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투두둑-
나는 놈의 가슴팍에서 사념의 파편을 뜯어냈다.
그와 함께 아이든 우두머리의 몸이 수분이 빠져나간 것처럼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민첩성 10을 포식했습니다.]
네임드 몬스터라서 조금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민첩성 10 이외에 특별한 보상은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몬스터 한 마리 잡고 민첩성 10을 포식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사기적인 보상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지금 내 수준에서 민첩성 10 정도로는 티도 안 나니까.'
그만큼 내가 말도 안 될 정도로 성장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것보다.
'분명 70층 아래에서 많은 혈계들을 처치했어도 파편을 얻을 수 없었는데.'
그런 명가의 플레이어들에 비해서 한참이나 약한 몬스터 한 마리를 사냥하고 파편을 손에 넣었다.
'우연은 아니겠지.'
물론 아직 표본의 수가 극히 적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겠지만.
'아무래도 머리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졌기 때문일 수도.'
설계자는 분명 이 탑의 꼭대기에 '그 녀석'의 머리가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머리가 있는 그 공간은 놈의 사념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었다.
그럴듯한 추측이다.
설계자들조차 완벽하게 그 녀석의 사념을 통제하지 못했다.
어비스가 아닌, 대한민국의 탑에서도 이미 탑의 사념은 혈계라는 현상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확실히 어비스 1층에는 이전의 탑보다 훨씬 더 많은 사념이 흐르고 있겠지.'
그 결과 아이든 우두머리라는 변종이 탄생한 것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또 다른 가능성이 파생되어 나왔다.
'어비스 1층에는 이 사념의 파편을 이용하는 녀석들이 활동하고 있을 거다.'
그들의 이름도 알 수 없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도 아직 확실치 않지만.
사념의 파편을 이용하는 플레이어들이 존재한다는 가능성만큼은 내가 확신할 수 있다.
'언제나 인간은 강한 힘을 추구하기 마련이니까.'
이미 탑의 사념이 플레이어의 힘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됐다.
혈계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는 일이지 않은가.
심지어 어비스는 사념이 더욱더 널리 퍼져있는 공간.
게다가 파편조차 더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 힘을 사용하는 집단이 생겨나는 건 자연의 순리처럼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 결말은 좋지 않을 것이다.'
그것 역시도 이미 김준석의 최후를 통해 확인한 결과물이다.
놈은 결국 마지막 순간 이 탑에게 잡아 먹혀 버리지 않았던가.
물론 그 탑의 사념을 자신의 힘을 증폭시키기 위해 악용하는 녀석들이 그딴 것에 신경이나 쓰겠냐마는.
'우선은 챙겨 둬야겠군.'
분명 이 사념의 파편이 언젠가 쓸모가 있을 것이다.
나는 사념의 파편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제는.
"돌아가자."
싸움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릴 때다.
***
발레하드 왕궁 전체는 경사가 났다.
드디어 협곡을 뚫어냈다는 기쁨에 국왕은 만찬을 베풀었다.
사실 경사나 만찬이라고 해 봐야 그 규모는 하나의 왕국치고는 조촐하기 그지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현재의 발레하드는 이름이 왕국일 뿐, 사실 이렇다 할 귀족도, 많은 영지도 없었다.
그저 커다란 산 중턱을 차지하고 있는 왕궁 하나를 두고 왕국이라고 하고 있었을 뿐.
'저들이 느끼고 있었을 절망감이 얼마나 컸을지는 감히 상상도 되질 않는군.'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대단하게 느껴졌을 따름이다.
벌써 몇 번이나 나를 만찬에 초대했지만, 나는 끝끝내 거절했다.
아마 지금쯤 나 대신 몰른과 해츨링이 열심히 만찬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생각해야 할 일들이 꽤 많아.'
지금은 만찬 따위나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비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건, 개척률을 빠르게 증가시킬 방법에 대해서 고안해 내야 해.'
초감각의 사기적인 능력 덕분에 어느새 0.5에 가까워진 개척률.
