠다. 우리 길드에 가입할 필요도, 국적을 변경할 필요도 없어."

레이먼드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맞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도와다오. 우리는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기꺼이 도와주지."

그 이후로 레이먼드는 레이드의 일정에 대해서 간략히 안내했다.

그는 당장 내일 출발하자고 했다.

나를 본 순간 더 이상 번거로운 준비 작업 따위는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말과 함께.

레이먼드.

꽤나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이번에 오디세우스와 협력하게 된다면, 분명히 벌레들이 냄새를 맡고 기어 나오게 될 거야.'

오디세우스는 자칭 어비스 전체에서 3위권 내에 랭크된 길드.

그리고 내 예상대로라면 못해도 10위권.

아니면 5위권 내에 블러드라는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고 있는 길드가 존재할 것이다.

'분명히 견제가 들어올 거야.'

그런 오디세우스와 내가 협력하게 된다면, 분명 블러드 쪽에서는 액션을 취하게 될 것이다.

레이먼드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들을 벌레를 색출해 내는 용도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누가 되었든, 빨리 미끼를 물어 줬으면 좋겠군.'

***

"재밌네."

"어쩔 테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렇게 화끈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는데, 가만히 있으면 다른 것들이 우리를 뭐로 보겠어?"

블러드의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분위기는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했다.

모두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개개인이 결코 범상치 않은 플레이어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특히나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가슴 전체를 가리고 있는 붉은 문신은, 그들이 평범한 블러드의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 중에… 한 명 정도는 꽤 괜찮은 길드를 이끌고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한 플레이어가 입을 열었다.

서로가 서로의 정체는 모르지만, 이 중에서 어비스의 거대 길드를 이끄는 플레이어가 있다는 추측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었다.

그 말을 꺼낸 플레이어 자체도 정체는 감추고 있지만, 어비스 내에서 꽤 입지가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듣기로는 오디세우스에서 그 자에게 접촉했다고 하더군."

"오디세우스가? 걔들도 급하긴 한 모양이야?"

"그렇겠지. 오디세우스의 수장인 레이먼드가 아마 여기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는 '아레스 길드'를 몹시 의식하고 있기로 유명하지 않았던가."

"오호, 그래? 여기에 위대한 아레스의 길드장께서 자리하고 계신 거야? 호호!"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런 추궁은 좋지 않다. 우리가 서로에게 정체를 노출하는 건 위험한 행동이다. 그럼에도 분명 누군가가 나서야 할 만큼 중대한 상황인 것도 분명하다."

"그래. 한강민. 심상치 않은 자야. 벌써 개척률을 20%를 넘어섰고, 우리 집회 장소를 습격하고도 숨기지 않은 채 자신의 일을 노래로 만들어 떠벌리고 있다니."

"정신 나간 놈이 분명하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매번 만날 때마다 가면의 모습이 달라지고, 목소리도 바뀐다.

게다가 온몸을 망토로 두르고 있기에 체형조차 분간할 수 없다.

"어쨌든, 아레스 정도 되는 길드에서 한 번 나서줬으면 좋겠다는 말이지."

"지금 상황에선 아레스가 움직이는 게 그림이 가장 좋은 것도 사실이다. 거대 길드와 거대 길드의 충돌이야 일상 같은 일이니까. 마침 상황도 적절하지 않은가.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려는 경쟁자를 꺾어내는 아래스. 이 정도라면 명분은 충분할 것이다."

"아레스가 아니더라도, 설마 우리 중에서 랭커 길드 소속이 한 명도 없겠어? 그건 말이 안 돼."

"……."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이루어진 대화였지만.

그중 한 사람은 그 대화를 귀 기울여 듣고 있을 것이었다.

"깔끔하네. 오늘 회의는 이걸로 끝나는 건가? 내가 마침 괜찮은 던전을 발견해서 좀 바쁜 몸이라, 이만."

슈웅!

그 말을 남긴 채 플레이어 한 명이 모습을 감췄다.

"저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상판을 보면 내가 꼭 면상을 짓밟아 줄 거야."

"쓸데없는 소리."

그렇게 플레이어들은 하나둘씩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

레이드 날이 다가왔고.

나는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다.

"조촐하군."

그 앞에는 고작해야 다섯 명의 플레이어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레이먼드와 후안, 그리고 다른 세 명의 플레이어.

"네 자신감 넘치는 말을 듣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걱정은 마. 우리 길드에서도 엄선된 정예들로 뽑아왔으니 방해되는 일은 없을 거야."

레이먼드가 말했다.

