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아니, 저기…."
제이미는 강민을 설득하는 데에는 포기했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블러드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만만한 이들이 아니야."
"그렇겠지."
"하, 정말…."
"걱정은 마라. 내 몸은 내가 챙긴다. 그 부분은 네가 신경쓸 부분이 아니야."
제이미가 고개를 저었다.
반박할 수도 없었다.
직접 블러드를 만났고, 혼자서 처치했다는데 거기에 더 무슨 말을 할까.
'이렇게 되면… 꽝인데.'
블러드의 위험성을 알리고 자신들에게 포섭하는 게 그녀의 목적이었건만.
강민이 블러드에 대해서 일말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면.
다른 수를 꺼내야만 했다.
그때였다.
"이해한다. 내 말을 받아들일 수 없겠지, 나도 조금은 막무가내로 나갔던 것은 사과하겠다."
"음…?"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지금까지 제멋대로 떠들어 놓고 갑자기 사과를 한다니?
"갑자기 사과라니…. 조금 뜬금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게 내가 대화를 풀어가는 방식이다. 내 의견을 던졌으니 이제 결정은 네 차례다."
"…대책없군."
"그런 편이지. 어떤가 더 대화해 볼 여지가 있나? 내 말을 듣고서 아직도 나에 대한 흥미가 남아 있냐는 뜻이다."
어쩌겠는가.
"후…. 그래. 말해 봐. 들어나 보자고."
그제야 강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런 표정을 보며 왠지 당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제이미.
"당연히 믿을 수 없겠지만, 미쳤다 생각하고 나를 한 번 믿어 봤으면 좋겠군."
벅벅
제이미는 머리를 긁었다.
아직도 헷갈린다.
그럼에도 이제야 무언가 대화가 통하기 시작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막말로 내가 어떻게 하면 증명할 수 있겠나. 여기에서 너와 싸울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지."
"그건… 그렇지."
스타팅 포인트에서 행패를 부렸다간, 어비스의 저주에 걸린다.
그동안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어비스에 진입했고, 그중에서 스타팅 포인트의 원주민들에게 행패를 부린 플레이어가 없었겠는가.
하지만, 스타팅 포인트에서 원주민들을 공격했던 모두는 하나같이 '어비스의 저주'에 걸려 모든 능력치와 능력들이 제거되어 버렸으니까.
물론 강민은 어비스의 저주에 대해서 알고 말했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정곡을 찌른 셈이다.
템플의 플레이어들이 조금 전 무기를 꺼내 들었던 것도, 강민을 겁주기 위해서일 뿐.
진짜로 싸울 생각 따위는 없었다.
강민이 그들을 보며 싸울 의지가 없다고 느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리 숫자를 보고 바로 꼬리를 내릴 줄 알았지. 저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냐고.'
제이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블러드가 두렵지 않고, 너희의 단체에 속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척을 질 필요도 없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뭐?"
"너희와 나의 목적이 같다면, 굳이 내가 템플이라는 단체에 속하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지 않겠냐는 말이다."
강민이 그렇게 말하며 제이미를 바라봤다.
"그건… 그래."
"그렇다면 너희가 나에게 협조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괜찮겠나?"
"어, 어? 갑자기?"
제이미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무슨 대화가 이래! 라는 말을 집어 간신히 넘겨 삼켰다.
기승전결이 없다.
강민은 완전히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끌고 갈 뿐.
"아닌가?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우리는 각자 서로 갈 길을 가는 수밖에…."
"아, 아니야! 협력, 협력할게!"
제이미가 다급히 소리쳤다.
순간 강민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섬뜩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렇군. 역시 우리는 대화가 잘 통해. 그렇지?"
"그런…가?"
고개를 갸웃하는 제이미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뻔뻔한 강민.
제이미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당했군.'
어쨌든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
'됐군.'
여자의 표정을 본 순간, 나는 확신했다.
내 말이 먹혀들었다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처음에 조금 막무가내로 나갔던 것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선, 저들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고 내가 휘어잡을 필요가 있었으니.
나는 조금 마력을 뿜어내며 저들에게 위압감을 느끼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저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내가 원하는 부분들에 대해서 쏟아낸 것이다.