하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벌써 다른 대륙들은 10%를 넘었고, 그렇지 않은 대륙에서도 이미 10%에 근접해 있는 상황.
심지어 다른 대륙에서 어비스로 진입한 플레이어들의 숫자가 정확히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만.
감히 나 혼자서 어찌해 볼 수 있을 숫자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위드 길드에서 빨리 올라와주면 좋겠지만.'
지금 그들은 당장 어비스에 진입할 수 있을 상황이 아니다.
'탑을 돌파하는 것 자체도 큰 문제지.'
이미 나는 위드 길드에게 65층 이후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정리하여 넘겨준 상태다.
하지만 65층 이후는 정보를 안다고 해도 쉽게 클리어 할 수 있을 만한 곳이 아니다.
'아마 족히 몇 달은 걸릴 테지.'
각 층의 몬스터와 보스 몬스터의 약점을 알고 있다고 해도 쉽게 클리어 할 수 없는 게 바로 65층부터 70층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을 빼더라도.'
그동안 박명철과 꾸준히 서로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현재 위드 길드는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상황이라고 했다.
'해야 할 일이 많을 거야.'
탑 밖과의 교류가 시작됐고, 신규 플레이어들을 위한 시설과 교육 시스템을 정비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아무리 위드 길드라고 해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모든 힘을 다해서 탑을 돌파한다고 해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일인데.
여기저기로 에너지가 분산된다면 어비스로 진입하는 시간은 더 늦춰질 수밖에 없다.
위드 길드가 그럴진대, 다른 길드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에 대한 상황은 내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까.
'결국 당분간은 나 혼자서 해내야 하는 일이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최대한 어비스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발레하드 왕국이 작성한 지도만을 가지고도 개척률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우선은 국왕을 잘 설득해 봐야 할 것 같다.
이 근방에 대한 개척률만 최대한으로 달성해 준다면, 최소한 1~2% 정도의 개척률은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다.
'그래 봐야 1~2%라니.'
조금은 눈앞이 막막해지는 것 같았지만, 어쩌겠는가.
나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인 것을.
'그동안 혼자서 탑을 올랐는데 이런 일이라고 못 할 이유는 없지.'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스노우볼을 굴리다 보면, 머지않아 개척률을 빠르게 달성할 수 있게 되리라.
***
하지만 내 그런 걱정은 정말 기우 중의 기우였다.
내가 국왕에게 내 생각을 전달하기도 전.
"그대는 우리 발레하드 왕국의 귀인일세! 우리의 영웅이며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개척자일세! 나는 그대의 이름을 대대로 전할 것이며 우리 왕국의 부흥과 함께 그대의 명성은 이 대륙에 널이 뻗어나갈 걸세!"
국왕이 선포했다.
얼마 되지 않는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신하들이 환호했고.
그 순간.
[업적 '왕국의 구원자!'를 달성했습니다.]
[업적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발레하드 왕국의 국왕, 크림슨의 전적인 신뢰를 받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발레하드 왕국이 달성하는 모든 개척률은 플레이어 '한강민'의 개척률과 자동적으로 동기화 됩니다.]
이런 메시지가 떠오른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횡재인데.'
그렇지 않은가.
앞으로 이들이 밝혀낸 어비스에 대한 정보는 모두가 나의 개척률과 동화된다는 건.
아시아의 플레이어들이 하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그와 비슷한 효과를 손에 넣었다는 뜻이니까.
'게다가 이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꾸준하게 이 근방을 수색하게 될 테고.'
이 근방에서 이들을 위협하는 몬스터들만 조금 정리해 준다면, 앞으로 개척률을 빠르게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협곡 너머에 있다는 왕국과도 만나게 되면, 또 한 번 개척률이 증가할 테지.'
만약 다른 집단과도 발레하드 왕국과 같은 관계를 맺게 된다면, 개척률의 진척 속도는 더 가속화될 수밖에 없을 테다.
