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상태창이 달라졌다-193화 (193/277)

193화

"돌아왔군."

"그래."

"레미드님을 만난 소감은 어땠나."

"따뜻하더군."

"그렇지."

내가 돌아온 뒤 라문과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만약 원래 세계에 있던 레미드들이라면 나와 이런 언약은 결코 맺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도 어느 정도 현실에 타협했다는 말이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겠지.'

사실 이곳에 그렇지 않은 이들이 얼마나 되겠느냐마는.

다시 한번 이 탑의 끝까지 올라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모험가님! 돌아오셨군요!"

"걱정 많이 했습니다!"

어느새 기사들도 내 옆으로 다가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어쨌든 잘 되었군. 앞으로 너희 왕국은 더욱더 발전할 수 있을 테지."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험가님이 아니셨다면… 우리는 어찌 되었을지."

"맞습니다. 만약에 저 협곡을 개척했다고 해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돌아가야 했겠죠."

저벅

라문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우리 레미드는 당신들과 함께하기로 한 이상, 그대들이 우리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우리의 신의를 다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저희 역시 온 힘을 다해 당신들을 지킬 것이며, 당신들과 약속한 대로 의미 없는 살육은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내 정신 좀 봐. 이럴 때가 아니군. 어서 국왕 전하께 이 사실을 전해드려야 합니다. 레미드의 수장이시여. 허락하신다면… 우리 발레하드 왕국의 국왕 전화와 직접 대화를 나눠 보시겠습니까."

기사의 말에 라문은 다른 레미드들과 시선을 교환하고, 이내 답했다.

"좋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두 집단의 수장들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

"경사로다!"

우리가 귀환한 순간, 국왕이 소리쳤다.

라문은 자신들이 살고 있던 숲속과는 너무도 다른 왕국의 환경에도 크게 낯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어비스에서 험한 꼴을 많이 봐서 그런 모양이다.

어쨌든, 국왕과 라문의 대화는 수월하게 진행됐다.

라문은 발레하드에게 그 지역을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생태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의 채집과 사냥을 허락했다.

발레하드 역시 레미드를 지키기 위해 병사를 파견하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아직 발레하드의 보호란 명목상에 불과했다.

실질적으로 레미드를 보호하는 건, 발레하드가 아닌 나였으니까.

그럼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썩 유쾌했고.

꽤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결국 라문과 국왕이 손을 맞잡았다.

그때였다.

[두 문명의 교두보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두 문명은 화합을 이루며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개척률의 증가 속도가 가속됩니다.]

['레미드'족이 발견한 모든 것은 아시아 지역의 개척률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또 한 번 개척률에 대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발레하드 왕국 때와 마찬가지로, 레미드들의 개척이 아시아의 개척률에 관여된다는 메시지 하나와.

'개척률이 더 빠르게 증가하게 되었다니.'

겹경사다.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빠르게 진척되는 개척률이었건만, 여기에서 속도가 더 증가된다면.

정말로 다른 대륙을 따라잡는 것도 이제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꽤 차이가 벌어져 있는 것도 맞다만.

내게 필요한 건 시간뿐.

그렇게 그들이 대화가 이어지던 중.

"모험가여."

국왕이 나를 바라봤다.

"예."

"우리가 낯선 이들을 사로잡았다네."

"……?"

낯선 이들이라고?

"사냥꾼들이 사냥을 하던 중, 그대를 찾고 있는 무리를 발견하여 포박하여 왔다네."

마치 나에게 칭찬을 바라는 듯한 말투였지만, 내가 어찌 감히 국왕을 칭찬할 수 있으랴.

그보다 나는 국왕의 말에서 한 가지 힌트를 캐치해 냈으니.

'그들이다.'

직감할 수 있었다.

템플.

그 녀석들이 나를 찾아왔다고.

나는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국왕에게 말했다.

"그들을 만나 볼 수 있겠습니까. 제가 그들의 정체를 밝혀내겠습니다."

"오오! 역시. 자네는 우리 왕국의 귀인일세! 만약 검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내 결코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국왕의 허락이 떨어졌고.

"어서 모험가를 그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

나는 곧 병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지하의 감옥으로 이동했다.

***

"너희는 잠시 자리를 비켜 줬으면 좋겠군."

나를 지하 감옥으로 안내했던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말씀해 주십시오!"

힘찬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라는 말을 삼키면서.

그렇게 나와 몰른, 해츨링만 남아 있는 상태로 템플의 플레이어들이 잡혀 있다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지하 감옥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렇게 조금 걸음을 옮겼을 무렵.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긴장된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저들의 힘이라면 충분히 이 감옥을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빠져나가지 않은 채 수감되어 있다는 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겠지.

내가 조금 더 걸음을 옮기며 그들이 있는 곳에 다가갔을 무렵.

나와 눈이 마주친 플레이어들이 흠칫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나 역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군. 템플."

"……!"

"어, 어떻게…!"

내가 자신들을 알아본 순간, 템플의 플레이어들의 표정에 경악과 경계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설마… 벌써 블러드에게 포섭된 건가?"

"젠장. 한발 늦은 모양이다."

그러더니 그들은 몸을 일으켰다.

몸을 포박하고 있던 포승줄을 끊어냈고,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시늉이군.'

