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어쨌든, 단번에 5%에 도달한 개척률을 보며 나는 다시 미소 지었다.
'5%.'
경이적인 속도라는 건 나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현재 가장 높은 개척률을 달성한 대륙은 미대륙.
'이 속도라면 따라잡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100%를 달성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좋군.'
나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때.
"뭐 하지? 어서 따라와라."
라문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저 앞에서는 어느새 커다란 성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래."
나는 라문을 따라 걸었다.
내 뒤를 따르는 기사들과 몰른, 해츨링은 아직도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는지 꽤 분주해 보였다.
성문이 열리고, 그 안에 발을 내디딘 순간.
후우웅!
바람이 불어왔다.
성안에서 이런 바람이 불어오다니.
마치 이 성 하나가 또 하나의 '자연'인 것만 같았다.
"어때. 겉모습은 꽤 너희의 성 같지 않던가."
라문이 내게 물었다.
"설마…."
"그래. 우리가 이 세상에 떨어지고 난 뒤, 너희 '인간'이라는 종족들의 건축양식을 따라 이런 형태의 건축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서."
"……."
이들이 어비스에 와서 느꼈을 고통들에 공감하며 내가 다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자, 앉지."
성의 한가운데에 도착하자 역시 나무와 풀이 뒤엉킨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거기엔 우리가 모두 앉을 만큼 충분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와아아…."
"정말… 신기한 곳이로군…."
"이런 곳이 우리 왕국 바로 옆에 있었다니…!"
기사들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계속해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어느새 라문은 나의 맞은편에 앉아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라문의 주변으로 성 안에 있던 짐승과 새들이 다가왔고.
라문은 그들의 '라듬'을 통해 동식물과 교감하고 있는 듯 보였다.
"무엇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라문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저, 저…."
나를 따라왔던 기사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 말해 봐."
"저는 이 옆에 있는 발레하드라는 왕국에서 온 상급 기사, 라트레이온이라고 합니다."
기사의 말에 라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당신들과 교류를 하고 싶습니다."
기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들로서는 레미드족을 본 순간, 또 다른 미래를 보았을 것이다.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 이들이었으니, 싸울 이유는 없을 것이며.
더 나아가 발레하드 왕국의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많은 정보들을 더해 줄 수도 있을 테니까.
만약 발레하드가 레미드족과 교류만 시작한다면, 그들의 기본적인 생활수준은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뛰어 오를 수 있으리라.
하지만 라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기사의 표정도 금세 어두워졌다.
"인간은… 싸움을 좋아하고 살육을 즐기는 종족이라고 알고 있다."
"……."
그 말에 기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이다.
특히나 그는 기사다.
기사가 어떤 존재인가.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적을 베어 넘겨야만 하는 직업.
자연의 허락 없이는 '싸움'조차 하지 않는 레미드에게 기사란 상극일 수밖에.
하지만 내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역시 발레하드와 레미드가 함께 교류하길 원하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이곳을 떠난 뒤, 발레하드가 레미드와 교류하며 이 근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내 개척률이 증가하게 될 테니까.
일종의 매크로인 셈이지.
게다가 앞으로 다른 플레이어들이 발레하드를 스타팅 포인으로 삼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 봐도.
발레하드가 발전해 있을수록,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어비스에 적응하기 쉬워질 테고 말이다.
'라문을 구슬려 볼 수 있을 만한 게 없을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라문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역시 저들의 결핍을 충족시켜줘야 한다.
그 순간, 파편을 보며 라문이 격렬히 거부감을 표했던 그 장면이 생각났다.
'이거라면… 라문을 설득할 수도 있겠는데.'
"라문."
"음?"
"그렇다고 너희도 언제까지 이곳에 숨어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내가 라문을 떠보기 위해 한마디를 던졌다.
라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조금은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
동시에 나는 확신했다.
이들이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도 무한정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임시방편이라는 말이겠지.'
"네 말이 맞다."
내 예상은 정확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연이 가진 '렘'이 많이 고갈된 상태다. 이대로 가다간 자연의 렘이 모두 사라질 테고, 그렇게 되면 우리 역시 무사하지 못할 테지."
씁쓸한 표정의 라문.
"이것과 관련이 있는 문제겠지."
나는 파편을 꺼내들고 라문을 바라봤다.
파편을 본 순간 다시 흠칫 놀라는 라문.
"…그렇다. 우리가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곳. 알 수 없는 세상에 도착한 이후로 벌써 몇 번이나 우리의 거처를 이동했지."
"거처를 이동했다고?"
이 거대한 대지를 옮겼다는 말인가?