어쨌든 덕분에 내 생각을 빠르게 전달할 수 있었고.
귀찮은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내가 원하는 합의점에 도달했던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라고 해서 독단적으로 결정할 순 없어. 우리가 그동안 모아 온 정보들을 초면인 너에게 넘겨주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건… 너도 알잖아."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하는 여자.
"물론이지. 나도 그 정도로 미친놈은 아니다."
내가 그렇게 답하자, 여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우리와 동행할 생각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여자가 물었다.
그리고 나는 미소 지었다.
내가 데려가 달라고 하지도 않았건만, 오히려 저쪽에서 나를 모셔가려고 하게 되었으니.
일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야겠지. 하지만 아직 걸리는 게 있다."
"뭐지?"
"개척률. 너희는 나와 다른 대륙 출신이고, 너희의 본거지에 가기 위해서는 아시아 대륙을 벗어나야 할 텐데. 그렇다면 내 개척률은 어떻게 되는 거지?"
만약 아시아를 벗어나도 개척률을 증가시킬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발레하드를 벗어날 수 있다.
"역시. 아직 어비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군."
"당연하지. 이제 막 일주일 정도 되었다"
"……."
일주일이라는 말에 제이미의 안색이 잠시 어두워졌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개척률은 네가 시작한 지역을 벗어나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어."
"그렇군."
그거면 됐다.
결국 발레하드에서 시작했다고 해서, 꼭 이곳에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다는 말.
"하지만, 이미 한 번 개척된 곳에서 개척률을 획득하는 속도가 느려질 수도 있긴 하지만…."
그녀의 염려는 내게는 관련 없는 일이다.
어차피 개척률을 진척시키는 건, 내가 아니라 초감각이니까.
"그건 걱정할 것 없다."
"아, 음…."
여자는 내 말에 어느 정도 납득한 모양이다.
그녀도 이미 나 혼자서 달성한 개척률은 알고 있을 테니.
"근데 정말… 너 혼자서 어비스에 온 게 맞는 거야?"
"그래. 아시아 대륙에선 내가 최초다. 그리고 유일하고."
"그쪽 탑은… 난이도가 많이 높은가 봐."
이미 탑을 뚫고 온 그녀는 이미 탑의 생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으니.
"끔찍할 정도지."
"……."
결국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여러가지 생각들이 복잡하게 뒤엉킨 듯한 표정이었다.
어쨌든 이들과의 만남은 나에게도 꽤 유익했다.
'잘됐어. 그렇지 않아도 슬슬 이곳을 벗어나려고 생각 중이었는데.'
조금 막막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 드넓은 어비스에서 어디로 가야 할 지 방향을 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템플이라는 녀석들의 거점에 도착할 수만 있으면, 금방 다음 목적지도 확정할 수 있을 거다.'
나는 템플과 함께 움직이기로 결정한 뒤, 다시 국왕을 알현하기 위해 움직였다.
***
"미, 미안하게 되었군…!"
내게 이런저런 사정을 들은 뒤 국왕은 난처한 얼굴로 템플의 플레이어들을 바라봤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갑작스레 산맥을 넘어 나타났으니 할 말은 없지요."
"이해해 준다니 고맙소. 그보다…."
국왕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이제 발레하드를 떠나겠다는 말을 하고 난 참이다.
"정말 떠나야겠소?"
국왕은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예. 한곳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나도 짧은 새에 조금이나마 정이 들기도 했지만, 떠날 때는 단호하게 떠나는 게 맞다.
"그렇군. 아쉽게 되었어. 그래도 우리는 그대를 결코 잊지 않을 걸세. 앞으로 이곳에 당도하는 모든 모험가들에게 그대의 이름을 알릴 것일세. 발레하드의 영웅이여!"
"…영광입니다."
딱히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이미 드래곤을 사냥하는 영상이 퍼진 마당에 딱히 말릴 이유도 없겠다 싶기도 했고.
그때.
"모험가니이이이임!"
"으흐흐흑!"
"떠나셔도 절대 우리를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모험가님이 아니었으면 우리느으은…!"
