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어비스는 알면 알수록 놀라운 곳이야.'
나는 파편 조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템플의 플레이어들을 만나고 가장 크게 놀란 것 중 하나는.
'그들도 파편의 힘을 이용하고 있었다는 것.'
바로 그거다.
블러드가 사념을 이용해 힘을 증폭시키는 것처럼, 템플 역시도 사념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힘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물론 사념의 힘을 온전히 이용하는 건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블러드와 마찬가지로 사념의 힘을 이용했으면, 결국 블러드와 다름 없는 집단이 되어 버렸을 테니까.
'대단한 건, 그들은 나름대로 사념의 힘을 정화하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거지.'
듣기로 어비스에서도 꽤나 널리 알려진 방법이라고 했다.
탑에 비해 사념이 짙게 깔려있는 어비스인 만큼, 몬스터를 사냥하며 사념의 파편을 구하는 게 어렵지 않은 어비스.
덕분에 사념을 정화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개발되고 연구되어 왔다고 했다.
'물론 그 힘을 온전히 지키는 데에는 사념을 그대로 이용하는 게 최고기는 하지만.'
결국 사념의 힘에 맛을 들이면, 저도 모르게 온전한 사념의 힘을 욕심내게 된다고 했다.
그렇게 스스로 블러드를 찾아가는 플레이어들도 꽤 많다고 했으니까.
'위드 길드에게도 꽤 도움이 되겠어.'
나는 템플의 알렉스로부터 사념을 정화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전해 받았고.
그 방법을 통한다면 위드의 플레이어들도 어비스에서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봐야 렘을 통해 정화하는 속도에는 못 미치지만.'
템플의 방식대로라면 파편을 정화하는 데 한 달, 혹은 두 달의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렘을 통해 파편을 거의 다 정화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2주 남짓.
해츨링이 파편을 정화하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인 걸 생각해 보면.
렘이라는 기운이 얼마나 정순하고 동시에 강력한 힘인지.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우우웅!
지금 이 순간에도 렘은 내 몸 안으로 쌓이고 있었고.
쌓인 렘은 파편을 정화하고 있었다.
'이 힘을 오러와 융합할 수는 없을까.'
난 내 몸속에서 느껴지는 렘을 느끼며 생각했다.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해진다면, 오러 블레이드의 위력은 다시 한번 새로운 경지로 도약할 수 있을 텐데.
'융합하는 게 쉽지는 않아.'
가장 큰 문제는 아직 렘의 수치가 너무 낮다는 것.
마력을 이용한 오러 블레이드에 비해 렘의 수치가 한없이 부족해 융합하는 게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그리고 두 번째.
'둘 다 비슷해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상극인 기운이야.'
이전에도 말했지만, 렘은 살생을 위한 힘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살생을 거부하는 힘.
파괴를 위한 오러 블레이드와는 본질적으로 극과 극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지.'
이런 대단한 힘이 내 손에 넘어온 이상, 어떻게 해서든 활용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말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다시 제이미로부터 건네받은 문서를 살피며 미소 지었다.
'이곳으로 가면 좋겠어.'
지금 내가 있는 대도시, 라테임과 가장 가까운 곳에 놓여 있는 블러드들의 본거지.
'저곳을 쑥대밭으로 만들면 선전포고로서는 나쁘지 않겠군.'
내 첫 번째 목적지를 정한 순간,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만 같았다.
'재미있겠어.'
***
"아직 소식은 없나? 출발한 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글쎄. 그러고 보니 그렇군."
한 무리의 블러드 플레이어들이 아시아 대륙으로 떠난 플레이어들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이 정도 시간이 지나고서도 아직 소식이 없다는 건… 죽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지. 아니면 변심한 채 떠나간 게 아니라면 말이지."
"흐음…."
그들은 서로 음성을 변조하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블러드의 말단이라면 모르겠지만, 위치가 중간을 넘어선 순간 서로에게도 서로의 존재를 결코 노출시키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까지 블러드가 그 집단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기도 했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
"나도 동감이다. 벌써 개척률이 10%가 넘었어. 아무래도 아시아에서 넘어온 그 플레이어의 실력이 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모양이다."
"하지만 개척률을 꼭 실력으로 연관 지을 수는 없지 않은가."
"……."
그 말이 사실이다.
물론 실력이 뛰어날 경우 개척률을 빠르게 달성하는 게 유리한 건 사실이지만.
혹시 탐지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경우 개척률을 진척시키는 게 비교적 유리하다는 게 현재 어비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의 정론이었다.
"만약 아시아의 플레이어가 전투보다 탐지에 특화된 플레이어라면… 딱히 걱정할 일은 없는 것 아닌가? 단순히 탐지능력 하나라면 우리가 두려워할 이유는 없을 텐데."
"그건 말이 안 돼. 아직까지 아시아에서 플레이어들이 넘어오지 않았다는 건, 탑의 난이도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그런 탑을 헤쳐 올라온 플레이어의 전투 능력이 떨어질 수가 없지 않겠나."
"그러면… 전투와 탐지 모두 극상의 수준을 보유한 플레이어라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
현재 어비스에서 새롭게 등장한 아시아 플레이어는 뜨거운 감자였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남긴 믿을 수 없는 개척률의 증가 속도 때문이었다.
혼자서 타대륙을 압도할 정도로 속도를 보이고 있으니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대로 놔둬서는 안 돼."
"맞는 말이다. 아직 위쪽에서는 침묵하고 있지만, 저 위쪽에서 먼저 움직이게 되면 일이 복잡하게 되어 버릴 거다."
"그렇겠지."
"그런데 무슨 수로?"
"흐음…."
그들 중 한 사람이 턱을 쓰다듬었다.
