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블러드는 아니다.'
블러드를 구분해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니 나를 찾아온 이 남자는 블러드의 플레이어가 아니다.
'그러면 남은 가능성은.'
어비스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어.
그리고 나를 찾아왔다면, 분명 거대 길드 소속이거나, 랭커이거나.
"무슨 대화를?"
내가 물었다.
우선 나를 찾아온 목적을 파악할 생각이다.
그는 주변을 살피더니 내 맞은편에 앉았다.
"오디세우스 길드의 레이드 전담팀의 팀장인 후안이라고합니다. 미대륙의 플레이어고, 국적은 멕시코죠."
"그런가. 한강민이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죠."
"그래. 그러면 서론은 빨리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가 줬으면 고맙겠어."
"당신과 손을 잡고 싶습니다. 우리 오디세우스 길드는 현재 어비스 내에서 2위, 3위를 오가는 거대한 길드입니다. 미대륙의 플레이어로 이루어진 길드로서 현재 미대륙의 개척률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길드이죠."
나와 손을 잡고 싶다는 후안의 말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운 반응은 아니다.
나를 찾아왔다는 건, 나와 싸우거나 손을 잡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하지만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나와 손을 잡아서 너희가 얻을 이득은?"
그렇지 않은가.
어차피 내 활동과 저들의 개척률 달성에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다.
차라리 나를 제거하러 왔으면 납득을 하겠지만, 협력을 요한다는 부분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역시. 정말 어비스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가 봅니다."
"그런 편이다."
인정했다.
사실이니까.
모르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이 어비스의 구조는 알고 계십니까?"
"원형의 대륙과 중앙의 섬. 틀렸나?"
"맞습니다. 그 개척률이라는 게 바로 중앙의 섬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죠."
이미 템플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어비스의 상부로 진입할 수 있는 인원은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을요."
"물론이다."
이것은 설계자에게 들었던 이야기.
"덕분에 어비스에서 길드라는 집단이 생겨난 것입니다. 같은 대륙의 길드들은 개척률을 위해서는 협력하지만, 어쩔 수 없이 경쟁해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길드의 목적은 어비스의 상부로 진입하는 것. 요컨대 같은 대륙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한정된 상부의 인원 제한 덕에 대륙 내에서도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재미있군. 그러니까 개척률을 달성하면서 너희 길드의 힘을 키우며 상부로 진입할 힘을 기르기 위해서 동시에 같은 대륙의 타 길드들과 경쟁하고 있다는 말인가?"
"정확합니다."
후안 덕에 어비스의 생리에 대해서 한층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꽤나 복잡한 곳이다.
템플과 블러드의 갈등.
그리고 대륙 단위로 나뉘어 있어 각 대륙간 플레이어들간에 치열한 경쟁심을 불태우는 개척률이라는 시스템.
더 나아가 같은 대륙에서도 최종적으로는 서로 더 강한 힘을 끌어모으기 위해 경쟁하는 길드들까지.
'정말 탑과 조금도 다르지 않군.'
무한 경쟁.
서로 밟고 올라서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오로지 경쟁만을 위한 시스템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들을 순간, 후안이 나를 찾아온 목적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너희를 도와주면, 너희가 나에게 선의를 베풀어 함께 어비스의 상부로 데려가 주겠다… 뭐 이런 제안이라도 하려는 건가?"
"……!"
내 말에 후안이 눈을 부릅떴다.
내가 정확히 찌른 것 같은데.
쉽게 말하자면 이거다.
나는 혼자고, 혼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자신들이 가진 '집단'의 힘을 빌려주겠다는 것.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혼자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이 어비스도 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국적을 변경할 수 있죠. 물론 당신이 획득한 개척률은 모두 사라지겠지만요."
"그렇군. 귀화를 제안하는 건가?"
"말하자면 그런 셈입니다."
"마치 내가 당연히 너의 제안에 응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오디세우스는 어비스 전체를 놓고 봐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길드입니다. 당신이 가세하면 당연히 1위 길드를 넘어설 수 있을 거고요."
대단한 자신감이다.
자신이 속한 길드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발언.
"내가 1위 길드로 갈 거라는 가능성은 배제한 건가?"
"그들은 극단적인 인종주의자들이죠. 백인이 아니라면 절대 그 길드에 속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당신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건, 이미 당신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고요."
마치 나에게 자비라도 베풀어주겠다는 양 떠들어대는 후안의 태도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리고 하나 더."
후안이 눈을 번뜩였다.
드디어 숨겨놓은 카드를 꺼내려는 모양이다.
"이번에 우리가 발견한 대형 던전이 있습니다. 그 안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티팩트와 장비들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겁니다. 만약 당신이 우리 손을 잡는다면… 당신에게 함께 레이드에 참여할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힘이 조금 달리는 모양이군."
"……!"
내 말에 흠칫 놀라는 후안.
그는 최대한 놀란 기색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내 눈초리를 피해갈 순 없었다.
"그럴 리가요. 말씀드렸듯, 우리는 어비스 전체를 놓고 봐도…."
"그러면 너희들이 그 던전을 차지해라. 그렇게 훌륭한 던전인데 굳이 나를 포섭할 필요가 있겠어? 그것을 너희가 온전히 독차지하면 곧 1위 길드를 넘어설 수도 있을 것 아닌가."
"하아…."
후안이 짧은 한숨을 쏟아냈다.
