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역시. 알렉스야."
"그래. 인간의 왕국이다."
이제 막 산을 넘어선 템플의 플레이어들이 발레하드 왕국에 도착했다.
그들이 그동안의 스타팅 포인트를 분석한 결과, 어비스의 스타팅 포인트는 무조건 인간들의 거점에서 시작된다.
왕국일 수도, 도시일 수도 있지만.
수많은 종족들이 존재하는 어비스에서도 인간들의 거주지만이 플레이어들의 스타팅 포인트로 지정되어 있었다.
"가자. 제발 이곳에 그가 있기를 바라야겠지."
템플의 플레이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조금 더 왕궁을 향해 다가갔을 무렵.
패앵!
어디선가 날카로운 물체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헛!"
화살 소리다.
템플의 플레이어들이 경계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푸훅!
"쿠에에엑!"
화살이 노리던 곳은 템플 플레이어가 아닌 산속을 뛰다니던 짐승이었다.
"좋아! 명중했어!"
"활 솜씨 하나는 죽여주는군. 저 빠른 녀석을 어떻…."
"무슨 일이야?"
"인간이다."
마침 그쪽으로 접근해 오던 사냥꾼들은 정체 모를 인간들을 보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어비스에 진입한 플에이어는 그들의 왕궁 내 지정된 장소로만 소환된다.
그렇지 않고 산맥을 타고 넘어 왔다는 건, 그들을 위한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뜻이었으니.
"누, 누구냐!"
사냥꾼들이 석궁과 화살을 치켜들고 플레이어를 겨냥했다.
그때.
저벅
플레이어 한 명이 양손을 들어 올린 채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우리는… 모험가를 찾기 위해 왔습니다."
그 말에 사냥꾼들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분을 말하는 건가?"
"조용히 해!"
"아이구, 내 입이 방정이지!"
사냥꾼들이 다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순간 템플 플레이어들의 눈가에 이채가 어렸다.
'있다.'
'여기에 있었어!'
사냥꾼들의 반응으로 보아 아시아의 플레이어가 이곳에서 시작한 게 분명했다.
"그, 그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이놈들! 너희가 누구인 줄 알고 그분과 만나게 해 준다는 말이냐! 어림도 없는 소리!"
"첩자다! 저들은 첩자가 분명해!"
이미 발레하드 왕국의 강민에 대한 애정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고.
사냥꾼들도 마찬가지다.
강민이 주변의 몬스터들을 소탕해 준 덕에 사냥할 수 있는 범위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수확량이 늘어난 덕에 사냥꾼들의 입지가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었으니까.
"오, 오해입니다. 첩자라니요! 우리는 그분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
"닥쳐! 어서 묶어라!"
템플 플레이어들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사냥꾼들을 그들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냥꾼들 정도야 템플 플레이어 혼자서도 모두 쓸어버릴 수 있을 테지만.
'우선 이들의 말을 들어 줘라. 차라리 왕궁 안으로 들어가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어.'
'그래. 이들이 이 정도로 그 플레이어를 신뢰한다면, 분명 왕궁 안에서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다.'
오히려 템플의 플레이어는 이 소동을 기회로 여기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모두가 포박된 뒤.
"따라와, 이놈들!"
"너희는 엄벌에 처하게 될 것이다!"
사냥꾼들의 기세등등한 외침과 함께 그들은 사냥꾼들에게 이끌린 채 왕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저 자인가."
"예, 그렇습니다."
"……."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레미드들.
하나같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기운을 풍겨냈다.
수장이라는 라문보다도 더 깊고 청명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게 렘이군.'
라문의 렘은 마력과 크게 분간이 안 되었지만, 저들의 렘을 느낀 순간 나는 '렘'이라는 기운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력보다 훨씬 더 깊고 정순한 에너지다.'
마력은 파괴적인 에너지다.
그 힘을 응축하고 갈무리해 마법으로, 혹은 오러를 만들어내고.
그 강력한 힘으로 적을 파괴하고 사망에 이르도록 만드는 기운.
'하지만 렘은….'
마력에 비해 훨씬 더 유순하며 부드러운 힘이었다.
마력과 렘.
두 에너지 모두 자연을 기반으로 한 에너지인 것은 공통점이지만.
그것을 발전시켜온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겠지.
"이리 와라."
라문이 나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라문과 다른 레미드들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네가 가지고 있는 살육을 위한 모든 도구를 내려놔."
어느 정도 그들과 가까워졌을 때, 라문이 내게 다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입고 있는 장구들을 모두 해제했다.
검과 갑옷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내 장비들에서 왠지 진한 피비린내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모든 장비를 벗은 채 갑옷 아래에 덧대 입는 천옷만을 걸치고 있게 되었다.
그런 나를 보며 라문과 다른 레미드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원을 그리며 나를 빙 둘러서기 시작했고.
"너희들은 물러나 있어라."
기사들과 몰른, 해츨링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라문의 말대로 나와 레미드들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섰고.
우우웅!
라문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렘.'
조금 전 저 옆에 서 있는 레미드들에게서 느꼈던 그 렘.
희미하던 라문의 렘은 강렬하게 뻗어 나오며 내가 있던 공간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 순간.
파드득! 파사삭!
공간이 변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우리가 앉아 있던 테이블과 의자는 사라졌고.
거대한 성의 모습이던 공간은 어느새 드넓은 숲으로 변해 있었다.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을 쏟아낼 만큼 장엄한 대자연의 한가운데에 나는 서 있었다.
