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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창이 달라졌다-196화 (196/277)

196화

"흠, 흠…."

알렉스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첫 번째는…."

"첫 번째? 그렇다면 조건이 여러 개가 있다는 뜻인가?"

"흡…."

내 말에 정곡이 찔렸는지 알렉스가 시선을 피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어렵게 얻어낸 정보입니다. 우리의 목숨을 걸고서 얻어낸…."

"그냥 물어본 거다. 계속 말해라."

"하하…."

리액션이 괜찮아 놀려주는 맛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첫 번째는… 만약 당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당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도 우리는 당신의 편을 들지 않겠다는 겁니다."

"선을 긋겠다는 거군."

"예."

이런 조건이라면 오히려 내 쪽에서 환영이다.

"좋다. 나도 굳이 너희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도, 물귀신처럼 붙잡고 늘어질 생각도 없다. 그쪽이 깔끔하겠어. 그 다음은?"

알렉스의 눈이 번뜩였다.

아무래도 여기부터가 본론인 모양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와 아이템, 혹은 아티팩트들은 저희와 나눠 주셔야 합니다."

"호…."

이건 조금 용기 있는 발언이었다.

"그들은 이 어비스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입니다. 그들이 모아 놓은 정보들과 아이템, 아티팩트는 어비스의 최상위 랭커들도 탐낼 정도로 훌륭한 것들이 많죠. 그들도 그것을 미끼로 랭커들을 포섭하고 있고요."

"결국 너희도 그게 탐난다는 건가?"

"…당연하죠. 저희도 플레이어이며, 그들과 싸우기 위해선 더 좋은 장비와 아티팩트는 필수니까요."

충분히 납득할 만한 조건이다.

그리고 저들의 입장도 이해가 되고.

그동안 블러드라는 단체와 싸우면서 이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을 테니까 말이다.

"좋다. 다만 우선 선택권은 내가 가져도 되겠지?"

이 정도 조건이라면 충분히 응해줄 수 있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나 역시 아무런 대가 없이 무언가를 받을 생각은 없다.

특히나 알렉스가 강조했던 그대로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얻어낸 정보라면.

저들도 충분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만약 나 혼자서 모든 걸 욕심낸다면 결국 이들도 나를 돌아서게 될 테지.'

그렇다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꼴이 될 것이다.

앞으로 이들과는 꾸준하게 협력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 어비스에 대해서 나보다 많은 것들을 알고 있으며 동시에 내 잡무를 처리해 줄 수 있을 녀석들이니까.

고작 아이템이나 아티팩트에 눈이 멀어 이들을 완전히 손절할 수는 없다.

"예.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이미 때도 느낀 거지만, 템플과 나는 꽤 대화가 잘 통하는 것 같아. 그렇지 않은가."

"하하. 그렇군요."

알렉스가 쓰게 웃었다.

제이미와 대화했을 때에도 이런 말을 했던것 같은데.

제이미의 반응도 그대로였고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말을 이으려던 찰나.

"……."

나는 그를 노려봤다.

이 정도면 됐지 또 뭐를 얻으려는 생각인 건가.

그렇게 내 시선을 마주한 순간.

"하하하…. 아, 아닙니다. 저 두 개만으로도 충분하죠. 무엇보다 우리의 힘으로는 벅찼던 일을 대신해주시겠다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머쓱한 웃음을 터트리는 알렉스.

"그래. 거기까지만 해 두지. 괜히 서로 욕심내다가는 탈이 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지?"

"그, 그렇죠."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무언가 아쉬움이 남아 보였지만,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저들 역시 내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일 테니.

서로의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합의를 보는 편이 최선이라는 건 알렉스도 잘 알고 있으리라.

"좋아. 이걸로 우리의 거래는 성사가 됐다."

나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눈을 번뜩였다.

"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렇게 알렉스는 잠시 몸을 일으켜 어디론가 벗어났다.

그리고 이 공간에는 나와 몰른, 해츨링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나는 몰른을 바라봤다.

벌써 며칠째 꿍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몰른.

'대체 저 녀석은 왜 저러는 거야?'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맥주조차 마시지 않은 채 손에 류트를 들고 심각한 얼굴로 애꿎은 류트 줄만 뜯어대고 있었으니까.

"몰른."

내가 몰른을 부르며 그를 바라봤다.

"……."

대답이 없다.

"앉아라."

나는 다시 한번 내 옆에 있는 의자를 꺼내며 말했다.

풀썩

말없이 의자에 앉은 몰른.

"무슨 일이냐. 말해라."

"뭐가요오…."

"요새 계속 말없이 꿍해 있는 것 말이다."

"……."

몰른은 입을 꾸물댔지만,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몰른. 네가 나를 신뢰한다면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그렇게 침울하게 있는 걸 원치 않아."

"주인니임…"

몰른이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제가 너무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아…."

"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몰른의 버프가 얼마나 전투에 있어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지는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는데.

"해츨링은… 강하잖아요오…. 해츨링의 마법은 그렇게나 강력한데… 저는 딱히 싸우는 법도 모르고… 할 줄 아는 거라곤… 연주밖에는 없는데…."

"하…."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몰른이 대체 왜 저러고 있는지 말이다.

'그때부터였나.'

해츨링이 아이든의 협곡을 쓸어버리고 나서부터.

생각해 보니 그랬다.