그 말에 기사들도 흠칫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래. 역시 자연의 의지를 담은 '라듬'을 이용한 일이었다. 그 결과 이미 많은 '렘'을 소모했고, 자연의 '렘'은 급속도로 줄어가고 있지. 더 이상 거처를 옮길 만큼의 렘이 남아 있지 않은 우리는… 결국 남은 렘을 이용해서라도 모습을 숨기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렇군. 그리고 너희가 거처를 이동했던 건 이 파편을 가진 녀석들의 습격 때문이었겠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라문.
"그리고 마침 네가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죽음을 각오했다. 더 이상 숨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면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지."
그런 속내가 있었다니.
거기까지는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면, 처음 라문이 내게 했던 그 말이 이해가 가는 것도 사실이다.
[네 놈이 이렇게 뻔뻔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상… 우리도 더는 참을 수 없다!]
라는 말 말이다.
'어쨌든… 덕분에 레미드를 설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지만.'
이들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다른 기사들도 나와 같은 심정인지, 한순간에 숙연해진 분위기가 이곳을 맴돌았다.
"그 렘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면 너희도 같이 사라지는 모양이군."
"그래. 우리가 먹지 않아도, 자지 않아도 생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렘과 라듬 덕분이니까."
덤덤했지만, 동시에 먹먹한 목소리였다.
이미 예정된 죽음을 묵묵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듯한 태도.
안타까운 마음은 사실이지만.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야 말로 내가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지."
"……?"
라문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봤다.
"더 이상 너희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내가 책임지겠다."
"뭐…?"
"말 그대로다. 그 녀석들이 더 이상 너희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내가 지켜주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더 강하다."
"……."
확신에 찬 내 말에 라문의 눈빛이 흔들렸다.
라문 역시도 딱히 반박은 하지 않았다.
그 역시 조금 전 내 실력을 조금이나마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그러니 저들과 손을 잡아라. 그리고 너희는."
나는 기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예, 예!"
"이들과 약속해라. 앞으로 의미 없는 살육은 하지 않겠다고."
"무, 물론입니다!"
"물론, 레미드 너희도 이들이 너희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해야 할 테지. 인간은 레미드와는 본질적으로 태생이 다른 종이다. 필연적으로 살육을 할 수밖에 없지."
"……."
라문은 떨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표정에서 긍정의 메시지를 느낄 수 있었다.
자연을 사랑하는 만큼, 자연을 존속시키고 싶다면.
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러던 중.
라문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대는 모험가다. 어떻게 우리를 항상 지켜주겠다는 말인가."
"라듬. 너희의 라듬을 이용해라. 내 예상이라면 충분히 나 하나쯤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당연히 나도 어느 정도 생각해 놓은 방안이 있었고.
그것이 바로 저들의 라듬.
이 거대한 자연을 통째로 움직일 수 있는 라듬이라면, 나 하나쯤 움직이고 연락을 취하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이지 않겠는가.
"가능… 하다. 네가 우리와 언약을 맺는다면 언제든 라듬을 통해 소통하고 서로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어."
라문의 목소리가 들뜨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그 언약을 맺겠다. 그리고 너희를 지켜주마. 그 녀석들이 너희들에게 결코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순간 나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억지로 억눌러야만 했다.
언약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또 하나의 새로운 능력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까.
"그, 그래만… 그래만 준다면…!"
라문이 조금은 격양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기, 기다려다오. 우리 일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올 테니. 언약이라는 건 결코 쉽사리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라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가 얼마나 자연을 사랑하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장면이기도 했다.
"물론이다. 기다리고 있지."
내가 답하자, 라문은 몸을 일으킨 채로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
"후아…."
"맙소사…."
라문이 사라진 자리.
기사들은 큰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리번거리는 기사들.
나도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여전히 묘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만큼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성의 분위기는 동화나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세상처럼 신비했으니까.
'어쨌든… 이걸로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셈인가.'
5%가 넘어선 개척률.
그리고 발레하드와 레미드의 교류.
이 모든 것은, 나의 개척률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 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템플이라는 녀석들인데.'
아무래도 이 넓은 어비스에서 나를 찾아오기가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언젠간 반드시 만나게 될 거다.'
그들이 나를 찾고, 내가 그들을 찾고 있는 이상.
나와 그들의 만남은 이미 예견된 일이나 다름없을 테다.
'그들과 만나게 된다면, 블러드라는 녀석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겠지.'
블러드.
이 탑의 사념을 이용하는 존재들.
어비스에서 그들을 도려내는 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과제 중 하나다.
'그렇게 하나씩 나아가다 보면, 탑의 머리에 도달할 수 있을 거다.'
***
"좋다. 들어와라."
잠시의 시간이 지난 뒤, 라문이 다시 나타났다.
그의 옆에는 레미드족들이 좌우로 도열해 있었다.
모두의 몸에서는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고, 한눈에 봐도 레미드의 고위층으로 보이는 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