"걱정한다는 말은 한 적 없다."

그리고 내가 답했고.

"그나저나…."

레이먼드가 몰른과 해츨링을 바라봤다.

그들과 이야기할 때는 나 혼자 갔던지라 레이먼드가 몰른과 해츨링을 보는 건 처음이다.

"동료 없이 혼자 다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군."

"걱정 마라. 웬만한 길드 하나가 와도 괴멸 시킬 수 있는 훌륭한 동료니까. 방해될 일은 없을 거다."

레이먼드의 말을 비슷하게 돌려 대답한 나의 말에.

"…확실히 만만치 않아 보이는군."

레이먼드의 시선이 향한 곳은 해츨링 쪽이었다.

사실 레이먼드나 후안이나 몰른 쪽에는 큰 관심을 주지 않았다.

겉모습으로만 보기에는 몰른을 보고 '전투'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앳되고 순수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몰른과 전투는 꽤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이제 곧 깜짝 놀라게 될 거다.'

몰른의 활 솜씨는 날이 갈수록 발전했다.

이제는 나조차 화들짝 놀랄 정도로 위력적인 활쟁이가 되어 있었으니까.

"다들 준비됐나?"

내가 몰른과 해츨링을 향해 말한 순간.

"저, 저도… 사냥해도 되는 건가요오오…?"

몰른이 말했다.

"물론이지. 마음껏 날뛰어도 좋아. 둘 다 말이야."

"우아아아!"

"꾸우웅!"

오랜만에 날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에 몰른과 해츨링이 잔뜩 들떴다.

'해츨링도 기대 돼.'

이제 완전히 정화된 파편.

내가 구매한 목걸이에 파편을 박아 해츨링의 목에 걸어 놓은 상태였고.

그만큼 해츨링의 마력 역시도 증폭되어 있을 게 분명하다.

'아마 나는 움직일 필요도 없을지 모르겠어.'

저 안에 있는 몬스터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강해봐야 지금의 몰른과 해츨링 선에서 충분히 정리될 수 있을 거다.

내가 조금 전 했던.

각자가 웬만한 길드 따위는 괴멸시킬 수 있다는 그 말은 결코 허세가 아니었으니까.

"그럼, 가지."

"좋아."

우리는 던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우웅!

게이트를 통과한 순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

[어비스 던전, 창공의 궁전에 입장했습니다.]

[클리어 조건 : 창공의 군주를 처치하라.]

[보상 : ???]

던전에 대한 안내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새로운 지형을 발견했습니다.]

[새로운 몬스터를 발견했습니다.]

[새로운 식물을 발견했습니다.]

.

.

.

[개척률이 미친 듯이 치솟기 시작합니다.]

당연한 행사다.

던전에 입장함과 동시에 개척률이 마구 치솟았고.

어느새 개척률은 23%를 훌쩍 넘어섰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거대한 성전 안에 서 있었다.

"긴장하는 게 좋을 거야. 창공의 궁전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끔찍한 만큼 강하다."

입장한 순간, 레이먼드가 말했다.

"특이사항은?"

"모두가 비행 몬스터지. 그리고 속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빨라. 웬만한 속도로는 몬스터 한 마리조차 제대로 사냥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클리어에 애를 먹었던 건가?"

"그래."

아무래도 플레이어들 중, 마법을 사용하거나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는 플레이어는 많지 않다.

그나마 서양 쪽에서는 총기류를 사용하는 플레이어의 수가 많은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근접 무기가 주를 이루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다수의 플레이어가 근접 무기를 주무기로 사용하는 상황에서.

창공의 궁전이라는 던전은 확실히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을 테지.

'하지만 오히려 잘 됐어.'

몰른의 활과 해츨링의 마법이라면 그런 것 따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여차하면 내가 검기의 파동을 날려주면 그만이지.'

그리고 그때.

'오고 있군.'

초감각의 범위 내에 몬스터들이 접근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자, 준비해라."

내가 몰른과 해츨링에게 말한 순간.

끼기긱-

몰른은 벌써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펫 '몰른'에게 플레이어 '한강민'의 스탯의 일부가 적용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파아아앙!

몰른이 활시위를 놓았다.

고작 활이 내는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파공성과 함께.

콰콰콰콰콰!

마력이 감싸고 있는 화살이 저 먼 곳 어딘가를 향해 날아들며 순식간에 시야에서 벗어났으니.

콰아아앙!

한 순간 굉음이 울려 퍼졌다.

"……?"

"뭐, 뭐…."

뒤쪽에서 들려오는 경악에 찬 탄식 소리는 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