몰른이 슬슬 말이 줄어들기 시작한 시점이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았다.

"꾸우웅…."

오히려 해츨링이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른 채 몸을 배배 꼬았다.

"미안…."

몰른은 해츨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연히 몰른도 악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내게 더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축 쳐져 있던 거겠지.

그런 몰른의 마음을 이해 못 할 리가 없다.

"이리 와라, 몰른."

나는 몰른에게 말했다.

그리고 몰른은 의자를 끌고 내게 조금 가까이 다가왔다.

"난 너의 존재에 크게 감사하고 있다. 네가 없었으면 내가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 몇 배는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거짓마알… 주인님은 제가 본 사람 중에 제일 강해요오…. 저 없었어도 주인님은 아무렇지도 않았을 거예요오…."

하지만 진심이다.

표현을 못 했을 뿐 나 역시 감정적으로 몰른에게 의지를 했던 것도 사실이고.

물론 지금이야 스킬의 쿨타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지만.

초반에만 하더라도 몰른의 버프들이 내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지.'

나는 몰른을 바라봤다.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내가 가르쳐주마."

"예, 예?"

"너에게도 싸울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말이다."

"저, 정말… 정말요오?"

"그래. 검, 창, 활, 주먹. 뭐든 상관없다. 네가 원하는 거라면."

지금은 검을 쓰지만, 내가 다루지 못하는 무기는 없다.

전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무기를 다뤘던 나였으니까.

당연히 검을 가장 잘 다루지만, 다른 무기들도 충분히 누군가를 가르칠 수준은 차고도 넘친다고 자신할 수 있다.

"잘 생각해 보고 말해줘라. 네가 무슨 무기를 다루고 싶은지. 시간은 조금 걸릴 테지만, 네가 그걸 원한다면 나도 충분히 시간을 쓸 용의가 있어. 그만큼 너는 내게 중요한 사람이니까."

"주, 주인니이이임…!"

그제야 몰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 몰른을 보며 해츨링의 표정도 덩달아 밝아졌으니.

"저는… 활. 활을 배우고 싶어요오오!"

몰른이 신나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활이라.

꽤 어려운 무기를 선택했다.

검조차도 다루기 쉬운 무기가 아닌데, 심지어 활이라니.

그래도 뭐.

몰른이 원한다면 가르쳐 주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런데 그때.

끼익!

문이 열렸고.

"흐흐흐…."

문 앞에서 한 여자가 웃고 있었다.

제이미였다.

"역시 너는 정이 많은 사람이야."

"…조용히 해라."

"흐흣."

그렇게 웃으며 제이미는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고.

툭!

두꺼운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우리가 그동안 목숨을 걸고 모아 온 정보들이야. 내 지분도 한 5%는 될 테니까 나에게 감사하라고."

그 안에 적혀 있는 것들은 현재 블러드의 신원 정보와 그들의 본거지들.

어비스 전역에 걸쳐 널리 퍼져있는 무수한 정보들이었다.

"대단하군."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래. 네가 우리를 무시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살아왔다고. 블러드라는 녀석들에게 저항하기 위해서 말이야."

"무시한 적 없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제이미는 슬그머니 내 앞쪽으로 와서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정말로 무작정 쳐들어가서 놈들을 공격할 생각이야?"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제이미가 슬그머니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무모한 거 아니야?"

"그게 내 계획이다."

"허, 참…."

"이걸 보니 너희도 블러드의 수뇌부는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

"…슬프게도 그게 현실이야. 블러드 내부에서조차. 아니, 심지어 랭컫들조차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게 바로 블러드라는 조직이니까."

"그렇기 때문이다."

"응?"

"놈들이 제 발로 기어 나오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밑바닥부터 모조리 때려 부숴야 하지 않겠나."

"허…!"

그렇다.

그게 바로 나의 계획.

이제는 검술 명가나 마법 명가를 때려 부쉈을 때와 같이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굳이 애써서 내 정체를 숨길 필요도, 은밀하게 움직이며 조심스럽게 그들을 공격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놈들이 제 발로 내 앞으로 기어나오도록 만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놈들을 찾을 방법도 없는 것 아닌가."

"그래. 네 말이 맞아. 틀린 말을 안 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거야?"

조금은 비꼬는 듯한 말이지만, 제이미의 말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이렇게 쉬운 일이었으면… 우리가 그렇게 고생했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참 나…."

"강하면 모든 일이 해결되지만, 나만큼 강해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재수 없기는."

"현실이다."

"인간미 없는 놈."

더 이상 긴말을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제이미가 건넨 서류를 집어 들고는 몸을 일으켰다.

"곧 다시 보지."

"그래."

나와 제에미, 그리고 알렉스는 짧은 인사를 나누고 곧 템플의 지부를 벗어났다.

그리고 내가 향한 곳은 도시 내에 있는 여관이었다.

지금 곧바로 움직일 생각은 없다.

이렇게 방대한 자료를 손에 넣은 이상 천천히 살펴보며 앞으로 나의 동선과 계획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리고 몰른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도 조금 고민을 해봐야 할 테고.

벌써부터 몰른은 내가 준 돈으로 연습용 활을 하나 들고 와서 어린아이 같은 눈으로 활을 어루만지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해야 할 일이 많군.'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다시금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역시 나는 가만히 누워서 신선놀음하는 건 어울리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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