기사들과 사냥꾼들이 울음을 쏟아냈다.
발레하드의 요리사와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다들 내게 엄청나게 많은 도움을 받은 이들이기도 했지만.
발레하드 녀석들이 유독 정이 많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
나는 짧게 답해주고, 그들과 인사를 나눈 뒤 템플과 함께 발레하드를 벗어났다.
레미드족과는 렘을 통해서 간단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니 굳이 들리지 않았고.
"잘 가십시오오오오!"
"항상 건강하셔야 합니다아아아!"
산맥을 넘어 시야에 사라지기 전까지 발레하드의 기사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생각보다 정이 많은 사람인가?"
제이미가 내게 말했다.
"별로."
"아닌 것 같은데?"
"좋을대로 생각해라."
"참. 알다가도 모르겠군. 이렇게 보면 또 인간적인데 말이야."
"좋을 대로 생각하라고."
제이미는 이제 내가 조금 편해졌는지 옆에서 자꾸 말을 걸어왔다.
귀찮다.
"그보다… 대체 어떻게 드래곤을 펫으로 길들인 것이지."
"꾸웅!"
"아시아의 탑에선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믿을 수 없군."
템플의 플레이어들은 해츨링을 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
그건 그렇고.
요새 몰른이 꽤 조용해졌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 건지.
입 다물고 있는 몰른의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꽤 낯설었다.
'…나중에 시간을 두고 한 번 물어봐야겠어.'
"아시아의 플레이어들은 다 너와 같이 강한가?"
"…그건 아니다."
당연하지.
내가 특출나게 강할 뿐.
"그렇다고 해도 너를 보면 아시아의 플레이어들은 다른 대륙의 플레이어들에 비해서 훨씬 강할 게 분명해. 설계자가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인 것 같은데."
"그래. 자신이 직접 강하게 키우는 게 목적이라고 했었지."
"…아프리카와는 정반대로군."
"그런가?"
"그래. 아프리카의 플레이어들은 숫자가 몹시 많아. 실력은 다소 떨어져도 많은 숫자로 빠르게 개척률을 쌓아가고 있지."
"미대륙과 유럽은?"
"미대륙과 유럽 대륙은 모두 중도를 걷는다. 적당한 난이도와 적당한 숫자.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유독 극단적인 모양이야."
"그렇군."
제이미와 함께 이동하며 내가 몰랐던 많은 정보들을 얻어낼 수 있었다.
현재 어비스의 정세에 대한 디테일한 정보들.
그리고 블러드와 템플의 간략한 역사들도.
"앞으로 길드들도 너를 견제하기 시작할 거다. 아시아에는 아무런 길드도 없으니, 너를 보호해 줄 세력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템플에 소속될 생각은 없어."
"눈치는 더럽게 빠르군."
이런 식으로 제이미는 몇 번이나 나를 포섭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당연히 나는 계속해서 그 제안을 쳐내고 있었고.
그래도 제이미는 내가 블러드에 대해서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는 마음을 크게 놓은 상태였다.
"걱정 마라. 나는 누구의 도움 없이도 내 목적을 이룰 만큼 강하니까."
"…반박은 못 하겠어."
그동안 몇 번이나 몬스터를 만났고, 내 전투 장면을 목격한 제이미다.
결국 그녀는 자신들 모두가 힘을 합쳐도 나 하나에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그들의 수장인 알렉스라는 플레이어조차도 나와의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고 선언했을 정도니까.
그리고 저들을 더 놀라게 만든 건.
[9.9875%]
현재 아시아의 개척률.
이제 10%를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이 순간에도 개척률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개척률은 10%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초감각의 효과와 증가된 개척률 진척 속도가 더해진 결과였다.
게다가 발레하드와 레미드들이 전해주는 개척률도 나름 소소하게 도움이 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그래서 얼마나 남은 거지?"
벌써 발레하드를 떠나온 지 1주가 지나갔으니.
슬슬 이동하는 것도 지겨워진 참이었다.
"걱정 마.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 루트를 우회하느라 시간이 걸린 부분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하지."
"문제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