"내가 어떤 놈인지도 모르는데 나를 포섭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렇지 않나? 막말로 내가 그 던전을 클리어하고 다른 길드로 달아나면 어쩔 테지? 그 정도로 나를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그를 쏘아붙였다.
내가 이렇게 당당한 데에는 당연히 근거가 있다.
'이들은 내가 필요하다.'
정확히 말하면 내 실력이 필요하겠지.
내 말대로 이들은 던전 레이드에 차질이 생겼을 테고, 마침 '혼자서' 활동하는 나라는 강자의 등장에 침을 흘리며 욕심내고 있는 것이다.
'잘 걸렸어. 역으로 이용할 수 있겠어.'
톡톡
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내가 제안을 하지."
"……?"
"그 던전. 내가 클리어 해주마. 하지만 너희 길드에 속할 생각도, 국적을 변경할 생각도 없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싫으면 너희들끼리 해라. 난 아쉬울 게 없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나는 혼자서 20%가 넘는 개척률을 돌파했다는 걸 말이다."
"이봐요. 개척률을 빠르게 올린다고 해서 어비스 상부에 혼자 진입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렇지.
단순히 개척률을 올리는 것과 어비스의 상부에 진입해서 살아남는 건 별개의 일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물론이다."
"뭐, 뭐요…?"
"혼자서 어비스 상부로 진입할 생각이다. 그래야 한다면 말이지. 그리고 그 위로도 마찬가지다. 혼자서 해야 한다면 혼자서 하면 그만이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앞으로라고 해도 못 할 것은 없을 거다."
"하… 참…."
후안이 탄식을 쏟아냈고.
"잘 생각해보고 다시 연락해라. 그 던전에서 나온 아티팩트와 장비의 선점권을 내게 넘겨만 준다면 기꺼이 던전을 클리어 해 줄 테니까."
"자, 잠시… 잠시만…!"
내 뒤로 다급히 소리치는 후안을 뒤로한 채, 나는 걸음을 옮겼다.
'대어가 낚였군.'
그렇지 않아도 개척률만 증가시키느라 심심한 일상이었는데.
새로운 활력소를 얻어낸 기분이다.
***
[렘 : 20.4542]
어느새 렘의 수치가 20을 넘었다.
슬슬 렘의 증가 속도도 가속이 붙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파편을 정화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벌써 사념을 거의 다 정화했어.'
열 배 이상 증폭된 사념의 기운을 그사이에 거의 다 정화했으니, 렘의 기운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정화되고 있는 사념의 파편 조각]
>등급 : 근원
>효과 : 완전히 정화된 사념의 기운은 장비 혹은 능력의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다.
>사용 방법 : 완전히 정화된 파편을 이용해 무기를 제련하거나 장신구로 만들어 사용할 수 있다.
드디어 파편의 정보를 완전히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심지어 사용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이거 슬슬 다시 해밀턴을 만나봐야겠는데.'
동시에 나는 해츨링이 들고 있는 파편조각도 같이 확인했다.
'해츨링이 가진 파편도 완전히 정화되었어.'
내가 가지고 있는 파편에 비해서는 한참이나 미약한 기운을 보유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있는 무순은 아니었고.
'그러면 해츨링의 마법도 증폭시킬 수 있다는 뜻이겠지.'
그렇지 않아도 막강한 마법을 보유한 해츨링인데.
사념의 파편이 더해져서 그 위력이 더 강해진다면,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감히 예상도 되지 않는다.
'해츨링의 성장 속도가 꽤 느렸는데. 잘 됐어.'
아직 직접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이제 곧 그 위력을 곧 체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후안이 떠나간 지 이제 이틀이 지났나.'
지난 이틀 동안 오디세우스나 후안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도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결국 놈들은 나를 찾게 될 테니까.
'1위 길드를 꽤나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몇 번이나 반복해서 자신들이 두세 번째로 강하다는 말을 언급했고.
동시에 몇 번이나 1위 길드를 언급했다.
심지어 1위 길드가 극단적인 인종주의자라는 말까지 첨부해 그들을 까내리면서 말이다.
그 말은, 그만큼 그들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도 아직 던전을 남겨놨다는 건, 그들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거지.'
그런 마당에 내가 조급해 할 필요가 있겠는가.
없다.
나는 그저 이렇게 누워서 천천히 개척률을 증가시키고 그들이 나를 다시 찾아와 제발 던전을 클리어해달라고 빌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저도 어서 활을 쏘고 싶어요오오오!"
몰른도 몸이 근질근질한지 벌써부터 몇 번이나 저렇게 졸라대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마음껏 날뛸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똑똑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리고.
"누군가 편지를 주고 갔습니다."
여관의 종업원이 내게 편지 하나를 건넸다.
오디세우스 길드의 인장이 찍혀 있는 편지였다.
'그럼 그렇지.'
나는 편지 내용을 읽어가며 미소 지었다.
내 요청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였다.
다만 추가 조건도 붙였다.
반드시 오디세우스의 길드장이 동행하게 될 것이며, 마지막 보상 확인 역시 길드장과 함께 해야만 한다는 내용.
'문제될 건 없겠지.'
누가 오든, 내가 원하는 건 결국 내가 가지게 될 테니까.
'시간은 내일이고, 장소는… 처음 만났던 그곳이군.'
약속 시간과 장소를 확인한 나는 편지를 접어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박명철 : 현재 67층 돌파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곧 올라가서 힘을 보태 드릴 테니까요.]
오랜만에 반가운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