우우웅!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레미드들이 자신의 렘을 뿜어냈다.
강렬한 에너지다.
하지만 결코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렘이 나를 강하게 감쌀수록, 온몸에 가득하던 긴장감이 풀어졌으며.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복잡한 생각들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파아앗!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저 하늘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빛이었다.
"……."
그 빛이 내 몸을 감싼 순간, 나는 낯선 곳에 서 있었다.
라문과 다른 레미드들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 서 있는 건, 오직 나 뿐이었다.
***
"언약이라더니… 꽤 거창하군."
울창한 숲속 한가운데에 서서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마도 렘으로 만들어낸 새로운 공간인 모양이다.
심지어 이곳에서는 내 마력조차 움직일 수 없었고.
내가 가진 스킬들도 전혀 발동되지 않았다.
'상태창도 열리지 않아.'
장비를 모두 벗고온 나는, 말 그대로 완전한 무방비 상태.
하지만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탑에 오른 뒤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완전한 평온.
"나쁘지 않군.'
늘 싸우고 누군가를 쓰러트리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왔던 내게는 낯선 감흥이었다.
그러던 중.
파삭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거기에는 사슴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물론 사슴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 평범한 사슴은 아니겠지.
사슴의 온몸은 반투명한 상태였으며, 사슴의 뿔은 크고 길게 뻗어 있었으니.
신비로운 '영물'같이 느껴졌다.
파사삭
사슴은 내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
내게 걸어오는 걸음에 망설임이나 경계심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서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사슴을 바라봤다.
그가 나를 경계하지 않으니, 나도 경계하지 않았고.
그저 사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렘을 느꼈다.
사슴은 어느새 내 바로 앞에 다가와서 그 투명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
빨려 들어갈 것 같이 깊고 투명한 그 눈동자에 매료될 것만 같다.
[…피냄새가 진하구나.]
사슴이 말했다.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말을 하지 않았으면 그게 더 어색했을 테지.
[매 순간이 증오와 분노로 점철되어 있는 삶이라니.]
사슴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천천히 움직였다.
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너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에겐 각자의 삶이 있는 법이니.]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그래. 나 역시 너와 같은 삶을 살았으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테지. 너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너의 자리에서 너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무엇보다 귀중한 삶일 테니.]
"……."
[이야기는 들었다. 네가 우리를 지켜 주겠다고?]
"그래. 당연히 대가가 없는 건 아니다."
가식 따위 떨 생각은 없다.
그럴 성격도 아니고.
[만약 네가 나와 언약을 하게 된다면, 너는 렘을 가지게 된다.]
"……!"
[그러면 너는 그 렘을 가지고 또 끝없는 싸움을 이어가게 될 테지. 그렇지 않느냐.]
"그렇겠지."
역시 솔직히 말했다.
렘이라는 힘을 얻게 된다면, 그걸 가만히 가지고 있을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역시나 거짓말을 해서 저 힘을 손에 넣고 싶지도 않았고.
[걱정은 마라. 나도 도움을 바라는 입장에서 너의 삶의 방식에 관여할 자격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사슴은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슬퍼 보인다.
[다만… 이렇게 된 우리의 처지가 안타까울 뿐이니….]
"그렇겠지."
비단 레미드뿐만이 아니다.
발레하드도 그랬고, 이 탑을 살아가는 수많은 원주민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도와주마. 너희를 집어삼킨 이 괴물을 내 손으로 끝내 줄 테니, 나를 믿어 줬으면 좋겠군."
내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조금 감상적이었지만.
이곳에서 모든 긴장이 풀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꼭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구나.]
그 순간.
[레미드족의 수호자 '레미드'와 언약을 맺었습니다.]
[레미드족 고유의 능력 '렘'을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레미드족 고유의 능력 '렘'이 플레이어 '한강민'의 상태창에 각인됩니다.]
['렘'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동시에 상태창이 저절로 펼쳐졌다.
조금 전만 해도 열리지 않던 상태창이었건만.
[이름: 한강민]
>레벨 : 140
>스탯
-육체
힘 : 4114.976
[초월 - 방어 무시 50%]
민첩성 : 3618.234
[초월 – 치명타 확률 70%]
체력 : 3681.342
[초월 – 피해 반사 50%]
-정신
마력 : 3601.644
[초월 – 마법 보호막 물리/마법 피해 50% 흡수]
렘 : 0.000
렘의 위치는 스탯창의 마력 아래.
아직 그 수치는 0 불과했지만.
[자연의 렘을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렘의 수치가 미약하게 증가합니다.]
[렘 : 0.00001]
렘 수치가 증가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무언가 내 가슴 언저리를 간질였다.
내게 생긴 변화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렘의 에너지가 사념의 파편을 정화하기 시작합니다.]
[렘의 에너지가 너무 미약합니다.]
[아직 사념의 파편을 정화하기엔 렘의 에너지가 한없이 부족합니다.]
"……."
또 한 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런 나를 보며 레미드의 수호자 '레미드'가 말했다.
[마음에 드느냐.]
"물론…이다."
사념의 파편을 정화하는 것 이상으로.
내가 느끼는 렘이라는 에너지는 그 활용 방안이 무궁무진할 것이 분명하다.
아직은 그 수치가 너무 미약할 따름이지만,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나와 레미드들의 생의 근원인 렘. 부디 옳은 곳에 써주기를 바라노라.]
그 말과 함께.
파아아앗!
한없이 찬란한 빛이 내 시야를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