어쨌든 한시름 놓았다.
나는 저 앞에서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국왕을 바라봤다.
"혹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제가 당분간 이곳에 머물며 근방의 몬스터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했고.
그 순간.
"오오오!"
국왕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당연히 단순한 호의가 아닌, 앞으로 내 개척률을 위한 밑밥이었지만.
국왕과 신하들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환호했다.
다시 한번 만찬을 베풀겠다는 걸 간신히 말려야만 했다.
"대신 기사와 병사들을 지원해 주십시오. 앞으로 일주일간 근방의 모든 몬스터를 모조리 소탕해 내겠습니다."
인접한 왕국과의 교섭은 우선 근방의 몬스터를 소탕한 뒤로 잠시 미루기로 말 해 놓은 상황이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마음이 급한 것도 사실이지만, 우선은 발레하드 왕국 인근을 모두 정리하는 게 우선이다.
***
"이쪽이 맞는 거지?"
"그래. 이 방향으로 가까이 갈수록 더 크게 반응하고 있어."
"놀랍군. 대체 어떤 녀석이기에."
한 무리의 플레이어들이 숲이 우거진 산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 수는 총 10명.
그들은 지금 막 몬스터들과의 한바탕 싸움을 끝마친 참이었다.
그들 모두는 꽤 강했다.
어비스에 진입했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실력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
이 근방의 몬스터에게 고전할 일 따위는 없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의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다른 블러드 플레이어들과는 다르게 아직 그들의 가슴팍에는 거미줄 형태의 문신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분명 미세한 사념의 기운이 손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아직은 흡수한 사념의 양이 턱없이 부족하다.
파편의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니지만.
더 많은 사념을 흡수하게 된다면 무형의 기운이 굳어지며 파편으로 자라나게 될 것이다.
"언제쯤이면 우리도 사념의 흔적을 가질 수 있게 될까."
사념의 흔적.
그것이 바로 거미줄 모양을 한 문신의 정체였다.
가슴팍에 사념의 파편을 품고.
사념의 파편의 크기가 커질수록 그들의 힘이 강해짐과 동시에 흔적의 크기도 더욱더 커지게 되는 것.
"이번 일만 잘 해내면 분명 우리도 더 많은 사념을 품을 수 있게 될 거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강해지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그렇다고 사념의 흔적을 흡수하는 일을 게을리하지는 마. 우리가 더 많은 사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위쪽에서 파편을 이식해 준다고 해도 의미 없는 짓이니까."
"잔소리는."
그렇게 말하며 그들은 그들이 막 처치한 몬스터의 사체를 가슴을 가르기 시작했다.
몬스터의 가슴팍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흐읍."
플레이어 한 명이 피가 흐르는 몬스터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짧은 신음을 토해냄과 동시에.
우웅!
플레이어의 가슴팍에서 가는 진동이 일었다.
그리고 몬스터의 혈액이 남자의 손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고.
남자의 가슴팍에서 짧은 붉은 빛이 미세하게 새어 나왔다가 금세 사라졌다.
"후우…. 아직 갈 길이 멀군. 흔적은 나타날 생각조차 하질 않아. 대체 그분들은 얼마나 많은 사념들을 흡수하신 거지?"
"어쩔 수 있나. 이제 막 어비스에 올라와서 사념의 정체를 알아 낸 것에 감사해야지."
"그건 그렇고. 이제 저 산 하나만 넘으면 아시아 녀석의 스타팅 포인트에 도착할 것 같아."
플레이어 한 명이 먼 산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산 너머에 있는 것은 바로 발레하드 왕궁.
"당분간 산을 넘을 때까지는 최대한 쉬지 않고 이동하겠다."
"좋아. 나도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는 않아. 혹시라도 템플 녀석들에게 그 녀석을 빼앗긴다면… 정말 상상하고 싶지도 않군."
그렇게 근방의 몬스터를 통해 사념을 모두 흡수한 플레이어들이 걸음을 재촉했다.