"내가 직접 만나보겠다."
"……."
블러드의 수뇌부는 아니지만, 수뇌부와 말단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그들의 위치는.
블러드에서도 꽤 중요한 위치라고 할 수 있었다.
어느 집단에서나 그렇듯, 중간에 위치한 실무진들은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중요 인력이었으니까.
"걱정마라. 나 혼자 공을 독차지할 생각 따위는 없으니까."
"그런 소리가 아닌 것 알지 않느냐. 혹시라도 네가 그에게 사로잡히게 된다면, 그 이후로 벌어질 일들을 감당할 수 없어."
"내가 그럴 위인으로 보이나? 나는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붙잡힌 적 없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지?"
남은 플레이어들 역시 딱히 이렇다 할 방도는 없었으니.
"조심해라."
"절대 실수는 하면 안 돼."
"전면전은 무조건적으로 피해야 할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은."
그렇게 모여 있던 플레이어들이 한순간에 모습을 감췄다.
***
"한번 해 봐."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숲에 진입했다.
다음 목적지로 가기 전, 이 숲에서 잠시 몰른에게 활을 지도해 줄 생각이었다.
거리가 그리 멀지도 않았고, 이미 몰른에게 약속하기도 했으니 잠시 시간을 쓰는 것 정도는 큰 무리가 아닐 테지.
몰른은 지난밤 내가 적어준 기본자세를 몇 번이나 반박해서 읽었다.
그림과 함께 양피지에 적어준 교본이었는데.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내가 그림 실력도 나쁘지 않은 덕분에 내가 봐도 꽤 훌륭한 교본이 완성되었다.
"예엡!"
몰른은 활을 들고 기본자세를 취했다.
"호…."
그런데 예상외로 몰른의 자세가 꽤나 안정적이었다.
내가 만들어 준 교본이 괜찮기도 했겠지만, 내 생각 이상으로 몰른의 이해력이 뛰어난 모양이다.
그렇게 몰른은 천천히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고.
끼기긱-
연습용 활의 시위가 팽팽하게 긴장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화살을 끼워 넣은 건 아니라지만, 몰른의 자세는 내 생각 이상으로 훌륭했다.
그렇게.
투웅!
"후아…!"
활시위를 놓은 몰른이 숨을 크게 내쉬며 나를 바라봤다.
"어땠어요오…?"
"…정말… 처음이 맞나?"
"예에. 당연하죠!"
처음이라기엔 너무도 깔끔한 자세다.
게다가 몰른의 근력 역시도 잘 붙어 있었는지 활시위를 당기는 데에도 힘겨워 보이지 않았다.
보통 활을 당기는 데에는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처음 활을 잡는다면, 화살을 날리기는커녕 당기는 것만으로도 녹초가 되기 일쑤니까.
한 달 동안은 활시위를 당기는 훈련만 시킬 생각이었는데.
이미 이 정도로 완벽한 기본자세를 완성해 놓은 이상, 그런 훈련은 큰 의미가 없다.
'이거… 재능이….'
이런 재능을 몰라보고 있었다니.
하마터면 몰른을 평생 악기 연주만 시킬 뻔하지 않았는가.
"화살을 시위에 걸어 봐."
내가 말하자 몰른의 표정이 밝아졌다.
"알겠어요오오!"
몰른은 금세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역시 화살을 거는 모습도 능숙해 보였다.
저것역시도 교본에 적어준 내용이었지만, 눈으로 보는 것과 직접 하는 게 크게 다르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확실히 몰른은 재능이 있다.
그것만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지.'
자세 정도야 내가 안 보는 곳에서 미리 연습했을 수도 있다.
'진짜 중요한 건, 명중시킬 수 있느냐는 것.'
아무리 자세가 뛰어나다고 한들, 결국 활은 누군가를 맞추기 위한 무기.
결국 명중시킬 수 없다면 활을 드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저기 보이는 나무를 맞춰 봐라."
나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그나마 가장 맞추기 쉬운 나무다.
거리는 대략 10m가 떨어져 있었고, 시야가 탁 트여 있었으니 연습용으로는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나는 마력을 움직여 나무 한가운데에 X표시를 그렸다.
"저 X를 맞추면 되는 거다."
물론 첫 번의 시도만으로 표적을 정확하게 맞히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가능하다면… 나로서는 조금 슬플 것 같거든.
"알겠습니다아아아…."
몰른은 천천히 숨을 조절하며 다시 활시위를 당겼고.
꽈아악!
활시위가 끝까지 당겨졌을 때.
"흡."
몰른은 잠시 호흡을 정지했다.
몰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가 싶더니.
패애애앵!
활시위를 놓음과 동시에 화살이 맹렬한 기세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내심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X의 근처라도 간다면, 그건 성공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정말 나무에 화살을 박아 넣을 수만 있더라도 반 이상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으리라.
그렇게 화살이 나무에 다가간 순간.
퍼억!
"어, 어어어…?!"
"꾸, 꾸우우웅…!!"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말이 되는가.
몰른의 화살은 정확히 나무를 꿰뚫은 박혀 들어갔고.
"며, 명중… 명중했어요오오오!"
내가 그려 놓은 X자 한가운데에 가서 처박힌 것이다.
우연?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이건 우연이 아니야.'
그만큼 몰른의 자세는 완벽했고.
호흡을 멈추며 표적을 조준하며 시위를 놓은 그 타이밍도 완벽했으니까.
저건 분명히 몰른의 실력이었고.
결국 몰른의 재능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놀라운 건, 그게 다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펫 '몰른'이 각성했습니다.]
[펫 '몰른'의 상태창에 새로운 능력이 추가됩니다.]
몰른의 각성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