무기는 꺼내들었지만, 당장 움직이기 위한 준비 자세가 아니다.

그저 나를 겁주기 위한 허세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무기를 내려라."

내가 말했다.

어차피 저들도 나와 싸울 의지는 없어 보였으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 네가 우리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건… 이미 블러드와 접촉했다는 것일 테고. 블러드와 접촉하고서도 멀쩡히 살아 있다는 건 그들에게 포섭됐다는 이야기겠지."

내가 묻지 않아도 알아서 떠벌리는 템플의 플레이어.

그에게 내가 답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뭐…?"

"블러드라는 녀석을 만났고, 그들에게서 너희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포섭된 건 아니다."

"무슨… 그 녀석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알아낸 플레이어를 살려 둘 리가 없다."

"그 반대로 생각해 보는 건 어떻겠나."

나는 코웃음 치며 물음을 돌려줬다.

"뭐…?"

"너희가 나를 찾아왔다는 건, 내가 범상치 않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일 테지. 그렇지 않은가."

조금은 뻔뻔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돌려 말하는 건 내 성격과는 맞지 않다.

"그, 그야…."

"그런데 대체 뭘 의심하는 건가. 나를 찾아온 블러드라는 녀석들은 모두 내 손에 죽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

그제야 템플의 플레이어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며 복잡한 감정들을 나눴다.

"믿지 못하겠다면 실험해 봐도 나쁘지 않겠군."

나는 검을 뽑아들고 그들을 겨냥했다.

"대화를 나눌 한 명은 살려 줄 용의도 있고."

"자, 잠깐…!"

그제야 템플의 플레이어들이 무기를 내려놨다.

물론 나도 저들과 싸울 용의는 없었으니 다시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고.

"자. 그럼 한 번 대화를 나눠 보지. 나도 이곳에 대해서 아직 궁금한 것들이 꽤 많으니까."

"조, 좋다…."

풀썩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들 앉아라. 꽤 긴 대화가 될 것 같은데."

"그, 그… 그래. 다들… 앉아."

내 페이스에 완전히 휘말린 템플의 플레이어들.

그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주저앉았고, 철창을 사이에 둔 채 나와 그들을 한참이나 말 없이 서로의 표정을 살피며 탐색전에 들어갔다.

***

'…뭐야, 대체.'

현재 이 무리를 이끌고 있는 플레이어의 이름은 제이미.

그녀는 강민을 본 순간 큰 혼란에 빠진 상태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부류의 인간이다.

아무리 표정을 읽으려고 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뿐인가.

다짜고짜 자신이 블러드들을 모두 죽였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니.

'아직 어비스에 대해서 몰라서 그런 건가? 블러드가 어떤 놈들인지 알고 있으면… 저런 말을 쉽사리 내뱉을 순 없을 텐데.'

그녀는 아직 강민이 블러드의 무서움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고 판단했다.

물론 강민이 꽤 강해서 자신을 찾아온 블러드를 모두 처치했을 수는 있지만.

'그들의 무서움은 블러드의 수뇌부들이야. 분명 이 자를 찾아온 녀석들은 잔챙이들이겠지.'

제이미 역시 블러드에 소속되었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입장에서.

사념의 파편을 끌어 모으고 많은 사념을 보유한 상위 블러드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정체를 숨기고 어비스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언제 어디에서 만나 끔찍하게 살해당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으니까.

'알려줘야겠어. 블러드의 무서움에 대해서.'

제이미가 침을 삼키며 강민을 바라본 그 순간.

'……!'

다시 한번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인데도, 강민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중압감은 그녀를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다.

'무슨 사람이….'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만나왔다.

탑에서도, 어비스에서도.

블러드에 소속되어서, 그리고 이제는 템플의 소속으로.

수많은 랭커와 거대 길드의 수장들을 만나왔지만, 저런 플레이어는 처음이다.

'헛.'

그녀는 어느새 떨리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발견했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어느 순간부터 앞에 앉아 있는 저 남자에게 공포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건 다른 플레이어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강민과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몸을 부르르 떨면서 시선을 피하기 바빴으니까.

'완전히… 말려들었어.'

심리전 따위 의미가 없다.

상대의 의중을 읽기 위한 탐색전 따위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는….'

강민을 포섭하기는커녕 그들의 뜻을 전하는 것도 힘들어진 상황이었으니까.

그때였다.

"됐나, 탐색전은?"

다시 한번 들려온 강민의 한마디에 질색을 하며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저 남자가 무서워질 지경이다.

그런 제이미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강민은 태연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는 너희와 협력할 생각이 없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선을 그어 버리다니!

그럼 여기까지 온 모든 노력과 시간은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는 뜻이 아닌가.

"자, 잠시만…!"

정말 정신이 빠져나갈 것만 같다.

대체 저 인간은 어떻게 되어 먹은 인간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제멋대로다.

그런데 그게 또 설득력이 있었고, 딱히 반박도 할 수 없었으니.

'돌겠군.'

제이미가 두통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이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저 대체 무슨 말을 더 지껄이는지 들어나 보자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때 강민의 한 마디가 더 흘러나왔다.

"대신, 하나 더 약속하지. 나는 블러드를 쳐부술 것이다. 모조리 씨를 말려버릴 생각이지."

결국 제이미는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